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쿠르에서의 열외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76화

by 오래된 타자기



16장-8
(1880-1881-1882)



놀라운 소식도 있었다. 1881년부터 예술가들 스스로가 처음으로 관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미술전람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예전에 베르트 모리소에게 연정을 품었던 쥘 페리가 문학·예술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마침내 예술가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열망해 오던 숙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미술전람회가 예술가들에게 온전히 돌려지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네가 자신의 온 생애에 걸쳐 어떡해서든지 관전 티켓을 거머쥐고자 발버둥 쳤던 미술전람회가 갑자기 관제화된 기구로서의 위상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단 한 번만 인정받으면 족했다. 국가가 예술가들에게 그와 같은 규정을 시행하기에 이르자 자연 젊은 층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관전에 대거 몰려들면서 가능한 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 마네가 이를 위해 투쟁한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뜻으로 마네란 이름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를 것을 모의하기까지 했다.


마네를 따르는 화가들은 마네를 자신들의 선구자이면서 지도자로 간주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네에게 관전의 수상메달을 수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그들에 의한, 그들만의, 그들을 위한 미술전람회로 바뀌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직 그들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나 규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심하면서 남의 눈치나 살피던 그들은 단지 2등에 해당하는 수상메달을 마네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는데 그쳤다.


1861년 처음 관전에 입상한 뒤로 20년이 흘렀건만 마네에게 2등이란 상은 너무나도 빈약하면서 초라한 것일 따름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그 이상으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뿐더러 그와 같은 제안마저도 매정하게 거부당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마네란 이름은 아직도 여전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마네의 이름만 들어도 어떤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네는 그걸 즐기고 있었다. 이 희희 자적하는 광기에도 불구하고 마네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지면서 지긋지긋하고도 무시무시한 격렬한 반응마저 터져 나왔다.


보수주의자들 역시 비난을 쏟아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콩쿠르에서 열외 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 상을 받았음은 물론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관계로 콩쿠르 같은 데에는 더 이상 참가할 필요조차 없게 된 탓이다. 게다가 매 미술전람회 때마다 어느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나 부탁을 할 필요조차 없이 당당히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자격마저 주어졌다!


죽는 날까지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자 드디어 마네는 콩쿠르를 통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심사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완전히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그토록 매번 작품이 거부당할 때마다 그에 대해 항의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이나 된다는 듯이 온전히 해방감을 만끽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마네가 「로슈포흐(Rochefort)」를 그린 그림은 일종의 정치적 도발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것도 재능이 뛰어난 탓에 어떤 주제든지 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화가가 제작한 정치성 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마네에게 수상 메달을 걸어주지 않으면 그 메달을 누구에게 걸어줄 참인가!


1881, L'Évasion de Rochefort.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로슈포흐의 탈주(L'Évasion de Rochefort)」, 1881.


역시 마네가 사자 사냥꾼을 그린 「페흐튀세(Pertuiset)」는 어릿광대를 다룬 익살맞은 작품에 해당한다. 뒤죽박죽 된 세상을 거꾸로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마네 회화의 본질이 아닌가.


1881, Pertuiset, le chasseur de lions.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사자 사냥꾼 페흐튀세(Pertuiset, le chasseur de lions)」, 1881.


더군다나 마네는 꺄바넬이, 한때 「비너스의 탄생」을 그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주관한 미술전람회에서 대상을 거머쥔 꺄바넬이 직접 스스로 나서서 동료들과는 다르게 관학풍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진 성향을 보이던 보수주의자들인 화가들 면전에서 “프랑스를 통틀어 마네처럼 그림 그릴 줄 아는 화가는 단지 4명밖에 없다.”라는 칭찬을 늘어놓을 만큼 감동적으로 화가로서의 실로 영광스러운 명예마저 되찾기에 이르렀다.


마네에게 수상 메달을 수여해야 한다는 쪽에 찬성표를 던진 심사위원은 17명에 이르렀다. 17명이나 마네에게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이제부터는 콩쿠르에서 경합을 벌일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마네의 나이 49살이었다. 이를 어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요컨대 마네에겐 더 이상 수상 메달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았다. 마네의 나이가 20살이라면 몰라도. 49살의 나이에 수상 메달을 목에 건다는 건 한마디로 그를 조롱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네는 기쁨과 함께 쓰라린 고초를 겪을 때의 씁쓸함만 맛보았다.


드가는 그런 마네에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나는 자네가 지금 이런 특별 대우를 받는 것조차 자네를 위해선 한없이 부족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네.”


“전혀 그렇지가 않아. 그건 자네의 생각일 뿐이야. 난 그 모든 것을 바란 것이 사실이야. 항상 그렇게 되기를 열망해 왔다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마네는 더군다나 자신에게 찬성표를 던진 17명 심사위원 각자에게 선뜻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었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보라색 색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