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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Aug 30. 2017

그걸 어찌 알겠어

칠 전 방문한 미용실은, 샛길처럼 갈라진 골목 사이에 그쪽 방면이 아니라면 모를 법한 후미진 곳에 있다. 설마 이런 곳에 하는 찰나 얄궂은 일러스트 미녀가 그려진 사인볼이 보인다. 쌍팔 년도 유물과 같은 걸 보고 있자니 과연 스타일이 제대로 나올까 의심스러워진다. 만약 지인이 위OO에 싸게 나온 쿠폰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 뿌리 염색이 쿠폰 한 장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예약하지 않았더라면, 선뜻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앙하고 현관 벨이 울리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 중년 여인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한다. 편한 대로 앉으라면서 안기도 전에 쿠폰번호부터 묻는다. 뿌리 염색이라 했죠 하며 내 머리를 이리저리 들춘다. 뒤편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서걱서걱하고 염색약을 섞는다. 면접 대기실 같은 어색함을 참지 못한 나는 어떻게 쿠폰 생각을 했는지 대단하다고 내뱉는다. “오픈한 지 세 달 됐는데 팸플릿이나 명함은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누가 이 골목까지 찾아오겠어요. 근데 친구가 인터넷에 올리라고 해서 설마 했는데, 꽤 쏠쏠하네요.” 한번 말문이 트니 간단한 호구조사를 밝히는 건 문제도 아니다. 대학교에 들어간 장성한 아들 하나가 있어요 하길래, 조만간 군대에 갈 텐데 서운하시겠다고 받아 치니, 아니 얼른 갔으면 좋겠어요 아침밥 차려주는 것도 곤욕이에요 한다. 



녀의 이야기는 점점 귀찮고 짜증 나는 신변잡기로 흐른다. 잘 되던 곳에서 권리금 싼 곳으로 왔더니 너무 외져서 손님이 없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혼자 일하는 게 녹록지 않네, 무뚝뚝한 아들은 집에서 입 벌리는 일이 없어 재미없네. 그렇게 하소연과 한탄 조를 오가면서도 인생 뭐 있어요, 그래도 즐겁게 사는 거지 한다. 그나마 낙은 일 끝내고 친구와 수다 떨고 노는 거란다. 그제야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허벅지 절반쯤 덮은 검은색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중년이라고 하기엔 군살이 없을 정도로 늘씬하다. 정수리에 볼륨이 잔뜩 들어간 새까만 레이어드 컷을 어깨까지 늘어트리고 살짝 부자연스러운 쌍꺼풀 진 눈에 새빨간 립스틱으로 포인트를 줬다. 어떻게 보면 다 큰 아들이 있다고 보기엔 꽤나 젊어 보이고 골드미스로 보기엔 뭔가 아줌마스럽다. 유행에 뒤지지 않는 흔적을 보면 나이는 어떤지 몰라도 마음 어딘가에 작은 불씨 하나 숨기고 있을 게 뻔했다.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하면 활활 타오를 정열이랄까. 아마 그게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자기 내 머리 속에 아래층 아줌마가 슬그머니 들어온다. 종종걸음으로 바쁜 그녀는 거의 매일 엘리베이터나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친다. 아침엔 운동을 다니고, 오후엔 앞 동의 맞벌이 부부의 아이를 돌본다. 시간 날때마다 에스테틱샵에서 피부관리를 받는다. 조만간 작은 사업을 벌일 계획도 있다. 그럼에도 늘 먹거리가 가득한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나머지 손엔 양산이 들려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균형이 어긋난 어깨를 들썩이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가끔 쓸쓸하다. 다 컸다는 자식들과 사업하느라 바쁘다는 남편조차 그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엄마로서, 주부로서, 여자로서 포기하는 법이 없다. 어깨가 무겁고 온몸이 찌뿌듯하나 아직은 아름다움을 놓을 수 없다. 동네 엄마들을 보면 요즘 젊은 엄마들 참 부러워요 우리 때랑 또 달라한다. 아직도 충분히 젊어 보인다고 받아지면, 아유 전 같지 않아하곤 손사래를 친다. 그 몸짓에 거부와 희망의 양면성이 엿보인다.



들은 아마 갱년기인 모양이다. 사전적 의미론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 것이라 말한다. 육체는 늙음의 초입을 서성댈지언정 마음만큼은 청춘이고 꾸미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 아직도 한창 같은데, 제법 꾸미고 나가면 누가 아가씨인 줄 알겠다고 한 소리 들을 것 같은데, 벌써 손주 볼 나이라니. 막 피어난 꽃봉오리를 보면서 이렇게 설레는데 막상 허리를 숙여보면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 모순적인 고민 앞에서 부정할 것이고 방황할 것이다. 그게 억울하고 서운해지면, 지난날들을 영사기처럼 되돌려본다. 울적한 마음에 이룩한 성취보다 고생에 꽂힌다. 젖먹이를 떼어놓고 일을 나갔고, 바쁘다 보니 학교에 찾아가서 잘 부탁한다는 말조차 못 하였으며,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남들 다 가봤다는 클럽 한번 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세월은 덧없이 흘렀다. 그녀들의 친정어머니는 자식들 잘 사는 것을 낙이라 말하며 사셨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이제는 돈만 있으면 충분히 젊음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 거울을 보면서 무너져가는 얼굴 선에 한숨짓는 대신, 가끔씩 병원을 찾아 시술을 받으며 일시적인 위로를 받을 것이다. 또, 운동이나 마사지로 꾸준히 관리를 받으면 회춘하는 것처럼 성숙미를 뽐낼 수 있다.



간의 흐름 앞에서 화학적 감흥보다 물리적인 조건이 더 이상 따라주지 못할 때 한시적이 돼버린다. 그렇게 노력해도 결국 어딘가 노쇠한 신체의 구석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한스러움을, 스스로 큰 줄 아는 자식이나 아무것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남편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 차라리 같은 처지의 친구라면 이해할 것이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파이팅을 외치지만, 나아진 세상을 요즘 젊은이처럼 누릴 수 없고 그렇다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가로막힌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것이다. 그 생각이 들면, 아름다움은 어떻게든 지켜도 죽음의 길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피할 수 없다는 것, 찬란한 그때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노년기의 무빙 워크를 타고 전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율배반적인 고통이 손에 잡힌다. 시간의 흐름 속에 육체를 늦출 순 있어도 정신과 운명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마치 희망고문처럼 다가온다. 그 속에서 어떻게 인생이 즐겁고 아름답기만 할까?



과 몇 년 전까지 친정 엄마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저녁 차리는 일도, 집안 청소도, 빨래 개는 것도 귀찮아했다. 그럼 뭐하고 싶은데 했더니, 놀러 다니고 돈 쓰러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갱년기가 되고 나서야 생전 처음으로 농땡이 치고 싶어 졌다. 그럼에도 정작 백화점에서 옷 한 벌 사지 않았다. 차라리 미용실 원장이나 아래층 아줌마는 낫다. 알뜰과 궁색이 몸에 밴 그녀는 염색 한번 미용실에서 한적 없다. 그래도 할머니처럼 보이기 싫다고 홈쇼핑에서 구매한 약으로 매달 염색하셨지. 한 번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내가 하겠다고 하지 못했을까? 나도 머지않아 그들처럼 될 것임을 깨닫고 나서야 그 심정이 보이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가슴 깊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미래의 언젠가, 지금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물이 핑 돌 때가 올 것이다. 아마 그때는 바로,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내 말에 그럼 뭐하고 싶은데 하고 묻는 딸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누구도 그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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