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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n 28. 2022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계약커플

1997년 설 연휴 마지막 날에 생긴 일

20살 무렵, 그때 난 우울증 초기였다. 대학생이 된 뒤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고등학교 때처럼 이렇게 행동해야 모범생이라는 기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공부도 하기 싫었다. 시간은 남아돌아 주체할 수 없었다.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질 않아 학점은 선동열 방어율(1점대) 보다 더 낮았다. 학교 방송국 PD 역할만이 그땐 내 전부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여전했다. 대학생이 되어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좀처럼 늘지 않는 술과는 달리 하루 1갑을 태우는 골초로 변하게 됐다.      


대학생이 되고 1년이 지나 막 2학년으로 들어서는 찰나였다. 설 명절 연휴였다. 원래 설날 하루만 지나면 그다음 날은 아버지 외가에 가서 친척들을 만났었다. 오후가 되면 다들 컸다고 사촌들끼리 모여 광주 시내로 놀러 나갔다. 내 동생(나와 동생은 이란성쌍둥이)과 누나(2살 터울)는 당시 청춘사업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누나, 동생은 다들 빠져나가고 나만 덩그러니 남겠구나 생각했다. 웬걸, 사촌 누나와 울 누나만 약속이 펑크 나서 남게 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일찍 나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뭐하고 놀까? 서로 이것저것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세뱃돈은 두둑하게 챙겼으니 돈 걱정은 없었다. 오후 4시쯤 나가자고 사촌누나와 울 누나가 의견을 냈다. 그냥 누나들의 의견을 따랐다. 가서 어떤 걸 할지 정해지지도 않았다. 당시 아버지 외가에서 버스를 타려면 3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한참 걷던 중 누나가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 영화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오니 꼭 봐야 한다고 했다. TV에 몇 번 광고도 나오고 해서 나 역시 어떤 영화인지 보고 싶었다. 1960년대 영화로 만들어진 걸 이번에 다시 만든 건데 어떤 식으로 재해석했을지 궁금했었다.     


시내 변두리에 있는 극장에 도착했다. 아마 영화가 개봉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나 이 극장 말고는 상영하는 없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가 시작되고부터 난 이 영화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세련된 배경음악과 빠른 전개 그리고 멋있고 아름다운 남녀 주인공까지, 최고였다. 원래 영화를 잘 보지 않았는데 이 영화만큼은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2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난 아쉬워하며 상영관을 나섰다. 누나는 내게 “영화 재미있디?(전라도 사투리)”라고 물었다. 난 너무 좋았어, 다시 보라면 더 볼 수 있다고 질문이 끝나자마자 신나 하며 대답했다. 극장을 나오면서도 영화에 삽입된 OST “Kissing you”와 여주인공 클레어 데인즈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 영화가 주는 감동에 즐거웠다. 나중에 사랑을 하게 된다면 나도 저렇게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여자 친구가 생긴다면 클레어 데인즈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여자 친구가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혼자서 피식 웃기도 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아, 그날 약속이 하나 있었다. 명절 하루 전쯤인가? 그냥 이름만 알고 지내던 과 동기 여자애에게서 갑작스레 전화가 왔었다. 안부를 묻는 1분 남짓의 통화가 시작된 후였다.     

친구 : 00아, 너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니?

나: 응, 별일 없어, 왜?

친구 : 어, 할 말 있어서 그러는데 학교 후문 카페에서 8시까지 보자. 대신 내일 나 만나는 거 비밀로 해줄래?

나 : 그래, 너하고 만나는 거 비밀로 할게,

심각한 얘기 아니지?

친구 : 응, 별일 아냐.. 그냥 남들이 이래저래 말하는 게 싫어서 그래, 꼭 비밀로 해줘.

나 : 알았어, 걱정 마, 내일 보자.    


아마도 그 통화 때문이었을 거다. 아무 상관도 없던 과 동기 여자애의 전화 통화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실없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은. 나 혼자 별의별 생각을 하다 누나들에게 나 친구랑 약속 있는 것 때문에 학교로 간다고 말하고는 방향을 틀 때였다. 누나가 갑자기 말했다.     

누나 : 울 00, 여자 만나러 가냐?

나 : 여자 친구는 무슨, 과 동기야, 갑자기 어제 전화해서 만나자길래 가는 거야

사촌누나 : 어머, 너 여자 친구 생긴 거야? 웬일이야, 축하한다

누나 : 언니, 아니래, 그냥 과 친구래

나 : 별거 아님, 그냥 심심하니 불렀나 봐

누나 : 암튼 여자 만날 땐 매너 좋게 행동해라, 누나가 가르쳐 준 거 알고 있지?

나 : 어, 걱정 마. 나 먼저 간다.     


당시 누나는 나와 내 동생에게 매너 좋은 남자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고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누나가 얘기한 모든 걸 잘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여자 쪽에 매너 좋은 남자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거였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어딜 들어가거나 차를 탈 땐 먼저 문을 열어주기, 식사 자리에서 수저 먼저 놔주기, 여자 혼자 택시 태워 보낼 때면 차번호 외우기(웬만하면 바래다주란 말로 들렸다)등 여러 가지였다. 여자 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 누나 말을 귀담아 들었고 그 덕인지 매너 좋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다.     


저녁 8시, 약속 장소에 가니 그 친구가 먼저 나와 있었다. 서로 간단하게 인사 후 메뉴를 골랐다. 커피보다는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카페였다. 원래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분위기에 맞춰 주문했다. 앙증맞은 느낌의 버드와이저 350ml 맥주 2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제 슬슬 본론이 나올 차례였다.

나 : 무슨 일 있어?

친구 : 아니, 일단 오해 말고 들었으면 좋겠어.

나 : 응, 무슨 일인데. 정색하고 말하니 더 궁금하다. 말해봐

친구 : 요새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랑 사귀자며 너무 많이 들러붙어. 6년 선배부터 같은 과 동기까지, 지금까지 대여섯 명은 넘을 걸. 그런데 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또 그 과정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오해도 싫고.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 보니 네 생각이 나더라고

나 : 그랬구나, 너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다. 귀찮기도 했겠다. 그런데 내 생각이 나?

친구 : 그것 때문에 너 만나자고 한 거야, 너라면 이해해줄 것 같았거든. 너, 나랑 계약커플 하지 않을래?

나 : 뭐라고?....., 잠깐만. 생각 좀 해보자

친구 : 다른 남자들이 너무 귀찮게 굴어, 집으로 전화도 자주 오고. 차라리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런 일들이 없을 것 같아. 너한테 장난치는 거 아냐. 너라면 날 이해해 줄 것 같았어.     


은근슬쩍 계약커플을 제안한 여자 동기는 당시 학교에서 나름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한 사람의 친구였을 뿐이었다. 좋아한다는 말도 아니고 편해 보여서 선택한 게 나란다. 그것도 계약커플이라니.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아까 괜히 기분이 좋았던가 싶었다. 그런데 장난기 하나도 없이 미안해하며 부탁하는 그 아이의 표정을 보자 짜증은 슬며시 가라앉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다. 얼마나 귀찮았으면 그랬을까? 도대체 싫다고 하는데 1년 동안 몇 명이 사귀자고 달라붙는 건가 싶었다. 친구에게 양해를 구한 후 담배를 피우며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친구 :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였지, 그냥 내가 힘들어서 너한테 이런 얘기 했다고 이해해주라. 술이나 마시자.

나 : 잠깐만 기다려봐. 나 조금만 더 생각하고

친구 : (실망했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진다) 어, 그래. 10분 더 생각해도 돼. 천천히 생각하고 말해줘.

-----------3분 정도 지난 후

나 : 그래, 계약커플 하자, 그까짓 거 뭐, 내가 친구 1명 살리는 셈 치고 해 준다. 대신 나도 조건 있다.

친구 : 뭔데? 내가 웬만한 건 다 들어줄게.

나 : (웃으며) 이상한 건 아니고, 남들 앞에서 진짜 남자 친구, 여자 친구처럼 보여야 하니 개강하면 같이 붙어 다녀야 하고, 밖에서는 손잡고 다니자, 나 학교 방송국 생활 때문에 바쁜 거 알지? 웬만하면 전공과목은 같은 걸로 듣고 점심 같이 먹는 걸로 하자.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각자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계약커플 끝. 알았지?


내 대답을 들은 그 친구는 이제야 살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좋게 남아있는 맥주를 마시고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 시절 20살 아이들이 가지고 있을 만한 고민거리를 풀어놓으며 홀가분해했다. 계약커플이 진짜 커플이 되진 않을까? 내심 그런 기대도 없진 않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저 난 친구 1명 도와준 거다”라고만 여겼다.   

   

이후 개강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내게 물어봤다. “니가 00 남자 친구라고? 이야, 나 진짜 놀랐다. 둘이 언제부터 사귄 거야?” 한 100번은 들었나 보다. 그때마다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때도 대충 얼버무리며 마무리할 때도 있었다. 이왕 약속한 거 잘 지키자는 생각이었다. 일부러 같은 전공수업에서 같은 자리에 앉았고 보란 듯이 두 손 꼭 잡으며 밥 먹으러 다녔다. 남들이 볼 땐 영락없는 커플이었다. 난 그 친구의 흑기사가 되어 남자 친구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물론 그 친구에게 달라붙었던 데이트 신청은 깡그리 사라졌다. 그리고 1달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아마도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난 계약커플에서 진짜 커플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갑작스레 내게 첫사랑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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