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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v Aug 29. 2023

시필 하시겠어요?

만년필의 세계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모임의 장소는 남부터미널역 근처에 위치한 '베스트팬' 커뮤니티룸이었다. 손글씨로 꾹꾹 눌러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노트에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스무 명 남짓. 처음 만난 우리는 기록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서부터, 기록을 하는 자기만의 루틴, 기록의 종류, 기록할 때 주로 쓰는 문구, 고민되는 지점까지 기록과 맞닿아 있는 여러 테마들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다. 한 번도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날로그 기록'이라는 공감대가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었고, 어색했던 미소들은 금세 편안하게 바뀌었다. 모임의 이름은 '아날로그 살롱'. 3시간여 진행된 아날로그 살롱이 마무리되고, 자연스러운 동선에 따라 커뮤니티룸 건너편에 자리한 베스트팬 매장을 둘러보러 갔다. 나는 연필이나 펜 등을 파는 문구 팬시점이겠거니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제법 고급진 매장의 문을 열었다. 


"시필용지 필요하세요?"


"아;; 시필이요?"


나는 난생처음 듣는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되묻고 말았다. 매장을 방문하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레 질문을 던져왔던 매장의 매니저분은 나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곳은 바로 만년필을 전문으로 판매하며, 여러 만년필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성격을 손으로 직접 느껴보는 곳, 시필하는 매장이었다. 매장의 문이 고급진 것도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나는 만년필과 어울릴만한 차콜그레이 톤과 우드톤으로 꾸며진 매장에서 처음 만난 만년필 시필 용지를 들고는 어색한 미소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매장의 벽면에는 만년필 잉크가 켜켜이 진열되어 있었고, 또 한쪽 벽면에는 만년필과 어울릴만한 고급진 문구(노트, 필통)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보석상점에서나 보던 유리박스 안에 가성비 좋은 만년필부터, 여러 색상의 만년필, 브랜드별 만년필 그리고 값비싼 만년필까지 각양각색의 만년필들이 있었다. 만년필로 이루어진 특별한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내가 매장 저쪽에는 어떤 만년필들이 있을까 고개를 돌렸을 때, 만년필 시필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시필하는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은 한 글자씩 천천히 써 내려가면서 마치 만년필과 대화를 하는 것만 같았다. 만년필이 주는 감촉, 만년필이 용지와 닿았을 때의 느낌, 펜촉의 길이에 따라서 느껴지는 차이를 오롯이 느끼는 듯했다. 진지하게 시필을 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던 나를 이내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만년필과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그 공간을 진지하게 누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걸 존중하는 마음과 함께 나도 그들처럼 희열을 느껴보고 싶었다. 


예전에 어느 문화심리학 교수님이 [남자의 물건]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남자에게는 물건이 필요하다." 물건이란 자기를 쉬게 해주는 그 무엇으로,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 수 있는 곳, 모든 페르소나를 벗을 수 있는 곳이라 해석이 된다. 베스트팬 매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그 '공간'에서 쉼을 누렸다.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그 물건과 끊임없이 소통했고, 사회적 가면을 벗고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그 공간에 있었다. 자기만의 '물건'을 가진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멋져 보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두 만년필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민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또 어떤 이는 자기 물건을 더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각인서비스를 주문했다. 나는 '만년필을 처음 만나 새로운 사람'으로 그곳에 조금 더 있다가, 그들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은 채 매장을 나왔다. 나를 쉬게 해주는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떠올리면서.


'글쓰기'

'기록'

'그림책'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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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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