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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n 24. 2022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남편은 공시생, 아내는 한국어 강사

2008년 10월 중순, 5년간의 회사원 생활을 끝마쳤다. 대기업 2년, 외국계 회사 2년, 벤처회사 10개월에 대리라는 직함을 달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C0에서 신입사원 교육받을 때만 해도 임원이 되는 게 내 목표였는데 5년 후 나는 임원이라는 목표 대신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마지막 벤처회사에서는 그다지 좋은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사소한 일로 오너와의 갈등이 시작됐고 내가 맘에 들지 않았던지 몇 달이 지나자 오너는 날 불러 권고사직을 종용했다. 참 어이가 없었다. 역시 이래서 벤처회사는 조심해야 되는 거구나, 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오너가 선심 쓰듯 2개월 월급만 더 주는 조건으로 그만두라 하자 내심 “이런 회사 나도 안 다닌다”라는 마음으로 시원스레 사직서를 썼다. 그때만 해도 난 다시 회사원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퇴사 후 가볍게 1주일을 쉬면서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선후배, 친구를 챙기며 다녔다. 그리고 11월부터 여러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일했던 제약업계뿐만 아니라  신입, 경력을 가리지 않고 여러 직무에 닥치는 대로 서류를 접수했다. 대학 4학년 때 기업체 입사전형을 열심히 준비해 놓은 것이 있어 그리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100개를 접수하면 적어도 1-2개 회사에는 최종 합격하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1차 서류 통과도 쉽지 않았다. 약 70곳 정도 원서를 접수하니 이젠 더 이상 지원자를 뽑는 회사가 없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난 자연스레 백수가 되어갔다. 2008년 연말이 되도록 면접 보러 오라는 곳도 없어서 이젠 막노동으로 먹고살아야 하나? 기술을 배워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들던 때였다.     


아내의 사촌오빠이자 내겐 고등학교 1년 선배인 00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00야, 너 소방관 시험 한 번 해볼래?”

“에? 공무원 시험이요? (한숨)”

“야, 그거 경쟁률 그다지 높지 않아. 필기는 쉬운데 체력 시험 있다더라. 그것만 준비 잘하면 된다. 멀리뛰기가 어렵다던데”

“네, 한 번 알아볼게요.”

00형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카페에 접속 후 소사모(소방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했다. 가입 후 1일이 지나야 글을 볼 수 있기에 하루를 꼬박 기다렸다. 5-6시간 동안 게시판에 있는 글의 40% 정도를 읽고 나자 이건 바로 나를 위한 직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친구와도 이런 농담을 자주 하곤 했었다. “운동 열심히 하면서 돈 버는 직업 없을까?” 바로 이거였다. 그 생각과 동시에 반년 전 당숙이 날 붙잡으며 끊임없이 얘기하던 게 생각났다.    

 

2008년 5월 경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였다. 그때 당숙 한 분이 내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10번 정도나 만났을까? 명절에도 뵙기 어려운 당숙이 갑자기 내 어깨를 감싸며 “00야, 너 소방관 시험 한 번 봐라. 니 정도 머리면 금방 합격할 거야, 우리 회사 좋은 회사다. 얼른 들어와라.” 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사실 그 당숙이 소방관인 것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봤어야 뭔 말을 하지, 명절에도 못 보는 당숙이라 세뱃돈 못 받는 내 입장에선 그냥 한 사람의 친척일 뿐이었다. 그런데 회사 잘 다니고 있는 내게 갑자기 소방관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당숙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네, 네,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했지만 나름 심기는 불편했다. 남이었으면 단번에 장난하냐며 화낼 수도 있는 상황이 30분 넘게 이어졌다. 그동안 계속 당숙은 날 붙잡으며 “00야, 우리 회사 좋다, 얼른 들어와라, 이번에 많이 뽑는단다.”를 무한 반복 중이셨다. 때마침 아버지께서 다른 친척을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는 말에 겨우 벗어났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게 이렇게 연결되려고 그랬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방관은 일과표가 있어서 훈련시간에 운동할 수 있다. 맡은 행정업무 열심히 하고 체력훈련을 하고 나면 일 열심히 한다고 칭찬받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직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직업을 가지기 위해선 넘어야 될 산이 여러 개나 날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바로 생계 해결과 비전(vision) 문제였다. 당시 난 32살, 아내는 30살이었다. 더군다나 2년 전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앞두고 있었고 그 후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갚아야 했다. 그런데 내가 돈을 못 벌게 되면 그 부족분은 고스란히 아내가 감당해야 했다. 당시엔 3월 중순에 서울소방 체력시험이, 5월 말쯤엔 광주소방 필기시험이 있었다. 아내는 2009년 시험 합격할 때까지는 맞벌이하며 모아놓은 돈으로 버텨볼 테니 열심히 준비해서 꼭 합격하라는 말을 해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비전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귈 때부터 결혼한 이후까지 가끔 비전 문제로 아내와 다투기도 했었다. 아내와 나는 2002년 가을 학기, 우연히 3과목이나 같이 수업을 듣게 돼서 연인으로 발전한 경우였다. 그동안 아내는 내게 “비전(vision)이 뭐야?”라는 질문을 했고 난 “비전이 밥 먹어주냐?”라고 응수했다. 당시 내 힘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빨리 돈을 벌자라는 생각만 있었지, 어떤 일을 하며 돈을 버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어 자립하는 일, 그것만이 전부였다. 그런 내게 비전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렇게 미뤄뒀던 비전(vision)을 찾아야 되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고민을 하다 내가 찾은 비전은 이랬다. 이왕 월급쟁이로 살 거면 남을 도우며 살자, 그럴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렇게 소방관을 향한 지원동기가 새롭게 생겼다.
     

나머지는 필기와 체력시험이었다. 서울소방은 체력 먼저, 광주 소방은 필기 먼저 치르는 형식이었다. 필기는 국어, 영어, 국사, 소방학, 행정학 시험이었다. 그나마 영어는 토익 공부를 해놓은 것이 있어 금세 괜찮아졌지만 나머지 4과목은 노량진에서 학원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보고 또 보며 외우는 일을 반복했다. 5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영업하는 일을 하다 자리에 앉아서 꼬박 10시간 동안 공부를 하려니 처음엔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작심삼일을 여러 번 반복하며 공부를 해도 과목별 1000 page 가까이 되는 책을 보려니 죽을 맛이었다. 거기다 문제집을 추가하면 과목당 1300 page 정도, 영어 포함하면 약 5500 page를 봐야 하는데 외우고 또 외워봤지만 갈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체력시험은 악력, 배근력, 제자리멀리뛰기, 20m 왕복 달리기, 앉아서 몸 앞으로 굽히기(좌전굴), 윗몸 일으키기 총 6과목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제자리멀리뛰기의 기록이 안 나와서 체대 입시학원을 다녀야 했다. 제자리멀리뛰기의 경우 순발력이 좋아야 하는데 어머니의 둔한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나는 커트라인인 238cm에도 한참 못 미치는 220 ~ 230cm 정도의 기록이 나왔었다. 당시 체력시험의 경우 1과목이라도 커트라인 점수를 넘지 못하면 탈락하는 제도로 시행이 됐었다. 아무리 나머지 체력 5과목에서 만점을 맞아도 제자리멀리뛰기를 239cm 이상 뛰지 못하면 떨어지는 구조였다. 1주일 중 3일만 학원에서 운동을 하고 나머지 4일은 스스로 동네 공원에서 달리기, 턱걸이 등 여러 운동을 하며 체력시험을 준비했다.      


2009년 3월 초 영하 5-6도의 온도에서 치러진 서울소방 체력시험은 제대로 능력을 보일 새도 없이 탈락했다. 오전에는 지원자를 5개 조로 나눠 왕복 달리기를 제외한 각 과목별로 측정하고 1시에 왕복 달리기를 하는 식을 진행됐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처음부터 제자리멀리뛰기하는 조로 배정되었다. 제일 자신 없는 종목인데, 가장 마지막에 하고 싶었는데 그게 제일 먼저 걸리다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탈락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 바로 앞 지원자는 두 번이나 270cm를 뛰고도 착지할 때 뒤로 손을 짚는 바람에 파울로 탈락당했다. 다음 차례가 나였다. 어렵지만 힘들지만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으니 240cm는 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1차 시기, 힘차게 뛰고 난 후 감독관은 190cm라고 얘길 해주었다. 놀란 것도 잠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2차 시기를 뛰었다. 어라, 이번엔 더 낮은 185cm가 나왔다. 추운 날씨에 몸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심하게 몸을 풀었나 보다. 다른 종목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 시험장을 나왔다. 허탈했다. 집에 도착한 후 힘없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시험 떨어져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참 바보 같았다. 난 이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계속 이불속에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5월 광주소방 시험을 목표로 여전치 주 3일 체대 입시학원에서 체력시험을 준비하는 시간 빼고는 모든 시간을 전부 필기시험 준비에 쏟았다. 행정학이 왜 그렇게 어려웠던지 광주소방 시험을 3주 앞두고는 서울에서 광주 처갓집으로 나 혼자서만 내려갔다. 아버지와 누나, 남동생이 살고 있는 본가는 도저히 내가 지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난 가족들에게로 비밀로 한 채 3주간 광주의 한 독서실에서 공부만 했다. 아내의 사촌오빠이자 고등학교 1년 선배인 00형이 같이 공부하고 있어서 더 게을러질 수 없었다. 그리고 턱걸이로 간신히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이어 체력시험에 면접까지 치렀다. 하지만 필기와 체력 합산 점수가 낮아 결국엔 미끄러졌다. 체력에서 1점만 아님 필기에서 1 문제만 더 맞았으면 합격인데 그것도 6개월 만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장렬하게 떨어졌다.     


서울로 돌아와 아내에게 내년 시험 1번만 더 보겠다고 얘기를 했다. 모아놓은 돈은 다 떨어졌고 더 이상 편하게 공부만 할 수 없었다.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 택배 화물 분류센터에서 일을 하며 시험 준비를 했다. 아내에게 모든 생계를 떠맡기고 나만 공부를 하려니 속으로 많이 부담이 되었다. 아내는 내게 일절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할당된 하루 4시간의 수업 외에 일부러 다른 강사들에게 부탁해 대리 강의를 뛰었다. 자기도 힘들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하루 8시간까지 수업하며 돈을 벌어왔다. 어미새와 새끼가 있다면 아내는 어미 새고 남편인 나는 새끼였다. 남편 잘못 만나 고생만 엄청 했다. 아내에게 많이 미안했다.          

절박했다. “이번 시험마저 떨어지면 바로 노숙자가 될지도 모른다.” 시험 준비하는 동안 일부러 점심은 먹지 않았다. 기출문제를 무식하게 외웠고 각 과목당 10번씩 넘게 반복했다. 체대 학원에서 운동할 때는 남들이 쉴 때 쉬는 시간조차 최대한 줄여가며 한 번이라도 더 점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수험생활 내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공부하고 운동했다. 주변에서도 100명도 넘는 분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주셨다.   

  

힘든 수험생 기간이 지나고 2010년 첫 시험을 봤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몸치여서 제자리멀리뛰기 커트라인도 못 뛰던 내가 체력시험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맞았다. 그리고 필기시험도 아주 잘 치러 우수한 성적으로 소방관 시험에 합격했다. 1년 반 동안 가족부양의 의무를 저버린 남편을 대신해 힘든 시간을 견뎌준 아내가 무지무지 고마웠다. 그렇게 난 바보 온달이, 아내는 평강공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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