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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푸딩 Mar 22. 2022

[친애하는 나에게] 04. 잠옷

잠들기 전 시간이 가장 힘든 나를 위한

어렸을 적 즐겨 봤던 드라마나 만화 속 여자 주인공 부잣집 딸들은 모두 잠옷을 입었다. 흰색 드레스 같은 모양에 레이스가 달려 귀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옷. 그에 반해 현실에서 내가 입고 있던 잠옷이라 칭하던 것들은 내복 혹은 이제는 거의 제 기능과 모양을 잃어버린 옷들이었다. 늦은 저녁 할머니 곁에 누워 함께 tv를 볼 때면, 나는 가끔 화면 속 출연진들의 잠옷과 내 잠옷을 번갈아 보곤 했다. 할머니가 정성 들여 삶고 세탁했기에 늘 깨끗한 내복이었지만 이상하게 초라함과 부끄러움이 가슴 뒤편에서 부풀어 올랐다 사라지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크면 잠옷을 입는 어른이 되겠다고.    



  

내가 8살 때까지 부모님은 시장에서 속옷장사를 하셨다. 시장에 하나뿐인 속옷가게라 장사도 꽤나 잘 되었고, 친구들과 친구의 부모님들께 나는 속옷 집 딸내미로 통할 정도로 부모님의 가게는 유명했다. 흰색, 노란색, 하늘색, 핑크색, 레이스, 꽃무늬, 구름무늬, 곰돌이, 원피스, 투피스 등등. 형형색색 저마다 뽐을 내는 잠옷들이 가게 매대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내 잠옷은 없었다. 손님들에게 허락되었지만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잠옷 얘기를 몇 번 꺼냈던 것 같은데 엄마 대충 흘려듣고 답하거나 이마저도 대답하지 않았다. 팔아야 했으니까.      




내복이 피부와 혼연일체를 이루어 외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하던 중 불현듯 내복 입는 일이 부끄러워지는 시기가 오면서 내 잠옷의 역사는 전화점을 맞이했다. 이 시기에는 초등학생 때 입던 체육복과 늘어난 티셔츠가 내복의 자리를 대신했는데, 대부분의 형체와 기능은 잃었지만 체온을 유지해주는 것만은 가능했기에 헌옷수거함으로 가는 대신 잠옷으로 간택되었다. 유행이 지나 입지 않는 티셔츠들도 잠옷으로 새 일거리를 찾았다. 집에서는 유행이랄게 없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20살, 다른 지방으로 대학교를 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비로소 진. 짜. 잠. 옷을 입을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고 그리던 잠옷은 실제로 필수품의 형태가 아니었다. 미디어에서 보고 체득하여 머릿속에서 이미지화되었던 수많은 잠옷들은 내복이나 늘어난 옷들과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무언가 많이 기울어진 저울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질 좋은 레이스 원피스 잠옷을 산다는 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당장 잠옷을 위한 소비가 불합리하다고 스스로 단정 지었을 뿐. 인터넷 쇼핑몰을 수천 번 들락날락 한 횟수만큼 잠옷으로 가득 채워졌던 장바구니는 내 마음과 함께 비워졌다. 그렇게 또 한 번 잠옷 입는 일이 미뤄졌다.



      

그리고 잠옷은 꽤나 오랫동안 내게서 잊혔다. 아니 고요히 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잠옷이 다시 떠오른 건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후였다.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 편안할 거란 예상과 다르게 나는 오히려 불면증이 한동안 심해졌다. 이런저런 두서없는 말과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쓰이고 지워지고 찢기기를 밤마다 반복하면서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졌다. 낮에도 달이 뜨고 밤에도 태양이 떠 있는 세상에 홀로 서 있었다.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가 나에게 내려준 동아줄, 그게 바로 잠옷이었다.




이제 나에게 잠옷은 나에게 물건이라기보다는 의식에 가깝다. 의관정제. 잠옷을 입으면 자야 하는 시간임을 알리는 의식행위이다. 생각의 모터를 끄고 그저 눈꺼풀을 닫으라고 나에게 생체 신호를 보낸다. 문득 잠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날 밤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며 잠옷 몇 벌을 샀다. 모양별, 소재별로 다양했다. 지난날의 해소되지 못한 욕망과 불면증을 치료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뭉쳐 엄청난 시너지를 내며 소비 폭발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2년째 그 잠옷들을 잘 입고 있다.



     

오늘도 이 잠옷들 중 하나를 골라 침대 위로 뛰어들겠지만 아직도 몸이 오작동할 때가 많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요즘 수면 잠옷을 입고 자면 더운지 새벽녘에 한 번씩 깨는데 봄이 오나 보다. 봄 잠옷을 사야겠다.




photo by Simona Serg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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