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있었기에 내가 주인공이다
언젠가 사주를 봐주던 아저씨로부터 '인복이 별로 없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당시 조금 어리둥절했는데 그때까지 살면서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에 나는 인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이 말을 듣는 순간 '맞아, 난 참 인복이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든 영화든 스토리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 중 하나는 빌런들이다. 어느 날 짧은 동영상에서 이효리의 「서울체크인」이라는 프로에 나온 영화배우 구교환과 이옥섭 감독 커플의 대화를 보았다. 그중 인상 싶었던 내용은 "자신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주인공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대부분의 일들이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무언가로 맞은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던 사람을 가끔 생각하며 분노했었는데,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에 그런 빌런도 있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제까지 내 인생에 어떤 빌런들이 있었지?' 생각하는 순간 곧바로 몇몇이 떠올랐다. 슬프게도 사주아저씨의 말은 맞았다. 난 드럽게 인복 없는 사람이었어...
가장 먼 기억은 고등학교 1학년때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반에서 한 아이가 나를 인신공격하며 괴롭혔다. 일진은커녕 양아치였던 그 아이는 미술 한다고 꼴값을 덜고 다녔었는데 뭐 하나 뛰어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아이의 괴롭힘은 가끔 나를 돌아버리게 했는데(주로 언어폭력),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공부도 좀 하고 인싸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해결책이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그 아이가 타교 학생들과의 패싸움에 연루되어 강제전학을 당했던 것이다! (역시 빌런은 응당의 벌을 받는다) 그 후 대학생이 되어 오래간만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놀러 갔던 카페에서 알바하던 그 애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나쁜 마음에 갑질이라도 해줄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던 기억이 난다. 뭐랄까, 어린 마음에도 그 아이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는 대학 시절 사이코패스 선배. 갑자기 밤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데 뭔가 안 좋은 소문이 있었고, 그것으로 내가 자기 뒷담화를 하고 다닌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한 기억이 없었고(그 또한 내게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혼자 흥분해서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지금 같으면 그저 미친놈 취급하며 끊었겠지만 아직은 어리고 순진했던 나는 울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걸 들은 엄마가 화를 냈던 기억도 있다. 어쨌든 다음날 그 인간과 동기인 친한 언니와 상담하고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자기 혼자 무슨 오해가 풀렸던 건지 전날 협박이 무색하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이 일 또한 엉뚱한 곳에서 사이다 상황이 펼쳐졌는데, 그 사이코패스가 나와 별로 친하지 않던 동기와 사귀게 되었고 마침 그 동기가 나에게 꽤 호감이 있었던 것이었다. 지은 죄가 있어 그런지 그때부터 그 인간이 내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나는 유유상종이 진리라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 인간과 사귀는 동기와 가깝게 지낼 생각이 1도 없었기에 그들의 관계에 관심은커녕 얽히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의 그런 행태를 보는 것은 조금 고소했었던 것 같다.
세 번째는 유학시절 첫 해의 룸메언니 였다. 어차피 집에서는 잠만 잘거라 생각했고 혼자 사는 게 처음인지라 집세도 아끼고 외로움도 덜어보자는 생각에 룸메를 구했던 것은 정말 내 인생 가장 큰 오산이자 좋게 말하면 인생공부였다.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인격체와 함께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처음엔 영어도 못하고 여러모로 의기소침해져 있던 터라 그 언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첫 학기를 끝내고 한국에 잠시 돌아와 내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녀가 얼마나 어이없게 나를 짓뭉개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술 못 마시는 것을 타박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안 좋게 말했으며 나를 늘 자신 아래에 두려 하면서 말도 안 되는 남자에게 갔다 붙이려까지 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후 나는 180도 다른 태도를 취하고 멀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에 따라 관계는 당연히 점점 악화되었고 마지막엔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 언니에겐 나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기적이고 독불장군식의 그런 사람에겐 치가 떨린다.
그리고 마지막은 나를 가스라이팅했던 회사의 무능한 상사. 이 부분은 앞의 글들에서 여러 번 언급했기에 굳이 다시 쓰고 싶진 않다. 나의 꽃다운 30대를 지옥으로 만든 인간이자, 알고 보니 그것이 본인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은 안타깝지만... 그냥 내 운명에 꼭 있어야 했던 시련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그 XX를 용서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앞으로 어떤 심적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여전히 다른 모든 사람은 용서해도 그 인간은 죽어서도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그 인간 앞에 나타나 괴롭히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더 많은 자잘한 빌런들이 있었겠지만 크게 생각나는 사람들은 이 정도이다. 그런데 위의 4명이 나에게 괴로움을 주긴 했으나 신체적 상해를 입히거나 하진 않았으니 어떤 면에서는 이 정도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그들은 나의 인생이라는 초콜릿박스에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맛없는 초콜릿이었던 것. 그래도,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그 사람들이 행복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덧, 물론 반대로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에 잊히지 않는 빌런일 수도 있다. 가끔 내게 괴로운 일이 생길 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또는 전생에 무엇을 그리 잘못하여) 이리 고통받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완벽한 인과관계의 오류) 그렇다 해도 여전히 적어도 저 네 명의 빌런들은 불행했으면 좋겠다. 특히 마지막 사람은 꼭... <사진 출처: 영화 조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