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 타고 있는 소방차는 현대에서 만든 5톤 트럭입니다. 전국에 있는 소방차량 특장업체(이00, 대00, 에00 등, 각 지역에 흩어져 있음)에서 이 현대 5톤 트럭을 받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소방차를 만듭니다. 그래서 소방차는 겉에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제작연도에 따라, 차를 개조한 특장업체에 따라 속이 확연히 다릅니다.
보통의 메가트럭
특장업체에서 소방차로 개조한 메가트럭
위 소방차는 내구연한이 10년입니다. 소방관들이 주로 쓰는 이 5톤 트럭에는 각종 장비(벌집 제거, 교통사고, 문 개방 장비, 관창, 각종 호스, 구명환, 로프, 유압 구조장비, 물 3000리터, 소화약제 등이 실려 있어 측정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실 중량이 10톤을 넘나들 듯합니다. 사람이 타는 앞쪽에는 방화복, 공기호흡기, 헬멧, 무전기 등이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위 소방차(이후 펌프차)에 휴가자가 없는 경우 주간에는 5명, 야간에는 4명이 타서 각종 화재, 구조, 구급 현장 출동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365일 밤낮없이 우리의 발을 담당하는 이 펌프차가 갑자기 고장 났습니다. 이 더운 여름, 소중한 에어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저번 주부터 살짝 고장 날 조짐이 있어 보였습니다. 벌집제거를 마치고 돌아와 차에 시동을 켜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중이었습니다. 운행한 지 5분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더웠습니다. 차가 크니 앞쪽, 뒤쪽 모두 송풍구가 있어 저만 더위를 느끼는 줄 알고 뒤에 있는 후배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후배들 역시 덥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송풍구에 손을 갖다 댔습니다. 온도는 최대한 낮게, 풍량은 중간으로 맞춰져 있는 상태라 에어컨이 정상 작동된다면 손끝이 시려야 했습니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다 되어도 송풍구에 갖다 댄 손은 시리지가 않았습니다. 냉방온도가 최대한 낮은데 왜 그럴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래도 냉매가 부족해 찬 바람이 나오지 않을까 여겼습니다. 수요일 오후 6시가 다 된 시각이라 공업사도 곧 문을 닫을 시간이어서 내일 근무팀에 증상을 말하고 인계할 예정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 9시, 근무하러 출근한 다음 팀(B팀)에게 이상 증상을 얘기하고 아무래도 냉매 부족 같으니 공업사에 가서 확인해 보라는 인계를 확실히 마쳤습니다. 제가 다시 출근하는 날은 이틀 뒤입니다. 아마도 다시 출근할 때쯤이면 찬 바람이 나오지 않는 에어컨은 정상 작동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근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음 근무팀과 교대를 마치자마자 새로운 출동이 시작됐고 그 팀은 하루종일 많은 출동에 시달렸다고 들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얘기한 펌프차의 이상증상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다시 제게 돌아왔습니다. A팀 근무(제가 이상증상 인계) →B팀 근무(출동이 많아 공업사 방문할 시간 없었음, 너무 바쁜 나머지 고장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음 팀에 인계하지 못함) → C팀 근무(아무것도 인계받지 못한 채 펌프차 운행 도중 에어컨 사망). 결국 다시 제가 출근한 이틀 뒤에는 더운 바람만 나오는 펌프차를 마주하는 의외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저는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저만의 의식을 치릅니다. 푸시업 60~100개, 허리 스트레칭 8분, 발목 스트레칭 3분 정도를 하며 간단히 땀을 흘립니다. "오늘 나는 소방서로 출근했다. 오늘은 일반인이 아닌 소방관이다. 오늘도 무사히 맡은 임무를 잘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내려와 제가 맡은 분야의 행정업무와 차량에 대해 전 팀 근무자와 얘기를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이 날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습니다. 분명히 이틀 전에 인계한 일인데 진행된 게 아무것도 없으며 에어컨은 망가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날은 토요일이라 공업사도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별 수 없이 땡볕에 창문을 열고 더운 바람을 맞으며 버텨야 했습니다. 아침부터 짜증을 버럭 낼 순 없었습니다. 속으로 꾹 참으며 "그럼, 월요일에 고치는 거야" 후배에게 말하니 자기가 잊지 않고 꼭 수리받겠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좋게 넘어갔습니다. 바쁘니 그럴 수도 있지 생각했습니다.
후덥지근한 토요일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나고 제가 출근한 화요일이 되었습니다. 과연 펌프차의 에어컨은 제대로 고쳐져 있을까요? 당연히 고쳐졌겠지 생각하고 전 팀 근무자인 후배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듣는데 "아휴" 한숨만 나왔습니다. 월요일에 공업사에 가니 수리 소요시간이 4시간 이상 필요해 다음날인 오늘 다시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고장 난 차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은 공업사에 들러 차를 맡기고 본서에 있는 예비 펌프차에 우리 장비를 다시 적재하는 것이었습니다(말이 쉽지, 장비 옮기는 것은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도 20분 정도 걸리는 힘든 작업입니다, 그래도 일하려면 군소리 말고 해야지요). 공업사에서는 오늘 저녁이나 아니면 내일 오전 일찍 작업이 끝날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펌프차를 공업사에 맡기고 다시 장비를 예비 펌프차에 옮긴 후 몇 가지 행정업무를 처리하니 그새 오전이 지나갔습니다. 점심이 준비되어 이제 막 밥을 먹으려는 찰나 갑자기 공업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공업사 : 이거 우리가 못 고치겠는데, 부속이 없어, 부속이
같이 근무하는 후배 : 네, 무슨 말씀이신지?
공업사 : 어제 볼 때만 해도 냉매 채우고 배관 청소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안에 콘덴서까지 고장 났어, 그런데 이건 우리가 구할 수가 없네, 거기 특장업체 알아봐요
다시 또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후배에게 그 전화 내용을 전해 들으니 속이 답답했습니다. "아니, 그럴 거면 어제 공업사 방문했을 때 제대로 좀 살펴보시던가요, 사장님! 이제 와서 못 고치겠다고 하시면 저희는 어찌하나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참았습니다. 이제는 특장업체에 연락을 해야 할 차례였습니다. 우리 펌프차를 만든 특장업체에 전화하니 에어컨 담당은 00이라며 관련 업체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업체에 다시 전화했습니다.
나 : 00 소방서 00입니다. 에어컨 고장으로 전화드렸습니다.
업체 : 아, 잠깐만요, 증상이 어떻습니까?
나 : 앞, 뒤 모두 찬 바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공장이 어디시죠? 언제 가면 될까요?
업체 : 음, 저희가 센터로 찾아갈게요, 이번 주는 힘들고 아니다 금요일 오전 중으로 갈게요
이 번호로 주소 남겨주시고 뒤쪽 에어컨 송풍구 사진 좀 보내주세요
나 : 0월 0일 오전에 오신다는 거죠?(재확인은 필수, 윗선에 보고해야 하니 언제 수리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저희가 따로 준비할 게 있을까요?
업체 : 작업선만 준비해 주세요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특장업체(인천에 있는 업체에서 우리 펌프차를 만들었습니다)까지 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습니다. 공장까지 가야 했다면 거기까지 펌프차를 몰고 수리를 맡기러 갈 인원, 차를 다시 찾아올 때 인원을 정하느라 또 머리가 아팠을 겁니다. 0월 0일까지는 3일이 남은 상황, 과연 이번에는 에어컨이 제대로 고쳐질 것인가? 별 일 아니었지만 바쁜 출동으로 인해, 3개 팀이 365일 24시간씩 교대 근무하는 곳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앞으로 3일만 참으면 시원한 세상이 옵니다.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