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불꽃을 피우다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4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2019년 스위스의 라 투흐 드 펠츠 마을에 세워진 귀스타브 쿠르베 기념비



15장-1
(1879-1880)



내 잃어버린 삶의 애잔함이여.

- 아르튀르 랭보



1877년 섣달 그믐날 귀스타브 쿠르베가 세상을 떠났다. 스위스에서 그것도 망명 중에.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쓸쓸히 맞이한 죽음이었다. 쿠르베의 사망소식을 접한 마네는 충격에 빠졌다. 비록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 회화 상의 기법이나 정치적 신념이 서로 다르긴 했어도 인상파 화가들은 쿠르베가 거인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Gustave Courbet, A enterrement à Ornans 1851.jpg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오르낭의 매장(L’Enterrement à Ornans)」, 1851.


쿠르베에게는 범상치 않을뿐더러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그만의 예술적 역량과 재능이 흘러넘쳤다. 그에 더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 결국 쿠르베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마네는 쿠르베의 그와 같은 면모를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부인할 수도 없었다. 쿠르베의 뛰어난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만의 혁명적 사고를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회를 개조하고자 예술마저 진일보한 차원으로 이끌고자 했던 쿠르베의 악착스러움이 결국 저 외딴곳에서 쓸쓸하고도 불행한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La Tour de Peilz en Swisse.jpeg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가 망명생활을 한 스위스의 한적한 호숫가 마을 라 뚜흐 드 펠츠(La Tour de Peilz).


파리 코뮌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그 모든 코뮌 전사들처럼, 사면받지 못한 채 고국에 영영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쿠르베 역시도 타국에서 죽는 날까지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조할 수밖에 없는 비통함과 이를 달래기 위한 폭음과 폭주가 누구 못지않게 건장하기만 했던 그의 몸을 병들게 만들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네가 기억하기론 그 정도로 쓰러질 쿠르베가 아니었다.


사망한 지 사흘째 되는 1878년 1월 3일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쿠르베의 시신은 망명지 스위스의 외딴 마을 라 뚜흐 드 펠츠(La Tour de Peilz)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쿠르베의 명성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그때까지 쿠르베는 여전히 독신인 채,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Stèle de la tombe de Gustave Courbet, La Tour-de-Peilz.jpg 스위스의 라 뚜흐 드 펠츠(La Tour de Peilz) 공동묘지에 묻힌 귀스타브 쿠르베.


지난해 코로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거장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쿠르베가 세상을 뜬 것이다. 아직 정당한 평가가 내려지기도 전에 맞이한 죽음이어서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코로는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경우이지만, 쿠르베는 그렇지가 않았다! 쿠르베의 죽음은 마네에게는 몸서리처질만큼 두려운 죽음에 대한 전조이기도 했다. 드가 역시 쿠르베의 죽음에 전율했다.


최근에 치러진 선거는 개혁 지지 세력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는 이변을 속출했다. 공화파가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쾌거마저 달성했다. 그 바람에 예술가들 또한 혹시나 예술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늘 그렇듯이 공화정이 시작되기에 앞서 이를 자축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네와 피사로가 공공의 복리와 같은 공적인 일에 상당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드가와 르누아르는 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네와 피사로의 입장을 따를 생각 또한 전혀 없었다. 왜냐면 그들의 그림이 너무도 정치적이면서 첨예하게 좌파적 성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코뮤나르드와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판단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진영에도 속하는 걸 거부한 드가와 같이 비록 세잔이 끈질기게 자신의 입장만 고수했다 할지라도 쿠르베의 끔찍스러운 죽음은 이제 어느 누구 한 사람 더는 감히 앞에 나서서 어느 진영에 자신이 속해있다고 주장하거나 말할 수 있는 용기조차 상실하게 만들어버렸다. 상당수의 작가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예술이 혁명적이기까지 했던 이유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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