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 오메가 라비린스Z
세상의 모든 창작자는 일종의 이야기꾼이다.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글로, 때로는 음악으로, 또는 그림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 오래전부터 콘텐츠는 창작자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로 활용되어 왔다. 혹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콘텐츠를 완성하는 과정을 '산통'에 비유한다. 그만큼 창작자가 세상에 내놓은 콘텐츠는 핏줄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되도록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창작자는 관객을 이해시키고 더 나아가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야기 속에 다양한 장치를 설치한다.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된 수많은 이야기의 장치들 중에 가장 보편적인 건 ‘개연성’이 아닐까. 짧은 연설에도 적절한 근거가 필요하듯 이야기 역시 그렇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캐릭터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도 개연성이 필요하다. 이런 개연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작품들에 대해 우리는 공감하지 못하고, 낮은 별점을 준다. 차라리 밑도 끝도 없이 재미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은 창작자에게 오점으로 남는다.
창작자에게 오점으로 남는 작품. 최근 그런 영화들이 몇몇 있었고 박훈정 감독의 <VIP>도 그런 작품으로 갈무리되는 듯하다. 전작 <신세계>를 능가하는 인상을 남기리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뜻밖의 관문을 맞닥뜨린 것이다. 그 관문에는 박훈정 감독의, 즉 창작자의 여성관을 묻는 질문이 새겨져 있다.
<VIP>는 ‘여성 혐오’ 영화로 규정됐다. 작품 초반부, 스크린을 가득 메운 김광일 일당의 살해 장면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극중 김광일은 변태성 짙은 연쇄 살인마로 등장하는데, 캐릭터성을 감안해도 꽤 노골적인 연출을 거듭한다. 카메라는 마치 김광일의 악행을 낱낱이 기록하겠다는 듯 담담하게 살해 장면을 비추지만 그 시선 역시 썩 개운하지는 않다. 불쾌한 이미지를 영화 도입부에 배치하고 그 울렁거림을 발판 삼아 러닝 타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박훈정 감독의 스타일이기는 하나, <VIP>의 초반 연출은 속이 역한 정도를 넘어선다.
잔혹한 장면을 견뎌낸 후에는 크게 동요할 만한 지점이 없다. 숱하게 학습해온, 누아르 장르 클리셰의 향연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권력을 등에 업은 사이코패스와 각자의 이유로 그를 쫓는 인물들의 추격전을 메마른 색감으로 담아내고, 이따금 긴장감을 더하기 위한 폭력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범죄 누아르 영화가 늘 그렇듯, 모종의 이유로 정의롭지 않은 선택을 하는 공권력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정의롭지 않은 공권력’의 표상으로 국정원 요원 박재혁을 내세운 건, 최근 실제 국정원이 적폐의 본산으로 지목되는 경향을 의식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근래의 ‘페미니즘’ 트렌드는 민감하게 헤아리지 못한 듯하다. 강렬한 연출을 김광일이라는 캐릭터가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 탓일까. 영화는 시종일관 급박하게 전개되지만, 상영관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초반 살해 장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많은 관객들은 이 개운치 않은 감정의 원인으로 박훈정 감독의 여성관을 지목한다. <악마를 보았다>와 <신세계> 등 그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던 영화들은 하나같이 여성을 피해자로, 또는 영화적 장치로만 활용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젠더 감수성’이 섬세하지 않아 그런 일련의 연출에 문제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참 묘하다. 박훈정 감독의 여성관이 비난받는 동안, 공교롭게도 게임 씬에는 노골적인 여성 대상화 타이틀이 정식 발매됐다. H2인터랙티브의 <오메가 라비린스 Z>라는 작품으로, 타이틀 디자인부터 기획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정도라면 <VIP>보다 더 거센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터다. 하지만 <오메가 라비린스 Z> 창작자의 여성관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분명 동시대,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작품임에도 관객의 온도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일까.
냉정하게 말해 <VIP>과 <오메가 라비린스 Z>는 체급부터 다르다. <VIP>는 대중적으로 흥행한 영화를 만든 감독의 후속작이고, 배우 캐스팅도 화려하다. 이에 반해 <오메가 라비린스 Z>는 지극히 한정된 유저층에게만 통하는 마이너 장르 게임이다. 되려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셈이다.
<오메가 라비린스 Z>는 미소녀게임이다. 거기에 로그라이크 방식을 더해 나름 SRPG 요소가 있음을 강조한다. 거칠게 말해 로그라이크 게임으로서의 재미는 처참한 수준이다. 이런 게임에 <섬란카구라> 정도의 완성도를 기대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전투 시스템이며 아이템과 던전 디자인까지 어느 하나 괜찮은 부분이 없다. 다양한 퍼즐을 풀며 던전을 클리어하는 전략성, 캐릭터 육성의 재미를 부각시키는 타 로그라이크 작품과는 달리 랜덤 요소에만 기대 게임적 재미를 만들어내려 한다. 그저 허울 좋은 SRPG로 마케팅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냥 본래의 목적에 집중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설정과 스토리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겨누고 있다. 미소녀 캐릭터를 최대한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여학교 배경과 맥락 없이 등장하는 던전 안 온천, 아이템을 감정하는 방법까지도 일관적이다. 연출과 조작도 시종일관 유사 성행위를 연상시키는데, 차라리 이 부분은 참신하기라도 하다. 어떻게 보면 기획 의도에 충실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당연히 <오메가 라비린스 Z>에는 여성에 대한 존중도, <VIP> 박훈정 감독이 매달렸던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게임이 ‘존재해서는 안 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개연성은 창작자를 옥죄는 목줄이다. 이제는 사상을 검증하는 도구로도 쓰인다. 그러나 이야기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방법에 잘못된 것이란 없다. 적정 수준은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오메가 라비린스 Z>는 개연성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난다. 애초에 개연성이 필요하지 않은 작품이니까.
하지만 <VIP> 박훈정 감독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물론 살해 장면을 극 초반에 배치한 의도는 이해가 된다. 김광일이 단순한 잡범이었다면 경찰과 국정원 요원, 그리고 북한 보위부 요원까지 이 긴 추격전에 뛰어들지 않을 테니까.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미친놈’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모든 캐릭터가 개연성이라는 고리 안에 묶인다. 애초에 박훈정 감독은 소재의 참신함보다는 캐릭터의 매력으로 작품을 끌고 가는 스타일이라 이런 계산이 저변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김광일이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할애한 시간은 개연성 형성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VIP>에 등장하는 그 어떤 캐릭터도 전작 <신세계>의 인물들을 넘지 못했으니까. 슬프게도 <VIP>의 러닝 타임이 끝난 후에는 어떤 캐릭터도 뇌리에 남지 않는다. 되려 논란거리만 남겼을 뿐. 작금의 VIP를 둘러싼 논란은 바로, 이 ‘개연성’의 과잉이 불러온 것에 다름없다. 정확히 말하면 창작자가 개연성에 집착해 선을 넘은 상황이 됐다.
이것은 명백히 감독의 판단 미스다. <VIP>를 볼 관객의 경향을 고려하지 못한 것 말이다. 박훈정 감독 역시 “제 전작들을 보면 알겠지만 여성에 대한 이해도가 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이번 논란을 겪으며 이해도가 떨어지는 게 아닌, 여성에 대해 내가 아예 무지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창작자로서 문제가 있다는 근거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창작자에게 편향은 존재할 수 있다. 장르를 선택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맞고 틀림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쉬운 점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되, 모든 창작자가 동일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종용은 피해야 한다. 그래야만 여러 갈래의 콘텐츠가 뿌리내릴 수 있으므로. 21세기, 2017년에 <VIP>와 <오메가 라비린스 Z>가 공존하듯 말이다.
* 이 글은 게임 전문 매체 <게임어바웃>의 비정기 연재 코너 '패드앤팝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