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지는 장면들이 몇 있다. 오래전, 여수로 여행을 갔었다.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쉴 겸해서 널찍한 광장이 있는 과학공원이란 곳에 들어갔다. 서늘한 바람과 햇살이 좋았던 날, 사람들이 듬성듬성 광장 아름드리 계단에 앉아 있었다. 광장 한쪽 귀퉁이에는 그날 풍선쇼가 펼쳐질 예정이라는 문구가 적힌 자그마한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이 모이지 않아도 저 풍선쇼가 진행이 되는 건지 궁금하던 차에 약속된 시간이 되자, 배불뚝이 복장의 삐에로가 풍선을 한 아름 안고 등장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만의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삐에로는 갖가지 신기한 모양의 풍선을 만들어 보였고, 풍선을 가지고 재미난 상황을 연출해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또 그는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자기 앞으로 초대하고서 여러 모양의 풍선들을 선물했고, 선물 받은 아이들은 마치 상이라도 탄 것 마냥 벅찬 미소로 엄마아빠에게 달려갔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삐에로의 얼굴에서 흐뭇해하는 그만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신출내기 삐에로였는지 공연 중간중간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길을 돌린 곳에는 공연을 하는 삐에로와 삐에로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그 여인은 행여나 삐에로가 실수라도 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눈빛으로 앉아있는 것 같았다. 아름드리 계단에 편한 자세로 앉아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 여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모은채 허리를 꽃꽂이 세우고 삐에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삐에로의 공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삐에로와 삐에로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을 번갈아 지켜보며 삐에로와 여인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지 혼자만의 생각들에 빠지고 말았다. 서툴지만 풍선을 사랑하는 삐에로가 무대에 나설 수 있었던 건 그를 바라봐주는 한 사람때문이었을까? 그날도 자기만의 공연을 열심히 이어가는 삐에로를 그 여인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 주고 있었을까? 나는 삐에로가 공연을 하던 그 널찍한 광장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질 때 즈음 자리를 옮겼고, 그 공연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보지 못했다. 그날의 무대는 늘 하던 대로 능숙하게 공연을 이어가는 삐에로의 모습이 아니라,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는 삐에로의 무대였다. 삐에로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기만의 공연을 이어가고 있을까, 널찍한 공간을 채워줄 사람들이 없다면 그를 응원하는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갖가지 모양의 풍선을 만들고 있을까.
그는 여전히 삐에로일까, 풍선을 사랑하고, 풍선으로 만드는 갖가지 모양에 자기 마음을 담아낼 줄 아는 삐에로, 풍선을 받아든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짓는 그런 삐에로로 있을까? 그는 어떻게 풍선을 잡게 되었을까? 그에게 풍선은 어떤 존재일까? 풍선을 좋아해서 풍선으로 자기만의 쇼를 하고 싶다는 말에 그 여인은 뭐라 답해주었을까? 그 여인은 풍선과 그의 시작을 뭐라고 응원해주었을까? 나는 그때의 공연을 떠올리며 그들은 모르게 삐에로와 여인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덧입혀보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