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지 않을 작품들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64화

by 오래된 타자기



15장-19
(1879-1880)



팔리지 않은 작품들을 계속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었다. 아틀리에를 찾은 방문객들은 그렇듯 모두가 한결같이 마네의 작품을 외면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걸작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욕구가 점점 비등해져만 갔다.


고통스러운 것도 이젠 신물이 날 만큼 지겨웠다. 마네는 레옹더러 한쪽에 칸막이를 쳐서 방을 하나 만든 뒤에 팔리지 않은 작품들을 눈에 띄지 않게 그곳에 집어넣도록 시켰다.


외국 언론은 마네에 대한 아주 고무적인 평마저 쏟아놓았다. “당신은 그처럼 명성이 높습니다. 영국은 오직 당신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미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마네는 중얼거렸다.


1879년 미술전람회는 전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마네를 도편 추방하듯 배척하는 짓은 이젠 끝났다는 것인가? 그가 더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기존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심사위원회나 저널에서조차 마네를 더 이상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는 일은 없었다. 마네와 아주 친밀하게 지내는 방빌이 새삼 마네에 대한 혹자의 평을 상기시켰다. “마네가 혁명 당원이었을 적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흡혈귀이면서 유혈 투쟁에 앞장서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르누아르가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자 볼프가 주책맞게 앞에 나서서 아주 대단한 작품이라고 호평하고 나섰다! 「온실에서」와 「선상에서」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 전시되자 이를 본 관람객들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빅토린느 뫼랑인 줄 알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런 동일시가 통속적인 면에서는 아주 즐겁고 유쾌한 일이기까지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 두 작품에 대해서 중간 정도의 수준이라고 평점을 매겼다.


19-2 Dans la serre, 1879.jpg
19-1 En bateau, 1874.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온실에서(La serre)」와 「선상에서(En bateau)」.


폴 알렉시스가 마네에 관한 기사를 기고했다. “외설스러운 그림이나 그리는 저질스럽고도 추잡한 환쟁이가 따로 없다. 마네 뒤를 이어 모든 그림쟁이들이 마네를 따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네는 그들의 수장 격이다.” 더군다나 말라르메는 마네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마네야말로 파리에서 여인네들에게 수작을 거는 방법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남자라고 서슴없이 지껄여대기까지 했다.


스테방의 작품들이나 꺄바넬의 작품이 팔리는 가격에 비하면, 포레가 마네의 「온실에서」를 구매하며 지불한 4천 프랑은 터무니없는 헐값에 불과했다. 마네는 미술전람회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더하여 국가가 마네의 작품을 구매한다는 것 역시 요원한 일이기만 했다. 예를 들어 「맛 좋은 맥주 한 조끼」 같은 작품을 구매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러한 의문 또한 오래가지 않아 금방 판명되었다. 국가가 발상을 전환하여 마네의 작품을 사들일 계획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1873, Le Bon Bock.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맛 좋은 맥주 한 조끼(Le Bon Bock)」, 1873.


그 해 여름 절정을 향해 불타오르던 때, 에밀 졸라의 기사가 실린 <르 피가로> 신문이 마네를 뭉개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모두에게 약속한 바 있는 예술가는 선구자적인 면모에 걸맞은 모든 기대를 저버렸다. [···] 그에게서 우리가 고대하는 바를 구현해 줄 것이라 기대하기에는 이제 그는 너무 녹초가 된 상태다. 아마도 그가 바라는 바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다.”


이튿날 같은 신문에 두 사람 간에 불화가 생겼다는 놀랄만한 기사가 실렸다. 알고 보니 졸라가 너무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 설명하려다 보니 실수가 생긴 것이다. 그는 러시아어로 진행된 인터뷰가 번역상 잘못을 저질렀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모네와 마네를 혼돈한 것이 틀림없다.”


모네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천만에, 모네는 천성적으로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그와 같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 철저히 맞대응하는 경우였다. 마네 때문에 행운을 잡았다는 평가가 모네에게는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본 대로 그리지 않는다. 손과 눈이 다르다. 아직도 열정만 가득한 풋내기 같다. […] 그는 어림치기로 행동한다.”


졸라가 자신의 친구인 마네에 대해 한 말이다. 일부러 엉터리로 번역한 탓에 마네를 모네로 믿게 만들려는 수작 아니면 이름을 잘못 표기했다고 할 판이다. 마네는 확고한 어조로 졸라에게 말하기를 내일 당장 <피가로> 신문의 같은 지면에 이를 해명하는 기사를 게재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졸라가 처음 인생을 시작할 때, 마네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좀 성공했다 싶으니까 말 그대로 기어오르려는 판이다. 심지어는 마네를 둘러싼 스캔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발상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스캔들은 마네로 하여금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결정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된 건 물론, 마네가 예술적으로 나쁜 취향을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생각과 함께 마네를 비판하는 기사가 봇물처럼 쏟아지자 졸라는 마네를 내던져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졸라는 러시아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가운데 그처럼 마네를 전혀 개의치 않은 상태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졸라의 말들이 프랑스에까지 전해져 마네에게 불쾌감을 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졸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짓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인상파 화가들과 자연주의 화가들을 한데 싸잡아서 코뮤나르드들의 떼거리라고 일컫는 실수까지 저지른 것이다. 어쨌든 간에 졸라가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듯 지칭한 용어야말로 아주 불쾌하게 여길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다!


이에 분격할 필요조차 없다 생각한 마네는 졸라와 불화에 이를 일은 스스로 벌일 마음이 없었다. 자연주의 예술가로서의 예술적 한계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군단을 이끌고 있는 수장이란 점에서 마네의 명성은 자신의 본래 취향대로 맘대로 할 수 있도록 모든 걸 용인해 주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프티 부르주아적인 지독할 정도로 추악한 취향이 문제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네는 졸라가 처음 자신을 지지해 주고 옹호해 줄 때의 그 고마웠던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네가 졸라가 자신의 변함없는 친구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은 졸라가 <피가로>에 세 번씩이나 연달아 실은 기사 때문이었다!


마네는 난생처음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네 번째 전시회에 자신이 참가하지 않기로 한 것이 판단착오였음을 후회했다.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반신반의한 가운데 4월 10일부터 5월 11일까지 오페라 가 28번지에서 개최된 전시회에 자그마치 15,400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쇄도했다!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한 성공이었다. 특히나 같은 시기에 개최된 미술전람회에 르누아르는 당당히 입성하기까지 했다.


Catalogue de Mary Cassatt.jpg
Catalogue de la 4eme Exposition de la Peinture impressionniste.jpg
제4회 인상파 전시회 카달로그와 이때 출품된 미국인 출신의 인상파 여류화가인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의 「진주목걸이를 한 리디아」.


마네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형제와도 같은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서만큼은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늘 고수해 오던 터였다. 요컨대 마네는 자신이 작업하는 방향은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늘 심중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쪽에 마네가 있었다면, 다른 한쪽에는 푸르니에가 있었다. 아주 엄격한 잣대에 의한 가혹하리만큼 준엄한 자기 방식이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건 마치 자신들의 작품만이 모든 예술작품의 본보기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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