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 Holiday Reading(Carl Larsson, 1916)
방학한 딸과 모처럼 중고 서점에 갔다. 집 근처 도서관도 있고 대형서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중고 서점을 선호한다. 한두 번 읽고 처박히는 어린이 책 특성상 제값 주기 아깝고 뭐니 뭐니 해도 부담 없이 읽고 고를 수 있어 좋다.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책을 우연히 만나게 될 때의 희열은 희귀한 보석을 마주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다. 대개 혼자 다녔는데, 오늘은 아이와 가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게다가, 이 소소한 나들이가 아이의 입을 통해 추억이라 불릴지 모른다는 은근한 야심마저 있었다.
아이는 산더미처럼 쌓인 선반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른 채 멀뚱거린다. 컴퓨터에서 무엇을 읽고 싶은지 검색하도록 일러준다. 간신히 몇 개를 찾아봤으나 없는 모양이다. 그냥 눈에 보이는 곳에서 몇 권을 뒤적거리다가 ‘아, 이 책!’하며 반가워한다. 나는 몇 권 더 골라준 후 빈자리로 인도한다. 막 한 문장을 읽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받아보니 피아노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다. “어머니, 옷이 바뀐 것 같은데요?” 전말은 이렇다. 아이가 나와 만나기 위해 급하게 나오느라 잡히는 대로 입은 것이다. 그 패딩은 올해 나온 신상으로 하루에 한두 번은 마주칠 정도로 흔한 거라 학원만 해도 똑같은 색상을 입은 아이가 네 명이다. 혹시 그 아이에게 오늘 하루만 우리 애 옷을 입으면 안 되겠느냐 물었더니 사이즈가 맞지 않는단다. 적어도 네 시까지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 막 도착했는데 되돌아가서 돌려줄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시 온다 쳐도 둘째 아이의 끝나는 시간과 맞물리니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애써 마음먹고 온 게 허사가 된 셈이다. 정작 아이는 멀뚱멀뚱 딴짓을 하고 있다. 우발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대뜸 아이에게 퍼붓는다. “아니, 옷을 입을 때 자기 옷인지 확인 안 하고 입는 거야?”
이러다가는 여기서 애를 잡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골랐던 책 중 한 권을 읽으라 해놓곤 일어선다. 책들이 만들어놓은 통로를 걸으며 뭐라도 골라야 한다고 중얼댄다. 오래된 위시리스트 중 하나가 검색에서 나오자 주저 없이 집어 든다. 돌아서니 아이가 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게 보인다. 나는 아이와 함께 자리로 돌아가 찾아온 책을 펼친다. 손에 들린 것은 생뚱맞게도 <몸, 욕망을 말하다>이다. 저자는 나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로서, 글도 쓰고 춤도 추며 강의도 하는 만능 슈퍼우먼이다. 남보다 몇 배 더 활동적인 탓일까?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이끈다는 관념에 이의 제기를 한다. 식욕, 성욕, 정신적 욕구를 억누르라는 소리가 비만, 이혼, 정신 우울증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반항과 분노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우리가 내면에서 나오는 몸의 소리와 흐름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타인이 만들어 놓은 패턴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몸에 대한 욕망을 직시하라는 그녀의 충고는 복잡한 일상을 만만히 보는 게 아닌가 싶어 진다. 누가 몰라서 못하나? 우리네 일상이라는 게 내면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다하고 나면 내 시간을 가질 틈도 없이 지치고 피곤해 잠에 빠진다. 얼마나 건강해야 하루에 그걸 다 하고 살 수 있을까? 내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책을 덮은 건, ‘스피노자’의 논리, 정신이 신체와 사물의 변용을 지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말을 비틀어서, 몸의 욕망에 기울여야 세상의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지만, 그 소리는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인정 투쟁인 코나투스(conatus)이다. 결국 ‘스피노자’의 철학을 자기 합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관념과 사물 혹은 정신과 육체(욕망)를 역학 관계나 상호 이해관계로 풀면서도, 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선 치밀하게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은 그것이 얼마나 좁혀졌고 넓어졌나에 따라 달라지는데 말이다. 예를 들면, 지금 나와 같은 상황이다. 나는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아이와 중고 서점에 왔다. 애석하게도 아이가 바꿔 입고 온 옷을 돌려주기 위해 즐길 새도 없이 다시 가야 한다. 머리론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면서도 마음속으론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 여건이 만만치 않으니 아이의 실수를 다독일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좀 더 있고 싶은 욕망이 현 상황을 납득하려 들지 않는다. 뿔난 마음을 잠재우고 또 다른 대안-다시 올 수 있다는-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 내키는 대로 고집할 수 없다. 이럴 바엔, 지금으로선 욕망이든 상황이든 과감히 포기하고 비우는 게 낫다. 이성이나 감정, 어느 한 편에 힘을 실으면 나머지 반대편이 치고 올라온다. 그런 쳇바퀴 같은 의문 속에선 무얼 원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오히려 관계에 따른 선택을 포기하기로 한다. 이미 답은 정해졌다. 일단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양심상 잃어버린 아이에게 옷을 돌려주는 게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녀가 돌아가고 싶어 한다. 자신의 옷을 찾겠다고 한다. 그 작은 마음에서도 실수를 책임지고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번 기회에 꼼꼼히 자기 물건 챙기는 법을 알게 됐으니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값진 비용을 치른 셈이다. 자신과 엄마의 소중한 추억을 고스란히 지불한. 그러자, 나는 여태껏 정신이 육체를 지각하거나, 욕망이 내면을 이끈다는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관계성에 집착하느라 이론과 삶 사이의 괴리에 꽂혔던 것이다. 논리적으로 그렇더라도, 현실은 그렇게 이분법적이지 않은데. 삶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욕망으로 살아갈 수 없고 합리적인 잣대로 무 자르듯 판단할 수 없는데. 그냥 사랑하는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 들자 싫고 좋은 문제가 사라진다. 이성과 욕망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머리는 알아서 숙여졌고 마음은 저절로 열린다. 아이에 대한 이해심과 그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역지사지가 비집고 나와 어우러지고 도약하려는 감수성이 된다. 감수성은 나와 적정한 시기의 평정심,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객관성으로 나간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사물의 변용이 욕망을 이끈다는, 그런 이치나 논리에 한발 물러선 지점에서 감수성이 피어난다면, 그게 한 인간의 추억 속에 영원히 회자되는 것이다. 자신과 감정을 명확히 인지할수록 신체의 모든 변용과 심상, 이치를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진다. 영원히 간직하고픈 순간이나 희열의 정점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어떤 상황과 마음에서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다면 눈요깃거리와 남들의 입김에 크게 흔들지 않는다. 치우치지 않는 건 감수성 때문이다. 실수나 감정의 골로 대치하는 대신 화합하거나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딸은 자기 물건을 소중히 챙겨야하는 교훈을, 나는 상황과 욕망이 어긋나더라도 섣부른 짜증보단 한숨 고르기에 도달한 셈이다. 뜻밖의 감수성은 마음과 머리, 정신과 현실을 아우르기도 한다. 썩 내키지 않지만 한편으론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참지 못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똑같은 수학 문제를 몇 번이고 틀리는 행위에 대해 이성을 잃었고 감성에 내맡기기 전에
감정적으로 휘말린 것이죠.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운운하던 관조의 미학이 무의미해진 대신
순간적인 화(욕망)에 휘둘린 심리 상태가 되었습니다. 몇 분 뒤 어김없이 후회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혀져 휘발됩니다.
실수나 잘못을 되새기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다면, 하지 말아야겠죠.
기억할 수 없는 건 되도록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