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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Sep 12. 2017

가본 적 없는

                                                                         표지 : Aquis submersus(막스 에른스트, 1919)




건 샘물이었다. 한시적이고 뾰족한 가시를 피하려다가 들쭉날쭉한 수풀 속으로 들어갔더니,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나타났다.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고즈넉하고 청연 하며 애처롭다. 홀린 듯 바라보다가 서성여본다. 한 걸음씩 배회하다 보니 어느새 코앞이다. 맑고 청아한 물이 가득 차있다. 손을 대보니 찌릿하고시원하다. 두 손을 포개어 손그릇을 만들고 담는다. 입에 가져가 조금씩 목 안에 넘긴다. 쨍하면서 들큼하다. 근본적인 청량감이 그대로 녹아있다. 분명 내가 처음이다. 확실치 않아도 느낌상 안다.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괜한 말 한마디에 영험이 사라질까 봐. 신비는 선택한 이에게 허락된 것이다. 차라리 자족하기로 한다. 나라도 행복하겠다. 나라도 도취하겠다.



바탕의 깊은 호흡으로 끊임없이 그곳의 정취를 음미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 없는 무색, 무취가 뿜어내는 깨끗함을. 혹시나 내 신발 밑바닥에 붙은 타지의 오물이라도 묻어날까 뒷걸음질 치듯 물러난다. 표식 따윈 남기고 싶지 않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더 이상 나대지 못한다. 물 한 모금 조차 담아낼 자신이 없다. 그 차디찬 물속에 언제나 미열 상태인 내 몸을 식힐 수 없다. 맑은 기운을 품어내는 원천에 대해 탐험할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처음 봤던 그 모습을 고대로 간직하고 있어야 하기에. 단지 보존하는 게 내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서성이고 잠시 접촉했다가 느끼며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 애중일까? 사랑일까? 집착일까?



히려 그 핑계는 나태함이 아닐까? 구더기처럼 위협할만한 건 없는데. 정작 그게 뭔지도, 원하는 것도 없다. 마주친 의미조차 간파하지 못한다. 신비한 무언가에 취해 바라보기만 한다. 그걸로 만족하면 그만이지 괜히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궁금해진다. 좀 더 다가가고 싶다. 욕심인지 욕망인지 형체를 알 수 없는 게 꿈틀댄다. 움찔했다가 또다시 주춤한다. 마음 한편이 미지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면 왜 서성이기만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뛰어들어야 할지. 너무 얕아서 머리를 콩 하고 부딪치지 않을는지. 아니면 너무 깊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건 아니겠지. 수영도 못하니 수면 위로 올라가지도 못할 텐데. 차라리 밧줄에 돌을 매달아 길이를 재어봐야 하나. 정작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걱정만 늘어놓고 있다. 무의미한 잡념들.



젠가, ‘맨발의 디바’로불리는 여가수가 열창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수 십 대의 카메라와 수 백명의 관객 앞에서 마이크와 악기 소리를 잡아먹을 듯 노래하던 그녀. 마치 신의 지휘 아래 온 우주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하듯 레이더처럼 내 뻗은 팔. 스위치를 켠 듯 원기 충전해 뿜어내기 직전의 떨림으로 흔들리는 몸. 그것을 방출해내는 길목에서 핏줄이 터질듯한 목선과 혼신의 힘을 끌어내는 얼굴. 접신했거나 광인이거나, 혼신이거나 광기이거나. 음악과 몸뚱이가 분리된 것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초월한 천상계의 어딘가에서 완전한 예술로써 존재한다. 그 순간은 노래와 가수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다. 어떻게 자신을 떠나 예술로 흡수될 수 있을까? 그 모습이 에로틱한 동시에 추한지 알고 있을까? 대부분은 후자 때문에 자신을 놔두지 못한다. 어딘가로 흘러 들어가거나 완벽하게 녹아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땐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그게 나라면 어떻게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망각할 수 있을까? 아마 내가 샘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치일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나 자신이 다치거나 변형될까 혹은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금의 내 모습이 어떻길래. 이름 석자,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들, 시행착오와 고행의 결과물, 그물처럼 엮인 관계와 행적.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것들. 그걸 알면서도 안정적인 구석을 남겨두고 싶어서 집착해왔다. 조금이라도 뒤틀리거나 벌어지는 걸 허용하지 못했다. 그만큼 발버둥 쳤다. 후회하진 않는다. 가끔씩 그에게 물어볼 뿐이다. 지금 이 모습이 아니었어도 사랑했을까? 머뭇대는 모습에 배신감 대신, 나도 그럴 테니 이해한다고 말한다. 어차피 질문과 대답은 뻔하다. 지금까지 일궈낸 내가 진짜 나일까? 그건 내가 아니라 나와 맞닿은 연결(net)과 닻(dot)이다. 인생의 능선 위에 무수히 찍힌 변곡점이다. 1막과 2막 같은 무대 위의 가면이다. 들고 있는 가방과 머리 모양으로 규정되는 스타일이다. 그건 레이어다. 내 앞에 겹겹이 쌓인 얇은 막. 미세한 덧칠과 세심한 묘사가 추가되고 살아있는 것처럼 정교하다. 투명하고 오묘해서 나를 아름답고 있어 보이게 만든다. 나를 대변하고 나처럼 행세했지만 전부는 아니다. 다이아몬드 브로치나 진주 목걸이처럼 빛나게 할 순 있지만, 내 이름 석자를 떠올릴 뭔가는 될 수 없다. 그건 나를 둘러싼 피부처럼 나의 일부다. 레이어는 수많은 내 부속품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무색과 불투명한 끈적임으로 수십 개가 얽혀있다. 각자의 두께도, 크기나 형태도 제 각각이다. 내가 살아온 인생만큼 누적된 그것을 파헤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덕쟁이 나 자신이 아닌, 레이어를 탓한다. 그 때문에 샘물과 마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전부 걷어낸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레이어와 샘물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외면과 내면이 다르듯이. 전자에 전적으로 불만스러운 건 아니다. 후자에 주저하는 나를 발견했고, 생각보다 두텁고 무거운 전자를 돌아보게 됐지만, 그것을 홀연히 벗어던질 수 없음 또한 안다. 왜 그런지 전자로부터 캐내는 건 한계가 있다. 삶의 굴레 속에서 열심히 쳇바퀴를 돌렸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그 진심조차 알지 못하지 않나. 샘물이라는 호기심 앞에서. 지금의 나와 멀어질까 두려우면서도, 그것이 가져다준 이율배반적인 변주 속에서 휘둘린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전자를 안고 후자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럴 수 있을까? 질문이 아니라 다짐으로써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물로 흔들린다는 건 뭔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계기를 찾고 있는지 모른다. 다른 나, 좀 더 파헤칠 가치 있는 나로 나아가는 출구를. 파고들다 보면 지금과는 다른 나로 닿고 싶은 충동을. 지금의 일상과 멀어질 수 있는 변명을. 어둡고 난해한 무언가를 건드리거나 맞닥뜨릴지 운명의 역행을.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텅 빈 무지(無智) 속에서 실의라도 빠졌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두렵기도 하다. 기껏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아서. 가라앉는 허공 속에서 이제 그만하고 올라올 수 있을까? 그런 자신을 용서하고 격려할 수 있을까? 모든 게 혼란이고 걱정과 한숨뿐이라도 뭔가 남는 게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일단 뭐라도 해보는 게 나을까? 어떻게든 조금씩 내디뎌야 할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 곡 <가시나무(1988)> 中, 시인과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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