1877년 미술전람회 측의 전시 거부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44화

by 오래된 타자기



14장 11
(1875-1876)



1877년 5월 16일 미술전람회의 전권을 쥐고 있던 마크 마옹이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마침내 참된 공화주의 길이 열렸다. 항상 고대하던 것이 이루어진 탓일까? 마네는 그동안의 설욕을 다 씻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친구들 모두가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할 수 있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새로이 권력을 쥔 이들은 프랑스의 더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한다는 구실로 새로운 만국박람회 개최를 결정했다. 늘 하던 수법이었다! 늘 그렇듯이 먹을 빵과 여흥을 즐기게끔 해준다는 발상이었다! 하층계급에 속한 이들의 주의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발상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마지막 열렸던 만국박람회가 어느덧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마네는 미술전람회처럼 만국박람회에서조차 제명을 당하였다.


이번에는? 마네는 만국박람회전에 13개의 제목이 적힌 출품 의향서를 제출했다. 그가 제출한 의향서는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부결되었다!


“마네의 문제는 동양에 대한 문제나, 알자스 로렌 지방에 대한 문제나 다를 바가 없다!” 만국박람회 심사위원회의 비위나 맞추려는 이런 알랑방귀 같은 기사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고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마네가 제출한 출품 의향서를 부결시킨 심사위원회의 해명은 너무도 통상적인 데다가 마네 본인을 납득시키기에도 충분치가 않았다. 마네는 대체 무슨 이유에서 자신의 “작품들이 심사위원들 눈에는 다른 이들의 작품보다 더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충분한 소지가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균형 있는 심사와는 담을 쌓은 듯한 심사위원회”가 자신을 가리켜 “분쟁을 일으킬만한 소지가 충분한 노쇠한 말썽꾼”으로 간주하고 있다는데 분노심마저 일었다.


만일 미술전람회를 겨냥하여 한쪽에 개인전을 위한 전시장을 설치한다면, 이전과 같이 실패로 끝날 확률이 아주 높았다. 마네는 쿠르베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끝에 모든 걸 단념했다. 그와 같은 일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시간과 돈 낭비는 물론이고, 기력마저 소모하는 짓에 불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관전이 주최하는 미술전람회에 대한 고수, 하지만 그 역시도 만국박람회 심사위원들과 같은 이들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명랑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걸 입증하는 것이 마네가 다시 견유주의자적 태도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오펜바흐와 알레비의 방법을 취하였다. 그의 비웃음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건 여전했다.


늘 기회를 엿보던 「철길」이나 「오페라에서의 가장무도회」를 갖고 다시 한번 명성에 도전하고자 하는 생각 또한 여전했다. 커다란 시가를 피우고 압생트 주를 들이켜면서 그 모든 걸 다 쏟아붓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그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에도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갔지만, 그림 앞에서만큼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등을 돌린 인물화 덕분에 새로운 충격을 던질 만큼 아직 충분히 준비되어있지 않은 탓이다!


마네는 회화사에 기록된 모든 작품들을 다 거부하고 나섰다. 하지만 시간은 흐를 뿐이고 시간이 지속될 거라는 착각이나 가혹한 죽음의 준엄함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진정 그는 모든 게 잘될 거라는 환상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펜바흐, 알레비, 라비슈 등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고 있는 작가들의 흥행물에 대한 취향을 이제껏 마네와 함께 공유해 오던 이가 말라르메였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오페라뿐만 아니라 오페레타나 카바레, 스케이트장, 모든 싸구려 댄스홀과 온갖 잡동사니에 이르기까지 의미부여를 했다. 그들은 행복하게도 동시대인들을 엿보는 즐거움에 빠져있었다. 또한 그들은 젊은 비제가 상연한 「카르멘」을 보기 위하여 공연장에 가서는 공연 직전 춤 연습을 훔쳐보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비제는 예전 한창 애국심이 끓어오르던 때 국경수비대에 복무할 당시 알게 된 젊은 작곡가였다. 비록 그게 그와의 유일한 만남이긴 했으나, 마네는 비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비제는 무대에 올린 공연이 실패로 돌아가자 얼마 있다가 33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말라르메는 너무나 진지하게 작품 제작에 임한 것이 그만 위험한 상황까지 자초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Tombe de Bizet au cimetière du Père-Lachaise.jpg 파리 페르 라셰즈(Père-Lachaise) 묘지에 있는 작곡가 비제(Bizet)의 무덤.


마네는 메리와 인연을 맺은 뒤로 비밀리에 그녀와 실을 잣듯 관계를 이어갔다. 아직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을뿐더러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오면서 모든 걸 상의해 버릇하던 프루스트에게조차도 입도 뻥긋하지 않은 상태였다. 프루스트는 오로지 베르트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유산한 사실만 모르고 있을 정도로 마네의 웬만한 사정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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