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갉아먹었던 회사 생활

그땐 몰랐던 진실, 그게 가스라이팅이었어!

by 애나

내가 휴직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크게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그래, 너는 좀 쉬어야 해'였고, 다른 한 가지는 '아깝지 않아? 좋은 회사잖아… 잠시 휴가를 내서 쉬면 되지 않아?'였다. 물론 이 반응들은 나와의 친밀도와 나의 괴로운 회사 생활에 대한 히스토리를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되거나 친한 사람들의 경우 이름도 모르고 본적 도 없지만 내가 대충 말만 꺼내도 아는 한 인간이 있다. 비교적 나쁜 일들은 잘 잊어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만 기억하는 내가 평생 생각할 때마다 분노할 한 인간.


회사에 입사 후 신입사원으로 받는 그룹/자사 연수가 끝나고 부서 배치를 받은 때부터 암운이 드리워져 있었으니… 그건 직속 상사들이었다. 무능력에 열등감과 꼰대마인드가 버무려진, 그 열등감은 일 잘하는 여자들에게 향해 있던 남자들. 그중 대부분은 퇴사하고 한 명이 남았고, 그 사람이 나의 사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사실은 그 인간의 부사수였던 여사우들이 줄줄이 퇴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지 입으로 '내 밑에 있던 여자들은 다 퇴사했잖아'를 자랑처럼(?) 말하고 다녔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 있는 자기 딸이 너무 예뻐서 다른 자식은 낳지 않겠다 결심했다는 사람이 딸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여성 차별을 일삼는 건 또 뭔지… 내가 아는 동료 중 그 사람이 퇴사 이유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사람이 최소 5명은 된다. (모두 여자)


그럼 나는 왜 그만두지 못했냐고? 그 부분은 100% 나의 탓인 거 인정한다. 나는 변화와 도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고, 어디를 가든 이상한 인간은 꼭 한 명씩 존재하는 비슷한 환경이라면 지금 있는 회사보다 월급 수준 및 복지가 좋은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내 몸과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독립된 개체인 나에게는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필요했다. 또한 중요한 건 그 인간이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는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무능하고 꼴랑 가진 것도 권력이랍시고 휘두르는 사람은 최대한 떨어져 지내면 또 그냥 살아진다. 그렇게 나는 개구리가 서서히 끓어가는 물에서 적응하여 죽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냥 내가 견디는 쪽을 택했던 거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져 이전 여사우들에게 행해지던 차별과 감정적 분풀이는 당연하게도 고스란히 나를 향했다. 무능하지만 어찌 되었든 고과권자였던 그 인간은 상사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를 업무 능력과 상관없이 저평가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말하자면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인간의 무지에 대한 논리적 반박과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 따위가 포함된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나를 포함한 여자들에 대한 본인의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을 지 분에 못 이겨 표출하는 것이었고 나를 가스라이팅 하려던 것뿐이었는데 나는 계속해서 나를 의심하고 검열했다.


지금은 연륜이 좀 쌓이고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한창이었던 30대에 그 인간 때문에 괴로워하고 시든 꽃처럼 지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분하고 원통하다. 더하여 그 인간을 향한 분노가 더더욱 높아진 것은 항상 회식 때 술 취해서 하는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그게 진심이었든 술주정이었든 미안하다는 말 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미안할 일을 하지 말던가 개선을 해 나가야지 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만 미안하다고 말하는가. 지금 생각해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 구제불능이다. 자그마치 14년이었다. 그중 조직개편으로 떨어져 살만했던 2년을 제외하고(이때 그 인간의 악행을 더욱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치유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곪아왔던 상처는 결국 나를 휴직으로 이끌었지만 막판엔 오히려 그 인간이 불쌍했다. 결국 무능함이 만천하에 드러나 알량한 권력은 없어졌고, 나뿐 아니라 엄청 많은 사람들(특히 여자들)의 원한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원망들만으로도 죽을 때 편히 눈 못 감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나를 상하게 했던 상처는 많았을 테지만 대부분 휘발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 인간의 행동은 상식과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버텨, 어차피 네가 남아, 그 사람이 먼저 없어질 거야." 결론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나가떨어진 셈이지만 뭐, 괜찮다. 이건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나의 분투니까. 만약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모든 건 당신 잘못이 아니고 너를 박해하는 사람이 이상한거라고. 우린 그런 인간과 똑같이 되지 않게 노력하자고. 나를 검열하고 괴로워하기 전에 나를 지적하는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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