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 파리 만국박람회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47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샹 드 마흐스(Champ de Mars) 공원에 전시된 자유의 조각상 머리 부분


15장-2
(1879-1880)



정초에 프루스트가 마네에게 기별해 준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만국박람회에 제출할 작품 출품 의향서가 거부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프랑스 회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자리에서 그와 같이 선동적이고 도발적인 그림은 도저히 전시할 수 없다는 게 주최 측의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마네는 마치 잘못을 저질러 벌 받은 탓에 부루퉁해진 아이처럼 미술전람회에 아무것도 출품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쭉해진 낯빛을 띠고 불만을 터뜨렸다.


만일 화가 집단이 공화주의자들의 애찬에 들러리밖에 설 수 없다면, 공화국 자체가 그들을 짓밟는 짓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미술전람회를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만국박람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마술과도 같은 신기한 전기 발명에 따른 문명사회를 노래하는 마당에 이에 발맞추어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 자체가 이를 드높일 수 있는 일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앞으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할 멋진 건물들을 짓기 위한 공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연일 공사장으로부터 뿌옇게 흩날리는 석회가루 먼지 속을 오가면서 엊저녁에는 볼 수 없었던 건물들이 다음날 아침이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그저 두 눈이 휘둥그레질 따름이었다.


파리 시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고 이를 관람하기 위해 수백만 명이 몰려들 것을 대비해 방문객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는 1878년 5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박람회장 준공식에 모든 공사장 인부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한 처사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난 수십 년간 벌어진 비극적 드라마와도 같은 악몽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지우려 한 정치적인 술수에 가까웠다. 1870년에 있었던 궤멸, 전쟁의 참패에 따른 정신적 충격, 파리 포위 공격이 빚은 온갖 만행들, 파리 코뮌에 따른 정치적 분열과 소요, 그로 말미암아 파리에서 벌어진 내전 그리고 가능한 한 공명정대한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한 일련의 사건들 따위가 이에 해당했다!


만일 성공을 숫자상으로만 따진다면, 만국박람회는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3십만 개의 깃발이 내걸린 가운데 6백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들이 파리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거리고 건물이고 할 것 없이 온통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삼색기와 이를 상징하는 깃발들로 나부꼈다!


6월 30일에는 ‘노동과 평화’를 기리는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고 샹 드 마흐스 광장에서는 클레생제흐가 제작한 공화국을 상징하는 조각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연일 불꽃놀이와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파리는 온갖 소음으로 몸살을 앓았다.


파리를 빛의 도시로 만든 건 단지 가로등 불빛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들과 함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합창소리가 파리를 점차 빛의 도시로 만들어갔다. 곳곳에서 성대하게 열린 스펙터클 또한 밤늦은 시각까지 거대한 군중의 흐름을 쇄도하게 만들었다.


공연은 드넓은 광장만이 아니라 공원이나 대로에서도 열렸고, 심지어는 좁은 골목길들에서까지 공화국 수립을 기리는 함성과 함께 합창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시를 읊고, 서로 껴안고, 춤추고, 노래하고……. 난리가 따로 없었다.


1878년 6월 30일 이 혼란한 와중에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공화국이 건전하게 지속되기를 기리는 뜻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가 성대하게 개막되었다.


불꽃 축제, 온갖 깃발로 화려하게 장식한 도시, 그 모든 것은 모네가 「몽토흐괴이 거리」에서 묘사한 축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만국박람회와 함께 모습을 쇄신한 파리는 그처럼 연일 즐거운 함성이 터져 나오는 축제의 한 마당이었다.


Claude Monet, Rue Montorgueil, 1878.jpg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몽토흐괴이 거리(Rue Montorgueil)」, 1878.


누구 못지않게 급진적인 정치 성향을 지닌 마네는 사회 빈곤 계층과 소외당한 이들 편에 가담했다. 모니에 거리에 면한, 이제는 아스라이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아틀리에를 완전히 떠나기에 앞서 마네는 모네가 묘사했듯이, 거리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강렬한 햇살이 내리 쏟아지는 가운데 삼색기들이 휘날리는 거리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풍경화라기보다는 맨 몸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이용사들을 정부가 방관하고 있는 데에 따른 강력한 경고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그림 속에는 그처럼 한쪽 다리를 잃고 목발에 의지한 채,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상이용사가 등장한다. 진정 마네다운 관점에서 대단히 축약적이고도 의도한 바를 확실히 전달하고자 한 뛰어난 묘사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마네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그만의 독특한 가치관을 압축 요약하여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춰 그린 그림에 해당한다. 그에 부응하듯 색조들은 생동감에 넘치며, 그의 가치관까지도 빛나게 만든다. 거리에 몰려든 인간 군상들의 온갖 동작을 세세히 묘사하는 바람에 포화상태에 이르러 심난한 인상마저 주는 모네의 그림에 비한다면, 한결 의미심장할 뿐만 아니라 간단하고도 압축적인 묘사가 훨씬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 삼색기들이라! 우리의 코뮌 전사들이 아직도 망명 중에 있는 가운데 회상해 보면 그 누구보다도 파랑 하양 빨강이 상징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맹렬히 삼색기를 휘두른 자들이 바로 그들 아니겠는가! 불현듯 미몽에서 깨어난 마네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삼색기가 상징하는 바에 부응하기 위해 「모니에 거리」라는 몸서리 처지도록 전율마저 흐르는 놀라운 작품을 완성한다.


파리 코뮌을 척결하기 위해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를 포위 공격한 때로부터 꼭 8년이 지난 시점에 완성한 대작이었다. 이 또한 체제에 대한 날 선 비판인 동시에 무고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쟁 미치광이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그처럼 그림 속에는 한쪽 다리를 잃고 목발에 의지한 채, 석회가루가 날리는 길을 푸른 작업복을 입은 상이용사가 앞쪽을 향해 절름 절름 걸어가고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길은 아직도 포장공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인부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칼 같은 날붙이를 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길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가난한 자들은 머리를 숙이고 길을 걸어가지만, 고상한 체하는 정부 관리들은 삯마차를 타고 그들을 훑어보듯 지나친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있을 것 같지 않은 묘사다. 분명한 건 모네보다도 마네가 더욱 공화국의 이념과 그 가치를 신봉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14-1 La Rue Mosnier aux drapeaux, 1878.jpg
14-2 La Rue Mosnier aux paveurs, 1878.jpg
에두아르 마네, 「삼색기가 걸려있는 모니에 거리」와 「도로 포장 공사를 하는 모니에 거리」, 1878.


마네가 그린 그림은 더군다나 니나 집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장 리슈팽이 쓴 시 「비렁뱅이들의 노래」에 딱 부합하는 그림이었다. 「비렁뱅이들의 노래」는 10년 전부터 그림쟁이들이 드나드는 선술집에서 술만 취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노래 부르는 시이자 샹송이면서 거리에서조차 누구나가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이기도 했다. 마네는 니나 집에 초대받았을 때, 거구의 체격을 한 샤브리에가 피아노 반주에 맞춰 아무 거리낌 없이 큰 목소리로 노래 불러 젖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다 내게로 오시오, 스케이트장의 박수꾼들,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 무도회장 댄서들,
낙오자들, 게으름뱅이들, 부랑자들, 창녀들,
아무 보잘것없는 사내들과 여인들,
막다른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이들,
혈기왕성한 탓에 남의 속박을 싫어하는 족속들이여!
나 역시도 그대들이 사는 나라에 살아가고 있노라.
시인이야말로 거지들의 왕초이니라.



리슈팽이 시로 읊은 내용은 진실에 가까웠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살기가 무척 어려웠다. 피사로와 세잔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림 그리는 일마저 중단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배고픔만 면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림 그리는 일마저 잠시 접고는 닥치는 대로 돈벌이되는 일에 매달렸다.


르누아르는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할 때까지 참고 견디기로 했다. 그건 사실이다. 여러 번에 걸쳐…….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인상파 화가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 이 해에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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