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은 왜 타이맥스 캠퍼를 차고 있을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유독 시계가 자주 눈에 띄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그가 시계에 대해 꽤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올드보이'나 '헤어질 결심'같은 영화에서는 시간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했었지만, 영화마다 꼭 한 번씩 들어가는 시계 클로즈업으로 보아 시간에 대한 철학적 메타포만으로 해석하기엔 좀 과하다고 보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시계를 좋아하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시계 쪽으로 시선이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선 다른 미장센을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시계까지 살펴보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친절하게 한 번씩 클로즈업을 잡아줘서 마니아로서는 고마운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번 신작 '어쩔수가없다'에서 주인공 이병헌이 차고 나온 시계는 어떤 시계일까? 바로 타이맥스 사의 '캠퍼'라는 시계였다. 미장센 까다롭기로 유명한 감독이기에 왜 '캠퍼'를 선택했을까가 궁금해졌다.
시계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인물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 등을 상징하는 지표로 사용되곤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병헌)은 넓은 마당을 가진 이층 양옥집에서 매우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전문직 중산층으로 등장한다. 그가 경쟁자라 여기는 이성민은 고급 오디오 시스템으로 음악을 즐기고, 박희순은 별장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는 생활을 한다. 즉, 이들 그룹은 일상에서 여유와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이라는 설정이다.
헌데 그 정도 경제력을 가진 인물이 차고 있는 시계가 캠퍼라.. 캠퍼는 현재 시중에서 10만 원대에 구매할 수 있는 저렴한 필드워치다. 박찬욱 감독은 왜 캠퍼를 택했을까?
잠시 원작을 살펴보자. 2005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주인공은 IWC Mark15를 차고 있다. 1999년에 출시되어 6년간 많은 인기를 끌었던 이 시계는 톰 크루즈의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등장했다. 실제로도 비싼 고급 시계이고 많은 영화 속에서 부유한 캐릭터가 차고 나오는 시계였다. 마크 15를 차고 다니는 주인공이 좌충우돌하는 원작의 경우 '아.. 주인공이 잘 먹고 잘살다가 바닥을 치는구나.'라는 상황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부유한 주인공이 캠퍼를 차고 나온다면? 생각이 좀 복잡해진다. 주인공이 야외 활동을 즐기는 캐릭터인가? 사치재를 싫어하는 실리주의자 설정인가?
생각이 많아질 무렵 주인공 이병헌이 한 대사를 내뱉는다. "지금 우리 가족은 전쟁 중이야."
아.. 여기서 무언가 실마리가 풀린다. "전쟁"
주인공은 생존을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도시 속에서 홀로 외로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아.. 그렇구나. 그는 현대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군인이고 그의 손목에는 전투용 시계가 올라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캠퍼의 히스토리를 잠시 살펴보자.
베트남전 세대의 어르신들이 많이 사용하던 표현 중에 '달러시계'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베트남 전 PX에서 1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던 저렴한 전투용 필드워치를 의미한다. 당시 타이맥스에선 달러워치를 만들어서 PX에 공급했었고, 그 시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80년대 초 '캠퍼'가 탄생한 것이다.
몇 년 전 배우 공효진이 애용하여 유명해졌고 요즘은 여성들도 캠퍼 디자인을 좋아하지만 원래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전투형 필드워치의 전형이 바로 타이맥스 캠퍼다.
캠퍼가 최초 출시되었던 80년대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시대의 아이콘이 있는데 바로 맥가이버다. 맥가이버는 주변 잡동사니를 이용하여 많은 난관을 헤쳐나가곤 했었는데 드라마 속 그가 착용했던 시계도 캠퍼였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맥가이버가 시계 유리를 열고 초침에 전선을 연결하여 사제 시한폭탄을 만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날 정도로 캠퍼는 캐릭터 구축에 있어서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렇다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맥가이버와 어쩔수가없다 주인공의 공통점은?
1. 캠퍼
2. 생존
맥가이버 하면 떠오르는 단어 역시 '생존'이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80년대 베어 그릴스같은 존재였다.
하나의 시계가 4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맥가이버와 ‘어쩔수가없다’ 주인공을 연결시키다니, 이런 지점이 시계의 히스토리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두 영화의 교집합을 보며 ‘캠퍼는 생존을 위해 전쟁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도시인에게 적합한 시계일까?라는 싱거운 생각도 해보았다.
원작 ‘액스’에서는 시계가 인물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한 일차원적 소품으로 사용된 반면, ‘어쩔수가없다’에선 인물이 처한 위기를 극복해 가는 의지를 보여주는 장치로서 심층적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고 본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은 캠퍼를 통해 ‘시간을 견뎌 살아남은 한 인간’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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