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의 미술전람회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62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카미유 레오폴드 카바예(Camille Léopold Cabaillot)가 묘사한 1879년 미술전람회.



15장-17
(1879-1880)



인상파 화가들은 1879년에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성탄절부터 그들은 자신들만의 조직을 결성하고자 고심했다. 으젠은 아내를 대신했을 뿐 아니라 드가를 돕고 나섰다. 그뿐만 아니라 인상파 화가들은 아주 특별하고도 탄탄한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으젠은 르누아르 말고도 피사로하고도 관계를 이어갔다.


정치적 성향 면에서 귀스타브보다 으젠이 훨씬 더 온건파 쪽에 가까웠던 점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강경파들만의 전람회에서는 베르트 모리스 말고 또 한 명의 여성화가가 등장했다. 마리 카사트(Mary Cassatt)라는 드가와 사귀고 있는 여자였다. 미국인? 맞다. 그녀 역시 인상주의자였다. 어느 모로 보나 가능한 일이었다!


Mary Cassatt, Selfportrait.jpg 마리 카사트(Mary Cassatt), 「자화상(Autoportrait)」, 1878,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점쟁이가 예언한 것이 들어맞기나 하듯 에두아르에게는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베르트와 마주한 가운데 마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모두를 그녀가 대신하여 그림으로 그렸다고 고백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자가 바로 마네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고까지 시인했다.


베르트는 마네가 상심하는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고 여겼다. 또한 늘 죄책감에 젖어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기구하게도 베르트가 자신의 형제와 결혼하면서 마네는 영원히 비참한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베르트가 마네와의 사이에서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모성애적인 본능으로 마네를 대한 적이 결코 없었다.


에두아르는 늘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는 사실을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대표적인 것이 레옹에 관한 일이었다. 수잔과 으젠 역시 단지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레옹을 제대로 보살피고 레옹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회피하고 말았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던 탓도 있었다.


베르트는 ‘인상파 화가들 형제들’ 이름 한가운데 자신의 이름도 낄 수 있기를 은근히 바랐다. 이와는 달리 마네는 인상파 화가 집단에 끼는 걸 거부한 채, 1879년 미술전람회에 두 점의 커다란 크기의 작품을 출품했다. 「선상에서」와 「온실에서」였다.


19-2 Dans la serre, 1879.jpg
19-1 En bateau, 1874.jpg
1879년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관전을 통과한 마네의 「온실에서(Dans la serre)」와 「선상에서(En bateau)」.


두 그림 다 관전을 통과했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전시장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말았다. 두 작품 다 남녀 커플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한 작품은 수중에 지닌 게 없는 가난한 남녀가 오직 정사에 눈이 멀어 대낮 흥겨운 뱃놀이를 즐기는 장면을 다룬 그림인 반면, 다른 한 작품은 호사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간에 어색할 뿐인 부부가 딱딱한 자세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작품에서는 희끄무레한 빛의 세느 강이 배경이 되고 있으나, 다른 한 작품은 싱싱한 열대 식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다. 한쪽이 실제 야외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데 반해, 다른 작품은 야외를 답습한 온실이란 허상의 공간이다!


두 작품은 각자 서로를 비웃는 듯하다. 마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격적으로 미술전람회에 뛰어들려고 서로 심한 대조를 이루는 작품을 출품했을 뿐만 아니라, 인상파 화가들 또한 휘어잡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명하기까지 했다.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 때부터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 또한 늘 따라다닌 탓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을 이끌고 있는 말라르메는 그런 마네를 지지하고 나섰다.


보자르에서 다음과 같은 후렴구가 불은 노래가 불리고 있는 탓이었다.



쿠르베와 마네,
재능을 타고난 이 두 사람은
지긋지긋한 삶 탓으로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네.



학교 전체가 들썩였다. 관학풍으로 실기를 지도받던 학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선 탓이었다. 학생들은 “지나칠 정도로 낡은 수법만을 고수하고 있는” 선생들이 자진 사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수업을 도저히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정식으로 학교에다가 자퇴서까지 제출하고는 학교를 떠난 뒤에도 마네에게 자신들을 지도하기 위한 아틀리에를 개설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하여 단체로 마네를 찾아갔다.


마네가 꾸뛰흐처럼 그들의 미술실기를 지도하는 선생이 된다고? 아! 아쉽게도 마네에게는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럴 열정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마네는 학생들의 그러한 요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볼프가 <피가로 신문>에서 마네를 극찬하고 나선 것이다.


“이 회화예술의 보헤미안이야말로 당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화가다. [···] 그야말로 틀에 박힌 관습을 척결하고자 진부한 것들에 해머질을 가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자신을 따르라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만 같다.”


더군다나 마네는 볼프를 만날 때마다 매번 꼿꼿한 자세로 서서 손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였다.


마네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마네의 머릿속은 그렇듯 온통 그림 그릴 온갖 생각들과 계획들로 꽉 차있었다. 하지만 기력이 달렸다. 신체적으로 원기 왕성한 때는 이미 지나버린 탓이었다. 마지막 남은 힘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마네는 재건축 중인 파리 시청 건물 벽장식을 위한 벽화들을 자신이 제작했으면 한다는 의향서를 파리 시 공공건물 담당 행정관들에게 제출했다. 마네는 파리 배꼽에 해당하는 파리 한 복판에 자리한 시청 건물 벽에다가 파리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풍경을 담은 일련의 그림들을 제작할 것을 꿈꿨다. 만일 그림이 완성된다면 파리 도매시장을 비롯하여 철길, 항구, 지하, 경마장, 정원 등을 묘사하는 건 물론이고 천장에는 도시를 실제로 정비하고 아름답게 개조해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까지 생생히 담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마네는 마냥 답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도 그에게 답을 줄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혀! 마네가 제출한 의향서는 미결상태인 채로 더군다나 서류더미에 쌓여 한쪽에 치워진 채였다. 마네가 의향서에서 밝힌 작품에 대한 구상은 오히려 제르베에게 더 적합하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제르베가 마네보다는 훨씬 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가라는 것이다. 마네는 자신의 야망을 밀어붙일 기력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만일 파리 시가 스캔들의 주인공인 마네를 채택한다면 불명예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씁쓸한 심정에 마네는 이런 정황을 친구인 프루스트에게 털어놓았다. 그만이 자신을 중재해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나날이 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해져 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친구를 위한 아무런 행동에도 나서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프루스트는 마네에 대한 신뢰가 한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인들에게 이를 알리는 일에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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