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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Aug 14. 2017

요즈음 내 친구는

금, 친한 이가 팔을 뻗어 닿을 거리에 있는가? 꿉꿉한 날씨에 혼자 울적하지 말고 차 한잔이나 하자고 부를 수 있나? 갑자기 열 받고 돌아버릴 지경이라 붙들고 하소연할 수 있나? 혹은, 엄청 속 썩인 누군가를 가족 대신 털어놓는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나마 숨통이 트일 테니까. 요즈음 내 친구는, 조금 뜬금없다 싶지만 다름 아니게 딸아이 친구의 엄마다. 그녀와 나는 동선이 고만고만하다. 주로 아이들이 파하고 나오는 학교 후문 앞에서 마주친다. 또는 피아노 학원을 보내 놓고 기다리려고 찾은 커피숍에서, 시장을 보러 나온 골목 근방에서도 만난다. 몇십 미터 근방에 살고 같은 생활 반경의 아이를 가진 탓에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되어 있다. 보통 5분에서 10분 정도 나무 그늘 아래서 이야기를 하다가 먼저 누구라도 나오면 미련 없이 돌아선다. 어쩔 때는 저 멀리서 손 인사로 아는 척을 대신한다. 



리는 그럴듯한 약속을 하지 않는다. 마주치거나 시간이 허락된다면 차 한잔 하는 거고,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늘 전제로 깔려 있다. 그래서, 하교 시간에 나오지 않아도, 학원에 오지 않아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서로에게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하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가볍게 통보한다. 그래도 못 만났다면 어긋난 것일 뿐이다. 크게 기대할 것도 없는, 적정한 예의와 배려로 묶인 사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누구보다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은 서로의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사나 집안 형편 같은 소소하거나 가슴을 짓누르는 사연들을 이야기한다. 나에게도, 오랜 친구나 한 이불을 깔고 같은 찌개를 떠먹는 그에게 속 시원히 말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내 모든 감정의 기복, 이를테면 콩알탄처럼 터지는 자잘한 에피소드와, 엄마와 주부로써 감내해야 하는 책임과 사사건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모두 밝히기 어렵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면 아마 그는 질식해서 죽을 것 같다고 귀를 막았을 것이다.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또 다른 가족을 포용하는 과정 속의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와 갑자기 떨어진 의무란 건, 같은 신세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언저리를 적절히 배회하고 감지해야 알만한 감정이다. 



금 이 시기에 필요한, 어릴 때 나는 언감생심이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됐을 거라 느끼는, 엄마의 관심과 헌신에 대해. 가장이란 막중한 책임감 뒤로 소싯적 경험과 과잉보호 사이에 불분명한 기준일 수밖에 없는 아빠는 깨우칠 수 없는 보살핌에 대해. 지금은 모르지만 앞으로 아이가 크면서 자연스레 흡수한 그런 보호와 사랑으로 잉태할 크고 넉넉한 자질에 대해.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역할과 희생이 아이에게 좋은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고 있다. 비록 자신의 일부를 포기한 대가로 고생을 자처한 것이지만. 그녀와 나는 그런 점에서 통한다. 어느 날 문뜩 떨어진 별똥별과 마주친 듯 알게 된 사이지만, 쭉정이처럼 영양가 없었던 학교 생활이나 잘 나갔던 시절의 한때를 입에 올린 적도 없지만, 지금 내 곁에 그런 벗이 있어 다행이다. 돌이켜보면 주변엔 언제나 좋은 사람이 있었다.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마더 테레사처럼 관대하고 키다리 아저씨처럼 도움을 줬던 인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와 타이밍 상으로 잘 맞았던 인물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꽤 진실하게 살아왔던 모양이다. 



를 지켜줬던 벗을 머리 속에 하나 둘 떠올려본다. 중학교 시절 십 공주네, 무슨 파네 하면서 몰려다녔던 친구들. 그 당시엔 왜 그렇게 삼총사 같은 파벌 만들기가 유행이었는지 모르겠다. 거대 무리 중 하나가 되지 않는 건, 혹 내가 낙오자인 것 같은 자괴감과 직결되는 거였다. 하루는 학교에 다녀온 엄마가 그 친구들과 놀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다. 급기야 맹모삼천지교를 교훈 삼아 이사까지 감행했다. 그 이후로 친구들 사귀는 게 영 신통치 않았다. 혹시 누군가와 사귀게 되면 내 모든 것을 걸었다. 주말에 보내야 할 시간도,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함께 봐주는 것도, 하다 못해 주말 자율학습도 빼먹었다. 왜 그렇게 함께 해야 할 것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땐 친구란 내 삶의 팔 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면 뿔뿔이 흩어져 연락하는 이는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것도 2시간 내외인 대전에 살지만 언제 한번 서울에 오면 만나자는 핑계로 몇 년째 만나지 못하거나, 공기 좋은 남양주로 이사 간 후 깜깜무소식이 된다. 그에 비해, 저 멀리 타국에서 가족 행사 차 서울에 방문할 때 얼굴 도장 찍거나, 일 년에 한두 번 연중행사처럼 만나는 친구는 나은 편이다. 



면, 옆 동네에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와는 종종 점심을 먹곤 한다. 지금은 여느 동네 아줌마처럼 살림이나 애들 걱정을 늘어놓는 관계지만, 한때는 코 앞의 발조차 보이지 않았던 안개 낀 시절과 모호한 앞날에 대해 혹은 우리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남자에 대해 토로하던 사이였다. 생각해보면 그녀만큼 가까이서 십 대부터 지금까지 변천사를 많이 알고 있는 이도 없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축 처진 어깨로 하릴없이 걷길 좋아해 학교 옆 논밭을 가로질렀다가 선생님께 혼쭐났던 일, 대학생이 됐다고 커피 후식까지 나오는 나름 근사했던 레스토랑을 고집했던 일, 머리 아픈 일이 생길 때면 기차 타고 강촌까지 가서 자전거 한 바퀴 돌고 왔던 일. 고민과 기쁨과, 고난과 극복이 켜켜이 쌓이고 힘겹게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그 모든 것을 군말 없이 경청했고 보듬었다. 이제 와보니 그 모든 게 추억이었다. OO아파트 거주민으로서 생활고를 털어놓다가 가끔씩 삼천포로 빠져 그녀가 살았던 을씨년스러웠던 단독주택으로 흘러들어가니까. 아마도 우리의 추억은 그녀의 군대 간 오빠가 남기고 간,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우리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오래된 책이 즐비했던 이층 다락방 속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녀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죽마고우인 동시에 동네 지인인 셈이다. 같이 늙어가는구나 싶었는데, 한편으론 우리 사이가 조금씩 변해왔음을 깨닫는다. 과연 친구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란 말도 맞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유할 게 많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단점과 장점, 어쩌면 허물이나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까지 숨기지 않고 포용할 수 있는 사이. 학창 시절, 나와 그녀는 분명 그랬다. 말 못 할 신체적 고민에서부터 영어 시간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해 수모를 당한 일이나 동생과 리모컨을 던지고 육탄전을 벌인 일까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울분과 격분을 고백하고 달래며 좀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때는 모든 것을 공유했던 순수와 격의 없음에 대한 합집합으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치부까지 드러내는 진솔한 공유가 아니라 허용할 수 있는 만큼의 솔직함만이 남았다. 왜냐하면, 직업도, 집도, 아이도 다른 분류 속에 놓여있기에 최대한 밝힐 수 있는 만큼만 털어놓을 수 있다. 집 평수는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얼마에 거래했고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 혹은 아이의 학교는 알고 있지만 수학 시험을 몇 점 받았고 학원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일일이 말하기 어렵다. 자존심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다행히 그녀와 나는 어느 정도 비슷한 처지이므로 그 범위 내에서의 고민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만큼 엄마들 모임은 공통사가 맞지 않으면 소통할 수 없다. 비슷한 또래들, 고만고만한 성격과 성별, 성적 등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즉, 엄마들 모임은 코드별 교집합이다. 그 지점의 관계란 그나마 좋은 말로 지인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구와 지인, 공유와 소통 가능한 사이, 합집합과 교집합의 여부란 간극을 겪으면서, 친하다고 해도 친구 하기에 선뜻 주저할 때가 있다. 사실상 학교를 졸업하면서 사전적 의미의 그것은 더 이상 없는 듯하다. 대부분 사회나 가정에 있더라도, 학창 시절의 친구를 진정한 친구라고 말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어떤 위치나 상황에서도 벗은 필요하고 존재한다. 친구가 아니더라도 조금씩 털어놓고 소통할 누군가는 있다. 그게 지인이라면 어떤 모임의 구성원일 수도 있고 조직 내 일원일 수도 있다. 같은 회사의 동료도 그렇다. 하루에 1/3 이상을 한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며 심지어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 단순히 공통 관심사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니라 같은 회사에 지원하고 어쩌다가 같은 부서에 배정된 관계다. 보통의 지인보다도 더 불특정 하게 운명적으로 엮인 만남이다. 아무 연고 없는 사이에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주기란 어쩌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는 자체로 합집합이고, 같은 목표가 주어졌기에 교집합이요, 고용주를 빼고 노동자로 묶인 여집합과 타이틀 속에 책임과 의무만 남고 권리가 쏙 빠진 차집합 속에서, 무슨 우정이 싹틀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아무리 동거 동락하고 함께 성과를 이룬 각별한 동료 사이라도, 여행을 가거나 주말에 시간을 보냈던 사이라도, 그곳을 떠나면 더 이상 전 같지 않다. 동료 사이는 타협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허용할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면 더 이상 소통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벗이란 가깝게 지내고 공유할 게 많은 것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했다는 세월이 추가된다. 



 사람의 직업이나 상황이 그때마다 달라지는 현대 운명 속에서 한결같이 마음을 나누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어우르는 말은 애꿎게 타이밍이란 말속에 용해되어 재탄생한다. 세월도, 한결같은 관계도, 솔직함도 상황과 처지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니까, 상황에 맞게 이견없이 최적화된 이가 벗인 셈이다. 다변하는 삶 속에서 설사 누군가 곁에 있지 않아도 뭐 이상할 것도 없다. 누구 하나라도 있다면 복 받았고 나름 성공한 삶이다. 그런 정의가, 나쁜 친구를 사귀는 아들을 일침 하기 위해 죽인 소로 시체처럼 위장해 숨겨 달라고 간청한 아버지와 그런 그를 군말 없이 받아준 친구에 관한 전래 동화에 빗대면, 제법 씁쓸해진다. 아이러니하게 이 시대에 가장 현실적인 답변이란, 한편으론 사전적 의미를 넘어 유연해진 포용력을 이끌어낼 뿐이다. 큰 기대치나 바람을 가지지 않을 것,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조언과 베풀기를 실천할 것, 친구마다 목적과 역할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할 것. 나는 그중 어떤 것 때문에 친구를 만나고 있을까? 정확하진 않아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나의 친구는 현재의 나를 말해준다. 고로, 당신의 친구는 현재의 당신을 말해준다. 





지금 곁에 있는 친구보다, 나 자신이 어땠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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