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이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마음대로 안되네요.”
딸의 친구 엄마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말인즉슨 이랬다. 친정엄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모임을 했었다. 엄마는 얼마 전 담근 오이지를 자식에게 주려고 락앤락 통에 나눠 놓았다. 딸들은 알아서 챙겼지만 아들은 깜박 잊어버렸다. 엄마가 시간 날 때 가져가라는 전화 했다. '네 어머니'라고 했던 며느리 대신 그다음 날 찾아온 건 아들이었다. 동창 모임으로 근처에 온 김에 오이지를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술 마시러 가는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들고 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커다란 배낭에 꾹꾹 담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섰다. 때마침 목격한 누나, 그러니까 지인은 한심해서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올케와 전화하려던 차 친정엄마의 만류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단다. 격분이 가시질 않는 그녀는 덧붙였다.
“내가 이상한 거야?”
나는 아니라고 했다. 서운할 만했다. 남동생, 올케 둘 다 생각이 짧았다. 시댁 근처에 간다고 술 마시러 가는 남편에게 무거운 걸 가지고 오라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 더군다나 차도 없이 밤늦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말이다. 남동생도 그렇다. 그런 행동은 기특한 게 아니라 아내에게 돌아갈 험담이란 걸 왜 몰랐을까? 자연스럽게 내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얼마 전 부산에 사는 남동생 아들이 돌이어서 가족 모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아침부터 서두른 탓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고 약속시간까지 두 시간 이상 남았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데 때마침 친정부모님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남동생 네로 들어갔다. 올케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식탁 위 노트북에 집중했다. 남동생은 씻느라 인기척도 없었다. 아이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가가 낯선 듯 징징댔고 도우미 아줌마가 달래기 위해 얼른 데려갔다. 거실엔 서울에서 내려온 가족만이 이방인처럼 남겨져 있었다. 어색한 기운에 어찌할 바 몰랐던 우리는 각자 편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소파와 매트 위에 앉거나 혹은 거대한 창 밖을 바라봤다. 드디어 욕실에서 나온 남동생은 회의 들어가기 직전의 비즈니스맨 같은 손 인사를 건네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애매모호한 분위기에서 눈치를 보다가 뷔페로 이동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들은 사진 동영상을 편집하느라, 아이를 씻기고 잔치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심정을 십분 이해했기에 누구도 타박하지 못했다. 그래도 남편은 내심 걸렸던 모양이다. 뒤늦게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처남과 처남댁은 참 눈치가 없더라고.
어쩌면 지인과 내 이야기가 구태의연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한국 사회에선 평범한 사람도 시월드에 들어가면 변질되는 것 같다. 시누이와 올케 사이는 대체로 타박하고 구박받는 판에 박힌 온도 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 대기업의 사모님과 두 딸이 자행해온 것과 그걸 묵묵히 견뎌야 했던 무고한 직원들의 구도 같기도 하다. 상당수 왜곡된 드라마 속 구태의연한 이미지였다. 나는 그동안 그 ‘시’ 자가 싫어서 시누이길 회피해왔다. 왜냐하면 그런 류를 증오하니까. 나 역시 한 집안의 며느리이자 올케였다. 괜찮은 시댁이지만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관절염처럼 지근거리는 부담감을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나에게 남동생이 있고 그가 한 가정을 꾸리는 한 시누이라는 자격을 피할 순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편하게 지내자고 말했다. 내가 올케 집에 가도 내 일 네 일 할 것 없이 거들었다. 반대로 우리 집에 묵을 경우 설거지 하나 시키지 않았다. 다르게 살아온 시간과 환경을 허물려고 양보하고 배려했다. 이번 일도 그랬다. 남동생과 올케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려 했다. 정신없었을 테니 하고 넘어갔다. 버르장머리 없는 족속은 아니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렇지만 그게 본질을 흐린다. 그 믿음으로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두리뭉실하게 희석된다. 남동생 부부는 가끔 당황스러운 행동을 한다. 잠깐만 하고 한 명씩 사라지더니 몇 시간 후에 들어온다 던가(묻지 않으면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는다). 올케가 뭐 좀 하려면 남동생이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던가(아이가 어리니 이해하지만 보란 듯이 나서는 건 얄밉다).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그들의 성격 탓인가? 아니다. 누군가 더 베풀기 때문이다. 손윗사람인 내가 이해하고 말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야박한 게 싫은 시누이는 받아주고 믿는 구석이 있는 올케는 이 정도만 하게 된다. 사람 관계가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말해준다. 깐깐한 시어머니를 겪어야 하는 며느리는 주눅 들기 마련이다. 반대로 풀어주는 시어머니에게 제멋대로인 며느리가 짝을 이룬다. 일종의 기싸움이다. 누군가 우선권이 생기면 상대방은 끌려 다닌다. 문제는 기선 제압하면 상대의 서운함이나 부당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남동생과 올케들이 알았다면 그렇게 행동했을까? 지인의 올케는 주말에 들리겠다고 설명하면 될 것을 굳이 차도 없이 술 마시러 간 남편에게 부탁해야 했을까? 그걸 본 시어머니가 속상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할까? 만약 자신의 친정엄마가 겪은 일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또 내 남동생과 올케는 돌잔치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양해를 구할 순 없었을까? 멀리서 온 가족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을까? 왜 자신의 처지만 알지 상대의 입장을 몰랐을까?
내가 바랬던 건 뒤늦게라도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땐 정신없었다고. 내가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을 때 사실 기대했었다. 그러나 남동생은 멋없게 ‘응’이란 한마디로 응수했다. 그나마 올케가 다정다감하게 문자를 보냈다. 고생 많았고 고마웠다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논리는 포용할수록 지는 게임이다. 누가 먼저 배려하면 상대는 점점 당연해진다. 한 번은 전자가 다음번엔 후자가 돌아가면서 하면 좋겠지만 무 자르듯 정확하게 나눌 수 없다. 후자가 무지하거나 모른척할수록 전자는 그걸 채우기 위해 자신의 쌈짓돈까지 꺼내야 할지 모른다. 수평을 맞추려고 수십 번 저울질하는 건 전자의 몫이다. 한쪽이 내주어 맞추는 건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즉 좋은 게 좋다는 건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균형이란 기대할 수 없다. 야속하면 차라리 일정의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낫다. 경우에 따라 눈치 작전이나 밀당하는 게 속 편하다. 어디 가족 사이에 가당한 말인가? 그래서 말하고 싶은 건 이렇다. 어떤 사이라도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기선을 잡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의 입장과 의중을 헤아리는 것이다. 배려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훈련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습관처럼 나올 때까지. 예를 들면 이렇다. 친정엄마가 시집간 딸네 집에 와서 음식을 해준다. 대부분의 딸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엄마 음식이 먹고 싶을 테니까. 허나 늙은 엄마도 해주고 싶은 마음 반 힘든 게 반이다. 딸은 그 후자를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모처럼 놀러 왔는데 아이들과 시간 보내고 푹 쉬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내가 엄마에게 솜씨 자랑 좀 해야지. 이런 게 배려가 아닐까? 나는 배려가 근육처럼 키우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아침에 습득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실천하면서 내성이 생긴다. 저절로 상대방을 헤아리는 법을 터득한다. 굳이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뭐라고 할 거야?”
“알아들어야 말하지. 그냥 ‘모지리’라고 통칭하기로 했어요.”
지인의 결론은 이랬다. 그들은 알까? 알았다면 그렇게 못했겠지. 문제는 정작 당사자가 모른다는 사실이다. 자기합리화로 일관된 행동이 어떤 섭섭함을 선사했는지. 허심탄회하게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까? 자기가 똑같이 당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치사하게 복수를 계획할 순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내 결론은 이랬다. 앞으론 내가 불편한 배려를 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친정 가서 올케 대신 설거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길 때-갑자기 거금이 필요하거나 아빠가 쓰러지는 일 같은- 멀리 산다고 막내라고 열외 시켰는데 더 이상 그러지 않겠다. 나도 실속을 차려야겠다. 인정커녕 상처로 돌아오는 좋은 게 좋다는 논리와 절교를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