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을 자각하다
드디어 휴직의 절차가 마무리되었고 무려 14년 간의 회사 생활을 일단락했다.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갔던 미국 유학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당시 취업 활동에 대해 1도 모른 채 꼴랑 4개 회사에 지원을 하고 면접의 기본인 자기소개조차 준비하지 않은 입사 시험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준비를 할 때만 해도 전공인 화학과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지만 밑천이 그것밖에 없으니 결국 전자회사에서 몇 안 되는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취업이 간절했고 회사 특히 조직에 대해 뭣도 모를 때이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 받아들였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뭔가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일을 시작했을 때는 근무지가 지방이라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것 또한 일종의 경험이라 생각했고 저 연차 시절엔 일하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성취감도 있었고 나름 인정도 받았으니까.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꽃길만 가득할 줄 알았던 패기 넘치던 나는 결국 너덜너덜 해진 채 휴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휴직의 이유에 대해서는 백만 가지도 더 나열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지쳤다는 것을 자각한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결국 육체적/정신적으로 서서히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초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마인드그래프」라는 매거진에 실린 칼럼의 번아웃에 대한 정의를 보고 머리를 맞은 듯 깨달음을 얻었다. "번아웃의 세 가지 큰 축이 정서적 소진, 냉소(비인간화), 직업 효능감 저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이 중 냉소(비인간화)에 대한 부분이 번아웃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나는 이 글을 보는 것만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 관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도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도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나는 이것에 대해 피곤함을 넘어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냥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만으로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방어막을 작동시켰고, 아마 상대방은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이 부분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인데 모든 것이 나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라 번아웃 때문이라니! 그래 나는 원래 천상 E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또 하나 휴직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올해 초 받은 수술이었다. 작년 말 갑자기 코피가 나고 멈추지 않아 응급실까지 다녀온 후 원인을 모르다가 한 달 만에 코 안에 혹이 있다는 진단과 다양한 검사 후 수술을 받았다. (간단히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이 과정은 거의 4달이 걸렸고, 피를 말렸으며 숨을 쉬지 못해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다양한 증상으로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다행히 악성은 아닌 혈관종으로 결과가 나왔지만 이미 심신이 너덜너덜한 상태였던 나는 이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이 뭔 의미가 있나 심각하게 생각했다. 사실 지금 당장 내게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먹고사는데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의 내가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나를 희생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런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쉬면서 나를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해야 하는 사람도 나, 모든 지지를 보내는 사람도 나 그리고 가장 아껴주어야 하는 사람도 나인데 회사에 다니는 14년 동안 같지도 않은 인간들 때문에 나는 나를 의심하고 힘들게 해왔다. 그리고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가스라이팅과 과거에 대한 집착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속에 있는 한 악순환을 끊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도망을 택했다. 휴직 전 동병상련의 감정을 나누었다고 생각한 동료에게 비겁하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이 있고 나의 자의적 해석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겠지만)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었고 그땐 발끈했지만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나 도망가는 거 맞다. 근데 계란으로 바위 쳐서 깨질 바에는 그냥 도망가서 계란을 지키고 그것으로 요리해서 맛있게 먹는 게 나를 위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를 좀먹는 벌레들을 다 없앨 수 없다면 그 벌레들의 서식지에서 내가 다른 깨끗한 곳으로 옮기는 게 맞는 방법이다.
우선 완전한 자유로 주어진 1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금은 짐작도 못 하겠다. 번아웃을 정의했던 칼럼에서 평균적으로 사람들이 번아웃을 극복하는데 6개월 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우선 어느 정도의 시간은 나를 치유하는데 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 자신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기로.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내가 중심에 있고 내가 행복한 삶. 그게 최우선이 되는 인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