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티게 하는 힘

결국은 나의 사람들, 나의 편들

by 애나

앞서 나를 갉아먹는 회사 생활(이라 쓰고 한 인간에 대한 성토)에 대해 구구절절 썼지만 만약 14년 동안 나에게 시련만 있었다면 당연히 그 긴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내가 번아웃의 심각한 상태라고 자각하게 된 것이 ‘냉소(비인간화)’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회사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준 큰 부분도 주변 동료들(사람)이었다.


나의 전공인 화학은 이과계열 중 여성비율이 높은 편이고, 따라서 남초인 전자회사에 화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야에도 여자가 많은 편이다. 빌런 상사의 활약(?)으로 여자 선배들은 별로 없었지만 내 밑으로 들어오는 후배들은 대부분 여자였고, 의지할 선배가 별로 없었던 나는 그런 후배들에게 내가 아쉬웠던 부분들을 채워주려 노력했다. 천성적으로 외향적이지만 한편 녹록하지 않은 성격의 나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공과 사를 구분했다고 생각하는데, 때로는 후배 기강 잡는다는 남자들의 뒷담화를 들었다. 다행히 후배들은 꼬인 것이 없어 우리들은 별문제 없이 지냈는데, 속도 모르고 나불대는 입들에 속상한 적도 있었지만 나름 경험한 사회라는 곳에서 꼰대들은 내가 본질은 그게 아니라고 해명해도 본인의 생각만 옳고 절대 바뀌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미 학습했기에 더 이상 나의 귀한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일을 좀 가르쳤다 싶으면 나를 비난하던 인간들은 후배들을 본인들 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본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후배들을 내 밑에 배치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들의 만행과 연차가 올라가며 쌓이는 업무들에 후배들에 대한 열정과 유대관계들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올해 초 힘들었던 시기에 한창 열정적일 때 같이 일했던 후배가 육아휴직 후 복직을 했고 오래간만에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같은 팀이지만 조금 떨어져 일하고 있는 후배는 천성적으로 책임감이 강하고 남을 잘 배려하는 성격이라 어떤 면에서는 안쓰러웠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곁에는 필연적으로 일은 안 하고 성과만 챙기려는 사람들이 달라붙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어떨지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복귀 전 후배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이 힘들다며 후배가 말했다. “회사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선배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해결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그걸 듣는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의 회사생활이 그렇게 헛되었던 것만은 아니라고.


회사에 들어와 사람 때문에 너무나 힘들다고 매일 징징거렸지만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밖의 친구들 하물며 가족들도 내가 회사에서의 힘듦을 토로해도 그걸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그들은 모든 것을 나의 입으로 통해 전해 듣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 동료들은 내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곁에서 보고 또한 본인들도 비슷한 일들을 직접 겪으니 공감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힘든 일들은 발화되고 공감받는 것 자체로 해소되는 것들이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추상적인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란 말은 결국 인간은 관계 속에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내 속을 다 모르는데 내가 타인을 다 알 수 없을뿐더러 타인의 악의 없는 행동과 말이 나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이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런 상처를 낫게 해주는 것 중 한 가지는 또 사람들이 내게 전해주는 온기였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도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는 좋은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에 대해 본인의 그릇된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살게 두면 된다. 적당히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세상에 나의 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이미 퇴사해했거나 이젠 다른 회사/부서에서 일하는 후배들과 사적인 만남을 가질 때마다, 그리고 좋은 관계를 이어오는 동료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14년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덕분에 나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을 거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

이전 09화안과 밖이 같은 사람으로 살았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