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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Dec 14. 2017

민감과 자신만만 사이

<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서 숨어 지낸다>를 읽었다. 이런 류에 관심이 가는 건 범죄의 싹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서성이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이 혹시나 해서 ‘성범죄자 알림 어플’을 깔았더니 주변에 열대여섯 명이라는 걸 확인했단다. 그 말을 들은 후 더욱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동네 곳곳에 행적이 미심쩍거나 모른 이가 은근슬쩍 미소를 지어도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 옆의 빌라에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경찰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정말 누구 말마따나 보호 감시를 받아야 하는 인물이 살고 있는 걸까? 얼굴이나 행동만으론 어떤 류의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일수록 흉악범 티를 팍팍 내거나 대놓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두렵다. 우리 대부분은 무방비 상태로 돌아다니니까. 잠깐 볼일 보고 들어오다가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어둑어둑한 골목을 걷게 될 때 누군가를 마주치거나 뒤쫓음을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홧김에 둔기를 휘두르는 묻지 마 범죄라도 일어날까 하는 섣부른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실 이걸 읽음으로써 기대하는 건 범죄자를 단번에 알아챌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몸이나 가족에게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겠지. 혹은 주위에 그럴만한 사람을 골라내고 미리 피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첫 장부터 무참히 깨진다. 범죄 심리학자와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인 저자들은 일반인과 범죄자의 외형적 차이는 거의 없을뿐더러 돌변할 조짐조차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범죄자 중에 인상 좋은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예로 들고 있는 일탈적 성적 환상을 갖고 있어 4명의 부인과 다수의 애인을 가졌던 사이코패스나 13년 이상을 복역하고 우발적 범죄를 저질렀던 소시오패스의 경우도 남성적이고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단다. 그래서, 의심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그들의 유혹, 이를테면 멋진 차를 끌고 나타나 드라이브하자는 제안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혹시나 혹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다가 예상치 못한 일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출근 시간에 지각할까 택시를 잡으려 했는데 내 앞에 외제차 한 대가 섰다. 한 남자가 자긴 광화문까지 가는데 같은 길이라면 태워주겠다는 식이었다. 내가 외면하자 한층 더 은밀하고 집요하게 접근했다. 내 가 이상형이어서 그러는 거니 회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그때,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럴듯한 외모에 감춘 멍한, 비약일 수 있으나 약에 취한 듯한 표정 속에 번뜩이는 눈동자 혹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을 것 같은 날카롭고 음흉한 눈매였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한기가 등골부터 퍼져나갔다. 그때 어떻게 해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지금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순간적인 육감으로도 분명 예사롭지 않은 구석을 느꼈던 것이다. 



상에서 범죄의 가능성과 닿는 면적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을 장식한다. 그런 것에 노출될수록 낯선 사람이 두려워진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타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애석하게도 산타할아버지처럼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가려내기 쉽지 않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듯 스스로 단단히 할 수밖에 없다. 범죄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단 사실은 호기심을 심적 부담감으로 바꿔놓았다. 그래서일까? 범행과 그것을 일으킨 동기에 관한 분석을 읽는 것으로도 그 사례가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했던지 심호흡 하기를 수 차례였다. 그걸 견디고 도달한 결론은 범죄자란 특이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란 점이다. 입원이나 수술로 고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라, 어떤 기술의 발달로도 치료제조차 기약할 수 없는 상태다. 그 바이러스는 몇 가지로 규정된다. 일종의 정신질환을 갖고 대뇌피질의 감각 능력이 정상인보다 떨어지는 사이코패스와 반사회성 성격 장애로 불리는 소시오패스, 호시탐탐 유린할 대상을 노리는 성범죄, 망각과 환상에 시달리는 정신분열이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억압을 누리지 못하고 분노 조절에 실패하는 충동 조절 장애와, 불신과 의심 속에서 회피, 집착, 충동적인 각종 성격 장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분노를 폭발하는 묻지마 폭행도 있다. 여기에도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억압받는 현실에 놓여 있거나 불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불안감이 평생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잘못된 인격 형성으로 이어지고 자신의 불행처럼 타인이 당하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범행의 순간 죄책감을 카타르시스와 맞바꾼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그들의 어린 시절을 동정하고 연민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그들과 같은 시작점에서 다른 갈림길을 선택한 이들도 많다. 말 안 듣고 말썽 피우던 아이가 폭력으로 제압되는 대신 믿어주는 이들의 설득으로 개과천선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업보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가족에게 헌신하는 예도 있다. 영화 <나쵸 리브레>의 실화 격인 멕시코 신부 '세르지오 구티에레스’처럼,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복면을 쓰고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포자기 대신 작은 희망의 불씨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다가올 미래는 극복의 문제니까. 



죄자에게 연민할 수 없고 동떨어진 인간 군상이라 생각할수록 나는 해당 사항 없다고 안심한다. 그 틈을 타고 이기적인 생각도 파고든다. 나와 내 가족이 정상이라면 어떤 상황이든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저자의 말마따나 일반인과 범죄자의 차이는 순간적인 자제력이니까.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전혀 범죄와 연관될 일이 없다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극단적인 예가 떠오른다. 평범한 여자가 자신의 우는 아이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이를 낳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산후우울증이라면 충만한 모성애를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단 말인가? 모성애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과 관련 깊다. 그것이 자신의 혈육에 대한 감정적 변화를 유발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근거만큼 영향을 주는 것이 후천적 사회화된 성격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이는 그만큼 타자에게 베풀려고 한다. 만약 그 반대의 경우라면 호르몬이 영향을 미치기도 전에 다른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 남편의 무시와 관심 부족, 사랑에 대한 갈망이 일시적인 성격 장애로 나타나 스스로를 억압하고 삐뚤게 만들 수 있다. 그 순간의 선택이 엄청난 일로 직결된다. 한 끗 차이로 조절 능력을 상실해 얼토당토않게 범죄로 이어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버린다. 일반적인 상황과 평탄한 일상이었다면 참고 자제하며 극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늘 예상되거나 평탄한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은 만약 예기치 못한 처지에 놓여도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끌고 간다. 문뜩 <우리는 달려간다(‘박성원’著)>에 실렸던 ‘긴급피난’의 스토리가 생각났다. 눈 속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외딴집에 갇힌 주인공은 자신을 구한 남자가 사라지자 그의 범죄를 고대로 물려받게 됐다. 피해자인 여자가 전자를 후자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고로 피까지 흘렸는데 누가 그의 말을 믿을 것이며 정당방위라고 인정해줄까? 설상가상으로 빠져나가 구조 신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 속에 갇혀 있다. 결국 믿을 구석은 급박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떤 행위도 면책된다는 긴급피난의 법령이다. 그걸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 도덕적인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의 나로선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죄에 휘말리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하는 건 그만큼 나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그동안 어떻게든 조절하고 자제하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겪은 적 없는 극한적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절제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완전히 믿거나 신뢰한다는 건 비약적이다. 차라리 어떻게든 정신 똑바로 차리겠다는 말이 낫다. 왜냐하면, 불안과 충동, 과시나 허세, 약간의 대인 기피와 의심 같은 성격 장애적 기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론 연인과의 이별이나 가족과의 마찰, 혹은 크고 작은 실패로 인해 누군가와 무엇을 회피하고 다시 일어나겠다는 강박 관념으로 집착할 때가 있다. 나도 한때 방황으로 부모 속을 썩인 적 있었다. 밑이 보이지 않는 해저 이 만리 속을 허우적대면서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어둡고 불확실한 방황을 끝내겠다는 믿음이 부력처럼 나 자신을 수면 위로 띄웠다. 어떻게든 견디고 겪어 내야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일탈과 일상 사이에는 원상 복구의 믿음이 깔려 있다. 그건 순전히 내적인 문제이므로 확신할 수 있다. 거기에 외적인 문제, 예기치 못한 상황이란 변수가 끼면 달라진다. 그 속에도 의지라는 상수를 내세워 절대 불변의 정의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범죄의 가능성이란 변수와 정의로운 의지란 상수 사이에는 민감과 자신만만이 있다. 누군가 해코지할까 벌벌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호기를 부린다. 그 양측 사이를 줄자처럼 정확히 잴 수 있는 도구도 없다. 그때그때마다 다른다. 과연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 한 번이라도 어려움을 겪어본 이라면 낯선 상황에 놓이지 않길 바란다. 평탄이 주는 행복에 감사한다. 그러고 보면, 일상은 평온한 듯 보이나 드문드문 살얼음판이기도 하다.






‘모든 열광 뒤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그 함정을 조심하라. 어쩌면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
  - <우리는 달려간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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