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칠마루 Nov 01. 2023

아버지와 (경제적으로) 거리를 두기로 했다

2000년~2023년

2000년 1월, 마지막 휴가를 앞두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 경험을 쌓고 월급을 모아 어학연수를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어학연수를 다녀와 영어를 익숙하게 사용하게 된 뒤엔 미국으로 1년간 교환학생을 다녀와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걸 위해 군대에서 남는 시간 동안 놀지 않고 개인 체력단련과 공부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영어순해라는 문법책과 영어 단어장을 외우고 몇 달 전 출제된 영어 시험문제를 풀어보며 군대에서 지내는 동안 내 영어실력이 어찌 됐나를 체크하고 있었다. 다가올 말년 휴가를 기다리며 혼자 웃곤 했다.    

 

부푼 꿈을 안고 마지막 휴가를 떠나 8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아주 싸늘했다. 안방 온도가 바깥에 있는 것 마냥 차가웠다. 28개월의 복무 기간 중 26개월을 잘 마치고 돌아온 아들을 반기는 분위기는 아예 없었다. 왜 그런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1997년 IMF 이후로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졌는데 설상가상으로 2년 뒤인 1999년 가을께 친구분의 사기로 인해 총 십억이 넘는 빚을 안게 되었다는 얘기를 누나에게 들었다. 아버지의 평생 꿈은 본인의 힘으로 교회건물을 헌납하는 것이었는데 99년 초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목사님으로 시무하는 교회에 갔다가 건축 중인 교회 건물과 관련해 집안 형편과 상관없이 아버지 이름으로 채무 보증을 서게 됐고 그걸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당시 그 교회에는 아버지를 비롯해 교회 중진 여럿이 몇 역씩 채무보증을 섰다는 얘기를 들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동창이라는 목사님이 사기꾼이었고 앞만 보고 경주마처럼 돌진하는 우리 아버지는 그 사기꾼이 놓은 덫에 걸린 어리숙한 토끼 신세였다. 그 결과 사업이 어려워 쌓인 빚에 교회 건물 채무 보증으로 몇 억이 얹어진 채 기운 집안형편을 말년 휴가를 나온 내가 직접 느끼게 된 것이었다. 실은 99년 가을 사기당한 이후로 아버지의 수입이 변변치 않아 최소한의 난방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있었다.    

  

안 그래도 사랑이 풍성한 집이 아닌 냉랭한 집안이었는데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차갑다 못해 손끝이 시린 분위기가 되었다. 내가 기대한 건 “군대 갔다 오느라 고생했다, 00아”란 말이었는데 그 말 대신 아버지는 나더러 “군대에 더 있을 수 없냐?”라는 말씀을 하셨다. 정말 군인이 들으면 제대로 발작할만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듣던 당시엔 어찌나 서운하던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리고는 멋쩍으셨는지 혼자 웃으셨다. 그때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 집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날 키워주셨으니 그 정도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몇 년이 지나 “어라, 이건 아닌데”라고 바뀌게 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제대한 지 3일 만에 일을 시작했다. 2000년 3월부터 취업하기 전인 2003년 12월까지 3년 10개월 동안 주유소 2개월 →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 2개월 → 아파트 방수공사 3개월 → 건설현장 노동자 2개월 → 편의점 야간 점원 2개월 → 다시 주유소 2개월 → 식자재 도매상 6개월 → 학교 주차장 요금정산 1년 6개월 → 자동차 엔진을 만드는 기아 하청 공장 2개월을 일했다. 집에 생활비를 보태고 남는 돈으로는 대학 등록금과 교재비, 용돈, 식비를 충당했다. 그렇게 일을 했어도 4학년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대학 생활을 했는지 모르지만 난 아르바이트한 기억, 야간 알바로 인해 수업 시간에 졸았던 일, 저녁에 난 일하러 가지만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는 아이들이 부러웠던 것만 생각났다. 한 달 용돈이 30만 원밖에 안 된다며 투정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어학연수를 다녀와 유창하게 영어로 발표하는 친구를 몰래 질투하기도 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가족을 위해 이 정도는 장성한 아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아버지는 본인이 신용 불량자가 되자 그다음엔 새엄마 이름으로 각종 거래를 해 새엄마 역시 신용불량이 되었다. 그리고 새엄마의 친정(내게는 외가지만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에서 돈을 끌어와 아예 그 집안을 거덜내 버렸다. 외갓집을 날리고 이모 여럿에게 돈을 빌려 지금까지도 그 돈을 못 갚았다. 그렇게 외가에서 돈을 뽑아낸 아버지는 그다음 목표를 누나와 나로 삼았다. 누나가 결혼하려고 모은 1억 가까운 돈은 몇 년 동안 고스란히 아버지의 사업자금으로 쓰였다. 그러고도 돈이 부족한 아버지는 내가 어학연수를 가려고 1년 정도 500만 원 넘게 모은 통장을 받아가신 후 “다음에 꼭 갚아주마”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 5년쯤 뒤에 물어보니 내게 얼마를 가져가셨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2002년엔 내 이름으로 삼성캐피털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그걸 몇 달씩 갚지 않아 내가 삼성캐피털에 악성고객으로 등록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내가 멍청하게 굴어 그 일을 해결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취업을 앞두고 신용관리가 정말 중요한 건데 당연히 잘 갚으시겠지 하고 아버지를 믿었던 25살의 내가 참 안타까웠다. 거기다 아버지가 본인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아 내가 대신 그 친구분의 카드값을 갚는 보증을 서게 했다. 그 채무 역시 제대로 돈을 갚지 않아 늘 00 카드 추심 직원에게서 1년 가까이 빚 독촉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때는 멍청하게도 그게 가족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아버지를 믿었다.


그 뒤 4학년이 되어 수십 곳의 회사에 지원을 했고 3곳의 회사에서 최종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최종면접 회사 중에 삼성은 없었다. 이상하게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전자, 삼성테크윈 등 여러 곳의 삼성계열사에 지원했지만 1차 면접을 본 삼성생명을 빼고는 전부 서류에서 탈락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로 인해 삼성캐피털에 악성고객으로 등록된 것이 아마도 불합격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2003년 12월 취업을 하고 이듬해 2월, 대학교 졸업을 하게 됐다. 졸업식을 마친 뒤 아버지와 새엄마,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와 점심 식사를 했다. 아들의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라면, 저녁도 아닌 점심 식사라면 당연히 아버지가 계산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의 점심 계산서는 내 몫이었고 난 졸업을 축하받는 입장이 아닌 한 사람의 직장인이 부모님에게 밥을 사는 자리가 되어 내심 속이 상했다.     


그런 경험은 또 있었다. 회사 일을 하는데 필요해 중고차 시장에서 차를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고차 시장에서 차를 파는 딜러 앞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차를 사주는 것처럼 거창하게 말씀하시고서는 막상 차 값을 계산할 차례가 되자 나를 놔두고는 슬그머니 뒤로 빠지셨다.  400만 원을 주고 6년 된 중고차를 사는 나와 달리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차를 마련하는 회사 동기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다.      


아버지가 내게 날린 마지막 결정타는 결혼 후에 있었다. 27살에 결혼한 후 1년 반 정도 주말부부를 했다. 결혼식만 올렸지 여전히 아버지와 누나, 남동생과 살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사업자금 대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 이름으로 1500만 원을 3년 동안 상환하는 대출을 받은 뒤 6개월 정도만 제때 납부를 하고 나머지는 내가 카드사의 독촉 전화를 받을 때까지 2~3달 이상 연체를 했다. 그 문제를 1년 정도 아내 몰래 혼자 해결하려다 결국 아내에게 들켰다. 당시 아내는 아버지의 어이없는 행동에 분노했지만 이제 가족은 아버지와 누나, 남동생이 아니고 오직 자신과 나뿐이라며 이제 집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우리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그 대출 상환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도 내 몫이 되었다. 그 일 뒤로 나는 아버지에게 모든 돈 관계를 끊었다.       


아버지는 정말 돈 앞에서는 철면피였다. 아들이고 딸이고 돈 앞에선 아무 상관없었다. 오죽하면 결혼한 아들과 딸의 사돈 댁에 전화해 사업자금으로 쓸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사돈 댁에서 돈을 빌리지는 못했지만 장모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난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생활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올 초 머릿속의 종양으로 위중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돈에 대한 집착은 여전했다. 그래서 난 여전히 돈과 관련해서는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다. 돈 문제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아니고 남이라고 여기는 게 맞겠다. 반대로 설명하자면 아버지 주위의 모든 사람은 아버지의 먹잇감이었다. 그렇게 돈을 빌려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빚만 20억 이상이다. 도대체 우리 아버지는 그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그러는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매거진의 이전글 45년 만의 가족사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