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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Sep 25. 2017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글쓰기란 일종의 소명(疏明)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와 이율배반을 캐냈지만, 나는 단지 내 안의 샘물과 동굴들을 탐험하고 싶었다. 과거 수업시간에도 그랬고, 수다 떠는 도중이나 하다못해 꿈속에서도 무분별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죽어가는 인간은 육체와 함께 정신도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게 의지로써 사라지 않고 바람처럼 세상 속을 떠돌 수 있을까? 누군가는 뜬금없다, 실없다 하겠지만, 그렇게 가끔씩 출몰하는 잡념들이 어쩌면 심연 속 울림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발 좀 알아봐 달라고 아우성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망상처럼 나타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런 의미에서 작법 관련 책을 꾸준히 봤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읽었다. 그러다가 감이 잡히면 흉내 내어 끄적거리다가, 또다시 막히면 다른 길잡이를 찾아봤다. 그 덕분에 실력이 향상되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 생각만큼은 어느 정도 담을 수 있게 됐다. 그 정도라면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인지 모른다. 어차피 나에게 글쓰기는 가시나무처럼 바람 잘날 없는 흉금 속 무언가를 파헤치기 위한 것이니까. 그곳 주위에 어슬렁거리게 됐으니, 좀 더 용기를 내 차근차근 들어가 보면 된다. 그러나, 글이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글을 쓸수록 이상한 욕심이 생겼다. 그때쯤 ‘바바라 애버크롬비’의 <작가의 시작>이란 책을 접한 것 같다.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했고 원하는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 작가들의 습작 훈련기를 전파한다. 게다가, 작가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즉, 자신만의 글을 쓰고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누구나 작가인 것이다. 그녀의 논리는 작가란 직업을 좀 더 광범위하고 포괄화한다. 동시에 용기와 기운을 북돋우는 이상하고 억지스러운 동기부여까지 심어 놓는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 있는가? 아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어느 정도의 능력차와 하한선이 있지만- 작가를 꿈꾸기 마련이다. 그녀는 지금도 가슴이 뛰고 있다면 어서 펜을 들라고 재촉한다. 마치 나이키가 일반인에게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라고 유도하듯. 그건 이중적이다. 자신만의 흉금을 털어놓을수록 유일무이한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범용성을 허용한다. 문학의 위기 속에서 대안처럼 등장한 역발상이다. 반면, 누구나 동참하는 문학은 폭을 확장할 수 있으나 작가의 진입장벽을 낮춤으로써 그동안의 지위를 격하한다. 



게 나 같은 풋내기에겐 얼마나 자극이 되는지 모른다.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는 건가? 때마침 세상의 모든 작가를 지원(支援)한다는 글쓰기 플랫폼에 지원(志願)했다. 거기선 서로를 작가로 부른다. 일정량 이상의 글을 쓰면 출판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또, 특별한 연재나 코너에 참여할 수 있다. 작가의 꿈꾸는 공간 내지는 놀이터처럼 보이는 그곳은 요즘 나의 오아시스이자 믿는 구석이다. 내 마음과 견해들을 끄적거렸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한발 다가선 것 같았다. 만약 누군가 ‘너 무슨 일 하니?’라고 묻는다면 ‘난 요즘 OOO에서 글을 써’란 소리가 나올 판이다(물론 그런 적은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내 실력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의심한다. 나에게 작가란, 어울리지 않은 하얀색 시폰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한 말이다. 그것을 운운하기에 앞서 아직 구 만리처럼 깊을지 모를 내면과 씨름해야 하지 않을까? 늘 그 생각이 머리 한편에서 맴돈다.  



근 읽었던 ‘김형수’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는 글쓰기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을 던진다. 그는 글을 인문으로써 파헤친다. 개인이 세계를 향해 고독한 외침을 내놓게 되는 게 문학인데, 그러려면 인간사에 도사린 낯섦의 계기를 발견하고 캐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지식이나 정보의 잣대로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자신만의 감성, 서정이라고 부르는 정념을 통해 감지돼야 한다. 똑같은 일상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과 속에서, 어느 날 눈부시게 아름다운 햇살을 바라보고 그 속에 미세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어제와 다를지 모를 희망과 포부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감성에 닿는 자, 껄끄러운 이질감 혹은 매끄러운 솜털을 가늠한 자라면 뭐든 남기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낭만과 정서는 주절거리는 문장과 단어의 나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형체를 띌 것이다. 두둥실 떠다니는 풍선처럼 뜬금없거나 가슴 설레거나 혹은 네모지고 껄끄러운 모습으로. 아니면 잿빛 하늘과 검은색 담배 연기처럼 색깔로 다가올 것이다. 그건 현실의 풍경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섬세한 사유가 덧붙여져야 한다. 즉, 어떤 상태와 현상을 직시해 개념과 논리로 풀어내거나, 한발 물러나 좀 더 객관적인 형태로 인간의 모습에 대한 형상화를 밝혀야 한다. 전자가 비평이라면, 후자는 시나 소설이다. 문학은 전자의 의미화와 후자의 감수성, 둘 다 아우른다. 서정성은 후자에서 진화한다. 그게 작가만의 언어로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들은 대부분 그렇다. 그들이 내놓은 일부, 그러니까 개척해온 자취나 파격적인 행방의 결과물에 대해 예술이란 딱지를 허용한다. 



실 예술 안에 문학이 있고, 문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가 예술이란 점에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말마따나 문학은 존재의 더 뒤쪽 어디에 있는 것을 파헤치고, 작가는 무슨 가치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무엇에 대해 규명하는 자다. 우리의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하고 그것을 글로 담아내어 세상 뒤편에 숨어 있던 어둠에 등불 하나를 밝힐 수 있다면, 그게 예술이다. ‘오르떼가 이 가세트’는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비현실화라고 말한 바 있다. 현실을 넘어서야 하고 밝혀야 할 소명(昭明) 의식이 있다. 그런 의미를 추구하고 제대로 이행한 문학 작품은 예술이다. 아마 ‘김형수’가 말하는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은 바로 그곳을 향해 지치지 않고 횃불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그걸 들고 있는 이들이 작가(writer)다. 그들은 글을 쓴다. 누군가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 시간에, 늘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거나 노트에 한자씩 써 내려간다. 그 자체로 노동이고 수련을 하며 자신의 한계에 맞선다. 그 속엔 일종의 신성함이 있다. 그 인고 끝에 탄생한 것이 예술이다. 그 예술과 문학, 작가라는 굴레를 돌이켜볼 때, 감히 내 앞에 놓인 작가란 타이틀이 맞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원래 작가란 뜻은 두 개였던가? 창작하는 사람과 끄적거리면서 발설하는 사람. 무엇에 상관없이 낯선 것에 끝까지 따라갈 줄 아는 사람과 언뜻 이질적인 감각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 전자는 돈이 되든 안되든 일단 역마살에 놓인 것처럼 글을 써야 십 년 먹은 응어리가 풀린다. 반면, 후자는 그걸로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면 실력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한다. 내가 단순히 글 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감히 작가라는 이름에 혹했을 때, 그 심정은 어디와 가까웠을까?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단언컨대 전자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러니, 그의 책을 읽는 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책을 덮고 나서도 미열에 시달린 듯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골몰했다. 그가 말하는 예술, 문학이 내가 원하는 글쓰기였던가? 난 단지 내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걸 더듬고 싶었고 남기고 싶었다. 책을 벗 삼고 가르침을 받아 시시콜콜한 의미들을 찾아 나섰다. 문뜩 머리를 치고 올라오는 울림을 쫓아서 조금씩 밝혀내고 있다. 그렇다고, 그게 문학인지 혹은 문학이어야 하는지 확신 없다. 처음부터 글보다 작가 자체를 염두한 이가 얼마나 될까? 다들 쓰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거겠지. 근데 작가니 문학이니 의식하게 되자, 나의 상태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내 글이 문학의 무언가가 되어야 할까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그래야 작가라는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 들자, 지금까지의 끄적거림이 어떤 의미인가 따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자문(自問)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계속해서 써 내려갈 수 있겠는가?






예술은 동의할 수 없어도 부정할 수 없는 뭔가-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그건 지표나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한편을 관망한다.
망망대해에 꺼지지 않고 떠 있는 등대처럼, 늘 그곳에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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