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68화
[대문 사진] 마네의 벨비유 병원 그림을 벽지(Wallpaper)로 제작한 모습.
15장-23
(1879-1880)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벨비유 요양소에서 쓸쓸히 치료를 받던 마네는 서한을 통하여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상황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에게 찬란한 성좌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 사방으로 전했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마네의 수다쟁이 버릇은 지겨울 때까지 종이쪽지로 된 사연들을 짧은 편지로라도 주고받아야 만이 직성에 풀렸다.
전신지에 적혀있는 이야기들은 그처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듯이 생생하게 서로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색다른 방법이었다. 이 활기에 넘치는 방법만이 마네가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연히 수잔이 마네의 곁을 지키고 앉아 간호했다. 레옹은 주말마다 편지꾸러미와 함께 마네가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챙겨 갖고 왔다.
하지만 마네에게 절실한 건 삶 자체였다.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과 서로 교제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서 뜻밖의 기쁨을 맛보는 삶을 그는 갈구하고 있었다. 광기와 향락에 물들고 사람들로 들끓으면서 수상쩍기까지 한 삶을 마네는 여전히 꿈꾸고 있었던 셈이다.
마네는 자신이 활짝 피운 꽃들에게, 열매들에게, 가지들에게, 희망의 눈짓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마네는 자신이 끔찍하게도 사회에 구속되었다고만 생각했다. 신선한 공기를 흡입할 환경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기도 했다. 캔버스 대신 종이를 사용하면서 물에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려가면서 수채화가 자신의 예술의 참된 근원임을 깨달았다.
건강이 좀 호전되자 이제 더 이상 나태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마네는 붓을 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하는 시간이 느는 만큼 카페에서 있는 시간도 늘어만 갔다. 사람들을 만나고 공연을 즐기고. 파리! 그가 사랑한 도시는 자신에겐 절대적인 존재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애착을 느끼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도시야말로 마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마네는 두 번째로 「반신 자화상」을 완성했다. 하지만 전혀 마음에 와닿는 구석이 없었다. 전문가다운 노련한 눈매에 요모조모 살피는 듯한 눈초리를 지닌 용모이기는 하지만, 병색이 완연히 짙을 뿐이다. 얼굴도 상당히 수척해졌으며, 어딘지 모르게 표정마저 어색해 보인다.
이미 완성한 「원조 라뛰유」를 개작하려고 여름 내내 매달렸다. 좀 더 ‘획기적인 장면’을 다루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화폭은 햇살 가득한 순간을 담은 탓에 밝은 톤으로 흘러넘친다. 야외에서 그린 그림 치고는 서둘러 미술전람회 출품용으로 작심하고 그린 거창한 작품이다. 이 그림만큼은 「아흐장퇴유」를 뛰어넘기를 바라는 뜻에서 제작한 것이지만, 병이 도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서둘러 완성한 그림이다.
마네의 기력이 급격히 쇠잔해진 첫 번째 징후로 나타난 것은 그림 속 남녀의 표정이 서로 살갑게 느껴질 정도로 다정한 표정으로 급선회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파스텔 톤으로. 마네는 늘 완성에 뜸을 들였다. 마네의 건강이 나아졌다는 게 괴상적인 일이기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77번지로 이사하고부터 마네의 아틀리에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사람들이 다시 바글거리면서 문전성시를 이뤘다.
다시 한번 마네는 아틀리에에 변화를 주었다.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보다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환대한다는 식으로 거창할 뿐만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일까지 벌인 것이다. 마네가 대중 앞에 스코틀랜드 식 치마차림으로 등장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다시 본모습을 되찾은 모양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말라르메는 마네가 무엇을 판별할 수 없으리만치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프랭은 마네의 그 같은 모습에 충격까지 받았다. “그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했다. 정신적으로, 특히, 하지만, 야릇한 일은, 여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아무 여자나 상관없이, 그를 제정신 들게 하려면 반드시 여자가 필요해 보였다.”
유행을 좇는 마네가 마침내 첨단 유행을 좇기 시작했다. 그가 꿈꾸던 바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 그가 기대했던 바와 같이 유행을 좇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확실한 건 다시 예술 애호가들이 제일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메리는 마네 예술의 가장 훌륭한 홍보대사였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지내는 돈 많은 부자들에게 현대 예술에 눈 떠보라는 식으로 마네의 아틀리에를 한 번 찾아보도록 주선했다. 그래서 이때 만난 사람이 샤를 에프뤼씨였다.
샤를 에프뤼씨는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전력이 있었던 터라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집착이 어느 누구보다 강했던 탓으로 사물과 함께 하는 고요한 삶의 정적을 표현한 마네의 정물화를 보고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당장에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묶음 한 다발」을 사겠노라 주문했다. 마네가 사시사철 먹는 아스파라거스를 언젠가는 한 번 제대로 그려봐야겠다고 오랫동안 고심해 오던 것을 마침내 실천으로 옮긴 그림이다.
마네는 그림 가격으로 800프랑을 제시했다. 은행가는 마네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잔돈은 필요 없다는 식이었다. 마네는 자신이 생각한 가격보다 훨씬 높게 그림 값을 부르는 법이 없었다. 느닷없이 큰돈을 쥔 마네는 후다닥 아스파라거스 또 한 점을 다시 완성했다. 오직 아스파라거스 하나만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는 그처럼 아스파라거스 하나만 달랑 묘사되었다.
그림을 에프뤼씨에게 건네면서 마네는 이야기했다. “당신이 들고 있는 아스파라거스 묶음 한 다발에 마침 아스파라거스 1개가 빠져있었던 까닭에 내 여기 그걸 다시 그린 겁니다.” 참으로 기발하고 예의 바른 유머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뜻이 없었다. 친구들 역시 마네의 그런 기발하고 예의 바른 유머를 즐겼다. 자신들에게는 그런 유머 감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틀리에를 수시로 드나드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던 프루스트는 사람들이 이 걸출한 아티스트에 대해 해쓱하고도 실쭉한 반응만 보이는 걸 개탄하고 나섰다. 왜냐면 마네가 툭 던지는 농담조차도 그만의 삶을 관통하는 뭔가 대단한 의미가 내포된 이유에서였다. 예의 바르고 자상하리만치 친절했던 마네의 태도조차도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할 따름이었다. 마네는 이를 한탄했다. 언제나 농담하고 허풍 떠는 버릇은 여전했다. 이게 프루스트를 못 견디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미 젊은 시절 꾸뛰흐 화실을 드나들 때부터 마네로서는 어떻게 자제시킬 수가 없었던 그만이 지닌 버릇이었다. 프루스트는 날이 갈수록 대단한 인물이 되어갔다.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는 이미 무시 못할 존재가 되어있었다. 프루스트는 점점 권력마저 더해갔으며 그러한 사실 또한 명백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뭐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마저 지녔다. 그것도 매 순간마다.
프루스트는 권력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젠 거드름을 피우며 으스대기까지 했다. 그가 하는 짓은 라 퐁텐의 우화에 나오는 저 유명한 개구리 형상이었다. 권력까지 쥔 프루스트는 마네나 드가에게는 더 없는 기쁨을 주는 존재였지만, 프루스트에게 있어서 두 사람은 아주 공허한 장식물 같은 필요이상으로 성가실 뿐인 존재이기만 했다.
프루스트가 자신과 함께 활동을 하는 정치인들에게 마네를 눈인사시켜 준 것도 알고 보면, 자신의 캐리어를 늘려가기 위한 수단으로 능력을 과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에는 로슈포흐를 연신 대단한 인물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듯이 말이다.
프루스트가 옳았다. 마네는 너무 나댔으며, 지칠 줄 모르고 농담하길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누가 있건 없건 빈정대길 좋아했고, 추잡스러우면서도 파렴치하기까지 했다. 실제 마네에게서 진지한 구석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마네더러 인생을 즐길 것인지 아니면 성공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할지라도 마네는 늘 경박하게 처신했을 것이다. 마네의 점잖은 태도마저도 그의 추잡하고도 외설스러운 관능에 탐닉하는 태도를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마네의 그러한 태도가 프루스트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힌 꼴이다.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떠난 오페라 여가수 에밀리 앙브르가 다시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미국에서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언의 처형」을 팔지 못하고 도로 갖고 돌아온 것이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게 그녀가 출연한 공연이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마네의 작품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네의 그림이 팔리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로서는 마네란 인물을 전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마네란 이름만 알고 있는 미국인들에게는 마네의 작품들이 빚은 스캔들에 의한 소동조차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마네의 작품들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현격히 바꿀 수 있는 여지는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마네는 세심하고도 꼼꼼하게 작품들을 크기에 따라 제자리에 다시 정돈했다. 그림들로 빽빽이 들어찬 창고 같은 고미다락방은 채색된 마네의 삶이 물씬 풍겨 나오는 장소로 변했다. 신대륙으로 출장을 떠났다가 아틀리에로 되돌아온 「막시밀리언의 처형」 또한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 모든 작품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여인네 앞에서 조금도 옹색할 필요가 없는 아티스트는 모든 걸 기분 좋게 여겼다. 「막시밀리언의 처형」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 「아흐장퇴유」 사이에서 제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자! 「아흐장퇴유」가 여기 있으니 가져가시오. 만일 그 작품을 다음 미술전람회에 출품한다면 사람들은 마치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떠들어댈 것이 분명하잖겠소?”
가련한 에밀리는 차마 그러질 못했다. 그녀는 웃기만 했다. 그리고 마네 앞에서 포즈를 취할 것도 약속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네가 죽음의 고비를 벗어나고자 오직 인물화를 그리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까닭에서였다.
[1] 「벨비유 정원 풀밭에 앉아있는 아가씨(Une Fille dans le jardin à Bellevue)」란 제목이 붙었다.
[2] 마네는 계속 인물화에 매달렸다. 맨 왼쪽의 그림은 ‘원조 라뛰유(Chez le Père Lathuille)’의 창업자 아들 부인인 「마르그리트 고티에 라뛰유(Marguerite Gauthier-Lathuille)」(1878)를 그린 인물화이고, 두 번째 그림은 「주름진 옷을 입은 여인(La Femme en robe à rayures)」(1877-1880)이란 제목이 붙은 인물화이며, 세 번째 그림은 엘렌 앙드레(Ellen André)의 모습을 담은 「젊은 여인의 초상(Tête de jeune femme)」(1878)이고, 마지막 작품인 맨 오른쪽에 있는 그림은 「꽁스탕탱 기(Constantin Guys)」(1879)를 그린 인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