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아이 '세혀니'
어학원에 세현이라는 아이가 있다. 늘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간식을 입에 물고 오는 녀석이다. 에너지가 어찌나 넘치는지 계단으로 교실에 올라갈 때도 그냥 올라가는 법이 없이 시끌벅적하게 올라가는 아이다. 목은 늘 쉬어 있어서, 얼마나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서 장난을 치다가 그렇게 목이 쉬게 된 건지 궁금해지는 녀석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중국어 수업을 듣던 세현이를 데리고 중국어 선생님이 행정실로 찾아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세현이가 울음이 터져 있었다. 선생님을 교실로 돌려보내고 왜 우는지 세현이의 쉰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이런 거였다.
"아빠가 보고 싶어.. 요.."
"세현이 아빠가 보고 싶어서 갑자기 울음이 났어요?"
"흐아앙..."
아빠가 보고 싶다며 세현이가 울음이 터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마디 말로는 우는 아이를 진정시키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세현이를 데리고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바깥바람을 쐬면 조금 마음이 나아질 것 같은 기대감이었다.
"세현이 아빠는 운동 잘하세요? 힘도 엄청 세시겠다~!"
"맞아요."
"그런데 세현이가 아빠보다는 유도를 더 잘하겠네요? 세현이는 유도를 배우는데 아빠는 안 배우잖아요!"
"맞아요! 제가 아빠 넘어뜨리고 그래요! 그런데 아빠가 보고 싶어요."
세현이가 좋아하는 아빠 이야기를 좀 하면 오히려 힘이 날까 했는데 실패했고, 이번엔 다른 질문들을 좀 던져봤다.
"세현아. 세현이 집 휴먼시아 1단지예요?"
"네."
"자, 봐바~여기 옥상에서 세현이네 집이 보인다? 저기 숫자 보이지? 저게 세현이네 아파트예요. 그리고 이쪽으로 와볼래요? 저~기 보이는 건물을 주민센터고, 또 저기 저 커다란 건물은 큰 카페예요. 세현이 저기 가봤어요?"
"아직 안 가봤어요. 그런데 아빠가 보고 싶어요.."
내가 묻는 질문들에는 곧잘 답을 하면서도 다시 울음이 시작되어 버렸고,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떤 말로도 잘 달래 지지 않았다. 세현이는 아직 8살 어린아이였다. 세현이 말로는 아빠가 밤 10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면 밤에는 아빠를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아침에는 아빠가 출근하기 전에 아주 잠깐동안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수요일 오후에는 잠깐 아빠랑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아! 수요일 오후에는 어학원 수업도 없으니까 아빠랑 많이 시간 보낼 수 있겠네요?"
"네."
"오늘만 지나면 수요일이니까 조금만 힘내볼까요?"
"그래도 지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세현이 아빠는 토요일에도 어쩌다 출근을 한다고 했다. 세현이가 토요일에 축구학원을 끝내고 오면 아빠가 없을 때가 있었다고. 세현이는 태권도 학원도 다니고 유도학원도 다니며, 토요일에는 축구학원도 다닌다고 했다. 8살 어린아이가 소화히기에는 벅찬 학원일정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그렇게라도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은 아빠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일단 지금 아이에게 올라온 감정을 해결해줘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빠 목소리를 잠깐 들려주면 아이의 마음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일하고 계실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연결해 줬다. 세현이는 아빠하고 짧은 통화를 했다. 아빠 말에 그냥 대답만 했다. 아마도 아빠도 세현이가 보고 싶다고, 오늘은 밤에 꼭 보자는 말을 했겠지. 세현이에게서 전화를 돌려받았는데, 세현이 아빠 카톡 프로필이 눈에 띄었다. 하나씩 돌려보니 온통 세현이 사진들이었다. 세현이가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같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아빠하고 세현이가 함께 쌓은 이야기들이 사진에 담겨있는 듯했다. 아이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 아빠가 보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먼 일터에서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카톡 프로필에 있는 사진들을 보며 달래 보는 세현이 아빠가 그려졌다. 세현이는 밤에 잘 때 도우미 선생님이 재워주신다고 했다.
울음이 터졌던 그날 밤에는 세현이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를 만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가 잠에 못 이겨 잠들어버리고 말았을까? 만일 세현이가 잠들기 전에 아빠가 왔다면 환하게 웃으며 반겼을 세현이 얼굴이 그려졌고, 그게 아니라면 세현이 아빠가 일을 마치고 와서 가만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지그시 바라볼 것 같았다. 나는 아빠를 보고파하는 아이를 두고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에 비서실에서 근무했었던 적이 있었다. 수행비서의 특성상 내가 모시는 대표의 일정이 시작되면 내 업무도 시작이었고, 그날 짜여있는 스케줄이 모두 끝나야만이 나도 퇴근할 수가 있었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갈 수 있으려나 하는 헛된 기대감은 늘 미안함으로 바뀌는 게 일상이었다. 그날의 업무를 마치고 아주 늦은 밤이 되어 집으로 들어가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창 바라보고 있으면 아이와 놀아주지 못해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주말에도 대표의 일정이 있으면 출근해야 했으니, 아이를 향한 한편의 미안함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도 국내수행 업무는 잠든 아이의 얼굴이라도 볼 수가 있었는데, 해외출장이 잡히게 되면 참 어려웠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만한 일정을 소화하고, 대표를 모시는 수행비서가 아니라면 못 가볼 곳들을 가고 경험했지만 마음 한쪽 구석이 공허한 것은 채워지지 않았다.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아이에게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 사이 어디쯤에서 참 많이 고민했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아니 아빠들은 고민을 뒤로하고 다시 공식스케줄을 확인하고 그날의 목적지와 만날 사람, 필요물품 등을 체크하며 주어진 업무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와의 시간을 대신해 보내고 있는 그때를 허투루 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세현이가 그날 아빠를 미처 보지 못했더라도 세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현이 아빠는 아마도 세현이와의 시간을 대신해 보냈을 그 시간을 허투로 보내지 않았을 거니까. 아빠이기 때문에 다른 한편의 세현이를 위한 시간으로 보냈을 거니까. 그러므로 모든 아빠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