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인상파 전시회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79화

by 오래된 타자기



17장-3
(1882)



마네가 다른 화가들을 비롯하여 말라르메와 나눈 대화를 보면, 주로 양품점이나 상상을 초월한 음식에 관해서거나 아니면, 미술품, 유화, 시 등을 제작하는 일에 관한 것이 태반이었다. 물론 이를 실제에 적용하고자 한 생각 또한 전혀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마네가 즐겨 나누고 싶어 한 이야기들은 그처럼 여인네들이 마네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나누면서 주로 화제로 삼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네는 끽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고상한 사내들과는 결코 어울리는 일 없이 늘 이리저리 시궁창 속을 휘젓고 다녔다. 여자의 치맛자락이나 붙들고 살 팔자였기에 대단한 난봉꾼 기질이 다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시슬레가 그런 마네의 취향을 거들고 나섰다.


암스테르담 거리 77번지 아틀리에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 딱 어울릴 정도로 여자들만이 아니라 남자들마저 착용하는 근사한 모자들의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그럴듯하게 잘 차려입은 사내들과 여인네들이 남보란 듯이 기상천외한 옷차림을 걸치고 이를 과시하면서 좌중 앞에 나타나는 바람에 아틀리에서는 연일 깜짝쇼가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파리 암스테르담 거리 77번지 아틀리에에서는 화류계의 여왕들과 몇몇 개인 소장가들의 아내들 사이에서 매일 밤 누가 가장 우아한지를 놓고 겨루는 경연대회마저 펼쳐졌다.


마네는 장난 삼아하는 연애에 스스로 깊이 빠져듦에 따라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언동 또한 늘어만 갔다. 심지어 점점 더 젊은 여성들과의 장난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매번 여성들과의 연애가 진심에 의한 것이기를 스스로 믿고자 애썼다.


하지만 점점 도져 가는 병을 무슨 수로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인가? 늘 걷는데 고역을 치를 뿐 아니라 그놈의 염병할 관절염 때문에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통증 역시 계속될 뿐이었다!


드가는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전시회를 다시 개최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계속 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확실하게 재능을 갖춘 화가들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인상파 화가들인 새로이 가입한 신입회원들을 대동하고 아틀리에에 나타나서는 그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자고 마네에게 애원에 가까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드가의 눈에는 마네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신뢰하는 것처럼 비친 까닭에서였다.


드가가 이야기한 전시회는 여섯 번째 독립작가 전시회였다. 전시회 구성을 이미 마친 거나 다름없었다. 지난해에는 그룹전이 난처한 지경에 처한 바 있었다. 결국 많은 작가들이 불참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베르트는 마치 갓난애가 보채는 심정이었고 그나마 르누아르와 시슬레, 세잔은 미술전람회에 참가한다는 이유로 그룹전에서는 빠져버렸다.


드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계속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가 중도에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상파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풍의 그림을 그리는 신참자들을 어느 누구 한 사람 가까이하려 하지 않으려 한 것처럼 마네의 작업 또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일까?


게다가 마네와 드가, 이 두 사람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달아갔다. 마네는 드가와의 갈등을 지속하고 싶은 심정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까유보트가 드가를 가리켜 “우리들 모임을 완전히 망쳐놓고 있다”라고 개탄할 정도로 드가는 고갱과 같은 화가들까지 끌어들이고자 고심했다. 고갱과 같은 부류의 화가들은 그야말로 인상파 화가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경향을 보여주는 화가들이었다.


Paul Gauguin, L'Eglise de Vaugirard(Une nuit à Vaugirard), 1879.jpg
Paul Gauguin, Étude de nu.jpg
Paul Gauguin, Houses at Vaugirard (Le Terrain de ma propriétaire).jpg
Paul Gauguin, La Chanteuse, 1880, Ny Carlsberg Glyptotek, Copenhagen.JPG 처음으로 인상파 전시회에 발을 디민 폴 고갱이 출품한 회화 작품 「보지라의 밤」, 「누드 습작」, 「내 지주의 땅」과 조각 작품인 「가수」. [1]


하지만 드가는 그뿐만이 아니라 인상파 전시회란 말 자체를 거부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드가가 사용하고자 한 용어는 ‘독립작가들(Indépendants)’이었고, 그보다도 ‘강경파들(Intransigeants)’이란 말을 더 선호했다.


까유보트가 돈을 들여 제작한 포스터에 참가자들의 명단을 인쇄해 넣으면서 그때까지도 유보적 태도를 보이던 마네마저 끼워 넣기로 작정한 것은 말 그대로 단짝인 마네를 어떡해서든지 그룹 전시회에 끌어넣기 위한 술책이었다. 드가의 눈에 비친 마네는 넉넉했던 관계로 어떡해서든지 돈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많은 화가들이 곤경에 처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품을 팔아야만 할 처지였다.


드가는 이 같은 방법이야말로 아주 통속적일 뿐만 아니라 미친 짓이라고 판단했지만, 눈에 띄게 두드러져 표적이 될 만한 여성들 이름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인상파 화가들이 세운 협동조합 출자자들의 긴급한 현안문제를 타개하는 식으로 결정을 보았다. 결론은 항상 그와 같았다! 요컨대 수치스럽고도 불명예스럽게 떠벌리는 광고나 홍보 탓에 애꿎은 여인네들만 희생당하기 일쑤였다!


Edgar Degas, 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l'une des œuvres exposées dans la 6eme exposition des impressionnistes.jpg 여섯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서 주목을 받은 에드가 드가의 「14살 된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1] 여섯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 폴 고갱이 출품한 회화 작품 중 「보지라의 밤(Une nuit à Vaugirard)」은 네덜란드의 Grunneger Museum에 「보지라 성당(L'Église de Vaugirard)」이란 제목으로 전시되고 있고, 「누드 습작(Étude de nu)」은 덴마크의 코펜하겐 칼스버그 뮤지엄에 전시되고 있으며, 「내 지주의 땅(Le Terrain de ma propriétaire)」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지만 「보지라의 집들(Maisons à Vaugirard)」이란 제목으로 이스라엘 뮤지엄에서 전시된 바 있고, 조각 작품인 「가수(La Chanteuse)」는 현재 덴마크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뮤지엄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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