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1도 없이 취업뽀개기
나를 갉아먹었던 회사 생활에 대해 쓰다 보니 불현듯 내가 이 회사에 어떻게 들어왔는지가 생각났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 자체였던 15년 전의 나. 근데 또 한편으로는 그랬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석사로 마친 후 귀국했던 2007년 여름, 호기롭게 '미국에서 살기 싫어, 한국에서 살 테야. 근데 더 늦으면 한국에서 자리잡기 힘드니까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자!'라며 귀국했지만 취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1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알아볼 의지도 열정도 없었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그냥 놀 팔자도 아니니 뭐든 해보자며 그해 하반기 공채 입사 지원서들을 작성하는데 뭐 이렇게 쓸게 많은 건지… 자기소개, 어린 시절, 장점/단점 등등 Reference 하나 없이 그냥 작문하듯 써 나갔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총 4개 회사에 입사 원서를 넣었고 그중 가장 큰 회사 2개의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그땐 꼴랑 4개 인지도 몰랐고 전략 같은 거 있을 리 만무했다)
다음은 인적성검사/필기시험을 보러 가야 했는데 이 또한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무슨 깡인지 뭐 어찌 되겠지 하고 갔다. 그런데 처음 보았던 S 에너지의 시험은 상상을 초월하게 어려웠다. 카테고리가 한 7개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반 이상 풀었던 게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니(그렇다, 정답률이 아니라 풀었던 문제가 반도 안되었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남은 S전자 시험은 붙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책까지 사서 공부했는데… 나는 마지막 학력이 미국 학교 졸업이라 Global 전형으로 봐야 한단다. 그땐 일반 전형은 꽤 많은 카테고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Global 전형은 영어로 된 인적성과 IQ 검사지 같은 시험이 다였다. 결국 공부했던 건 아무 소용없었다는 이야기. 근데 더 놀라운 건 둘 다 인적성시험에 붙어 면접을 보러 갔다는 거다! 특히 S전자는 내가 외국인들보다 유리했다 쳐도 S에너지는 뭐지? 어안이 벙벙한 채 어쨌든 면접을 봤다.
자, 그렇다면 이제 정신을 차리고 면접 준비는 좀 했을까? 그럴 리가… 심지어 가장 기본인 자기소개도 준비 안 하고 갔다. (이 부분에 대해 사촌 썬은 면전에 대고 '미쳤구먼'라고 말했다…) 내가 회사에 다니고 보니 S에너지는 붙을 수가 없었다. 첫째로 다른 면접자들(그들은 최소 나보다 2~3살은 어렸다)을 보니 최소 SKY에 KAIST 졸업자들이었고, 나는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도 모르는 채 면접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으니 나 같은 애 안 뽑는 게 당연했다.
반면 S 전자는 기술 면접이 내가 쓴 논문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이었고, 당연히 전자회사분들이 깊이 알 수 내용에 질문이 나에겐 기초적인 것이었다. 영어면접이야 그때가 내 인생 통틀어 영어 가장 잘할 때였으니 문제없었으나 임원면접에서 고비를 맞았다. 나는 동일 전공 석사를 2개 가진(게다가 그중 하나는 외국에서 받은) 나이 든 여자였으니 평범한 경력은 아니었을 거다. 면접에 들어가서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앉아있는데 1분 자기소개를 하란다. 조금 당황하고 준비한 거 없었지만 그냥 말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답변하는데 어떤 임원 한 분이 왜 박사 그만두고 왔냐고 계속 물고 늘어지는데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신껏 미국에서 살기 싫었고, 한국에서 자리 잡으려면 박사 받고 들어오면 여자 나이로 너무 늦고 블라블라… 게다가 그 임원분 목소리도 작고 웅얼웅얼하는 말투라 계속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라고 말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아마도 압박 면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땐 그런 생각도 못했다) 역시 여기도 망했구나… 생각하며 마지막 토론 면접을 보는데 하필 주제가 양심적 병역거부였다. 무슨 말을 하든 여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군대 얘기!! 면접을 함께 보는 조원들은 토론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웃으며 '우리 서로 공격은 하지 말아요' 하며 좋게 얘기했는데 남자 한 사람이 나의 말꼬리를 잡네? 욱했던 나는 최대한 논리적으로 열심히 반박했을 거다. 그렇게 다 끝나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있었는데 합격했다. 그땐 거기가 어떤 소굴인지 몰랐지만 취업이라는 퀘스트를 하나 해결했고 뭐든 이제 경제적으로 자립한다며 안도했었다.
내가 얼마나 무모하게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합격했는지 깨달은 것은 입사 후 그룹 연수를 갔을 때였다. 조원들이 나의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초단위로 지적하고, 자기계발서 따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나의 말에 뜨악해하며 취업 준비 트렌드(?)에 대해 얘기해주었을 때야 현실을 좀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냥 내가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회사와 여러 사회를 겪어본 후 내린 결론은 그건 그냥 단순한 운이 아니라 내가 틀에 박힌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