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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Sep 04. 2017

어머니도 늙는다

린 시절 우리 집은 부모님과 우리 형제 말고도 친할머니, 세 고모까지 도합 아홉이 살고 있는 대가족이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까지 함께 사는 걸 결혼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했다. 당시 이십 대였던 어머니는 그걸 만만하게 봤던 모양이다. 그러나, 웬걸. 아이 셋을 끼고 거의 아홉 끼를 차리느라 온종일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다. 너무 힘든 나머지 차라리 월급 일부를 떼어주고 각자 사는 게 더 편할 거란 생각도 했다. 다섯 식구만 오붓하게 산다면 반찬 걱정도 줄 것이고 아이들에게 짜증을 덜 부릴 것이다. 그 흉금은 받아주는 이 없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꼬박꼬박 모은 아버지 월급으로 고모들 시집보내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일 년 전까지 모셨으니까. 



거의 한때를 생각하면 새록새록 솟아나는 추억도 있지만 떠올리기 싫어 억누르고 싶은 것도 있다. 그중 대부분은 할머니와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내 기억 속에 그들은 도란 도란 이야기 나누기보다는 냉담한 대치 상태가 더 많았다. 오히려 눈치는 할머니가 봤고 과감한 건 어머니였다. 대체로 시끄러운 소리는 부엌에서 시작됐다. 어머니는, 냉장고에 보시기나 락앤락 뚜껑을 제대로 안 닫아서 음식물 냄새가 난다고, 설거지 한 그릇에 얼룩과 고춧가루가 그대로 붙어있다고, 행주를 걸레처럼 바닥을 훔쳤다고 뭐라 했다. 할머니도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다음부터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만 바람의 검처럼 공기 중을 가로질렀다.



땐, 할머니가 뭐 그렇게 잘못을 했나, 도와주려고 한 것도 문제라니 억지스러워 보였다. 나는 누구한테 더 정이 있느냐가 아니라 태도에 기준을 두었으므로 할머니 쪽에 기울었다. 그래서인지 잠재적 기억 속에서 어머니를 기분파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에 네 외할머니 집에 갔는데, 부엌이 너무 더러워서 닦아주려고 냉장고와 선반을 뒤졌거든. 어쩜 뚜껑 하나 제대로 닫혀 있지 않고 그릇엔 고춧가루가 덕지덕지 묻었더라... 나이 들면 다 그런 가봐.” 친할머니에게 미안해서 그런 말을 덧붙인 건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나이 들면 전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젊을 때 떡 먹기처럼 쉬웠던 일도, 누구보다 깔끔하고 완벽하게 완수했던 것도, 점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아마 당신 시어머니를 인정하지 못해도 자신의 친정어머니로부턴 이해됐던 모양이다. 이치를 깨닫는 건 이성이나 논리적 입말이 아니라 감정과 감수성의 자극을 절감해야 완벽히 도달하는 것 같다. 



실 그 말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양심에서 나온 말이라 생각했었다. 시어머니를 구박해 놓고선 친정어머니에겐 안타까운 잔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서서 마음 아팠다는 건,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터였다. 그러나, 나도 결혼을 하고 주부가 되어보니 과거의 그녀를 조금씩 이해할 것 같다.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음식 만드는 걸 보고 있노라면 예전 같지 않은 모습에 뜨악할 때가 있다. 국그릇을 휘휘 젓던 숟가락으로 된장 통에 푹 담고-시어머니가 직접 만드신 된장이라 그렇게 하면 곰팡이가 핀다-, 마늘 다지던 칼로 아이들 먹을 햄을 자르며, 밑반찬 넣는 통에 김치를 썰어서 담아둔다. 뭐 그건 그렇다 치자. 가끔 급한 마음에 세정제를 쓰지 않고 물로만 그릇을 헹궈 올려놓거나,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말리지 않고 칼집에 꽂아 두며, 개수대 닦는 수세미로 아이들 컵을 닦기도 한다. 아우 그걸로 닦는 거 아냐하면, 뭐 어떠냐 너희들도 다 그렇게 키웠는데 잘만 크더라 한다. 알뜰한 그녀는 살뜰한 나머지 지퍼백도 물로 헹궈서 거꾸로 세워두고 말려서 한번 더 쓰라고 한다. “엄마, 이 고춧가루 뭐야. 설거지한 거야? 예전에 그렇게 할머니한테 뭐라고 하더니.” 그녀의 행동을 의심의 눈초리로 검사하던 내가 대충 엎어놓은 식기들을 다시 정리하다가 문제의 것을 발견하곤 급기야 소리를 지른다. 내 말에 그녀는 눈을 흘긴다. 



지 속상할 법도 한데, 끝까지 정리해주고 돌아선다. 얼마 후 잠을 자려고 누우니까 그 모습이 괜히 아른댄다. 내가 소리 지르던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나도 늙었구나 일까, 아니면 너도 늙어봐라 일까? 젊은 시절의 미안함에 화끈 달아올랐을까, 아니면 자신의 행적은 부메랑처럼 돌아온다는 깨달음일까? 사실, 모르겠다. 나는 그녀처럼 산전수전 다 겪고 황혼의 어느 지점에 서서 모든 걸 내놓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선명해지는 건 내 마음이다. 이상하게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어머니네 부엌이 떠오른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내가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는데, 심지어 내가 쓰던 물컵까지 그대로인데, 언제부턴가 낯설어졌다. 내가 더 이상 살지 않으니까 그런 줄 알았다. 휴지통 위로 날아다니는 날파리, 개수대에 그대로 놔둔 음식물 쓰레기, 싱크대 한편에 한번 우리고 버리지 않은 녹차 티백. 시큼털털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메우고 식탁 위는 끈적대는 통에 손조차 닿기 싫다. 내가 아는 그녀는 일회용 용기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깨끗이 닦아 쓸 정도로 검소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집안 곳곳에 찌든 때가 거슬릴 정도로 눈에 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은 순간부터였는지, 아니면 다시 일하게 된 시점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예전 같지 않은 게 한 두 개가 아니라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가 되니, 뭐하나 꺼낼 때마다 매의 눈으로 검사를 해도 입에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다물고 만다. 애써 모른 척하거나 조용히 물 티슈를 찾아들고 닦아본다. 세월의 흔적은 손쉬운 도구 따위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제까지나 야무지고 당찬 줄 알았던 어머니도 시간의 흐름을 피하지 못하고 서서히 늙어가는 중이다. 그 모습은 그녀가 야속해했던 과거 할머니들의 것이었는데. 예전으로 돌아가길 바라거나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런 어머니를 마주치는 건 복잡한 감정이다. 애달픔과 마지못함 사이의 딜레마다. 앞으로 더해갈 것이고 그걸 바라볼수록 더욱더 참기 힘들겠지. 아마 과거에 그녀가 외할머니 집에서 느낀 감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외할머니의 그릇을 정리하면서 우리 어머니도 이렇게 변했네 하면서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이젠 자신이 보살펴야 할 시점임을 감지했을 것이다. 큰 산처럼 든든했던 부모가 어느새 다 허물어지고 작은 흙덩이로 쪼그라들어 여전히 작은 나무 같은 내 그늘에서 쉴 수 있다는 건, 단순히 삶의 역치가 아니라 자식의 입장에선 한 축의 전복이다. 서서히 무너져 버티다가 나중에 자식에게 기댄다는 건 부모나 자식 모두 충격과 고난이다. 자식인 내가 먹먹한 마음으로 해본다고 해도, 그들이 해준 것에 비해 하찮다. 마음만큼 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굼뜬 행동을 보곤 버럭 해버리는 자식의 편협함. 그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대를 거쳐 돌고 돈다. 그 기막힌 인생살이를 또 한 번 깨닫는다.






어머니에 대한 격세지감이 한낱 고춧가루 묻은 그릇에서 나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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