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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Sep 18. 2022

처세의 달인 1, 2

나는 밑바닥 상대는 무조건 하늘로

1. 처세의 달인 로컬팀장 “말씀 올리겠습니다” ↔ 나 “말씀드릴게요”     


C 0 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2005년쯤 내가 속한 제약사업부에서 조직개편을 했다. 전에는 뭉뚱그려 광주지점이었지만 이제는 유통채널에 따라 종합병원을 전담하는 종합병원 팀과 종합병원을 뺀 나머지 병의원, 보건소를 담당하는 로컬 팀으로 나뉘게 됐다. 내가 영업사원으로 꽃을 피우기까지 격려해주시고 이끌어주셨던 지점장님은 종병 팀장으로 가셨고 난 일반 병의원 담당인 로컬 팀이 되었다. 이전 광주지점 No. 2였던 000 과장님이 로컬팀장으로 발령받아 내가 그 밑으로 속하게 됐는데 새로 팀장이 된 과장님과 난 업무 특성상 자주 부대낄 상황이 많았다. 그렇게 부대끼다 느낀 점을 쓴다.     


제법 큰 거래처를 방문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내 거래처 중 000 내과라는 곳이 있었다.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가 약 150여 명 정도여서 중요한 거래처 중 하나였다. 다만 영업사원이 다가서기엔 원장님(이후 의사샘)이 꽤 엄한 편이어서 힘든 점도 있었다. 꼭 대대장과 사병이 만나는 느낌이라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로컬 팀 인원 변동으로 기존에 그 내과를 담당하던 내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신입사원이 이곳을 담당할 거라는 말에 의사샘은 아주 불쾌해했고 우리 회사 제품을 모조리 빼겠다는 항의까지 하셨다. 결국 그 일 때문에 로컬팀장과 내가 다시 그 내과를 방문해서 담당자를 바꾸게 된 상황에 대해 얘기할 때였다. 로컬팀장이 의사샘에게 회사가 조직개편으로 인한 인원 이동의 당위성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끝맺는 말을 할 때였다.  

    

로컬팀장 : ~~~~~~ 이러하니 향후 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귀를 의심했다. 이건 1970년도에나 쓰던 어법 아닌가? 아무리 제약영업이 국내에서 힘든 3대 영업 중 하나라지만, 영업사원이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힘없는 乙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극상승 높임말을 쓰는 것은 아니잖아요, 팀장님 그동안 이렇게 영업하신 건가요?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춰가면서 영업을 하고 회사생활을 해야 하나요? 로컬팀장의 말을 들은 내 속에서는 갖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그저 팀장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 시간이 잘 마무리되길 바라고 또 바랐다. 결국 그 일은 무사히 마무리됐지만 아직도 내게는 하지 않아야 되는 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 후로 3년이나 더 제약영업을 하며 약밥을 먹는 동안 자존심을 내려놓을 일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절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라는 표현을 쓰진 않았다. 그런 높임말을 쓰면 쓸수록 말을 듣는 상대가 돋보이는 것보다그 말을 하는 내가 낮아지는 것 같아 싫었다. 오히려 거래처를 방문할 때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의사샘들의 말을 경청하되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 된다와 안 된다를 분명히 표현해서 나중에 거래처에서 혼동하지 않도록 입장을 명확히 하는 데 주력했다.      


2. 처세의 달인 KT 다니는 조원 “내가 모시는 분” ↔ 나 “같이 일하는 상사”


영업하는 일에 점점 흥미를 잃어갈 무렵, 일요일 저녁 우연히 중국의 CEIBS에 다니는 학생들을 방명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고 나도 MBA를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적극 지원할테니 열심히 공부해라, 회사 이직 문제나 이사 등 다른 문제는 일단 GMAT(미국, 캐나다 등 경영대학원에 지원하기 위해 학생이 치러야 하는 필수 시험) 점수부터 받아놓은 다음 걱정하자고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강남에 있는 JCMBA라는 학원에 등록을 했다. 일주일에 3회 수업을 하는데 두 달 수강료가 80만 원이었다. 첫 수업을 들어보니 약 7~80명 정도가 수강을 했다. 직업군인부터 대기업까지 재직하고 있는 회사도 다양했다. 학원에서는 4명을 한 조로 만들어 서로 스터디 모임을 하라고 권유했다. 내가 속한 조는 남 3, 여 1(도요타, 신세계, 벤처회사, KT)로 이뤄진 조였다. 만나서 서로 인사한 후 명함을 주고받았고 나이도 비슷해 생각보다 금세 얼굴을 익히게 됐다. 다들 대리인데 KT에 다닌 한 명만 과장이었다. 회사 생활 만 5년에 과장이라니 나름 회사에서 인정받는 인재인가 보다 여겼다.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나 조별 모임에서 매주 토요일은 오후 6시부터 학원 수업이 시작되니 오후 1시부터 모여 근처 커피숍에서 공부하다 학원 수업을 듣기로 결정을 했다. 다들 4~5개월 안에 GMAT에서 원하는 점수를 얻어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모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장소가 커피숍이다 보니 공부를 하다 자연스레 얘기하면서 보내는 시간도 어느 정도 있었다. 각자 회사에 대해, 결혼 여부에 대해, 왜 MBA를 가는지 여러 얘기가 오갔다. 그러다 KT에 다니는 조원의 말이 내게 확 다가왔다.     


KT : 내가 모시던 분이 갑자기 부친 상을 당해서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     


아, 같이 일하는 상사가 아니고 모시는 분이구나, 이 친구는 이런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했구나 싶었다. 예의 바르고 인성도 좋은 친구였다. 아마도 회사에서는 맡은 일을 기가 막히게 해내지 싶었다. 그것에 더해 상사를 모신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정도로 회사 생활을 했으니 5년 만에 과장으로 승진했구나 바로 이해가 됐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나는 왠지 목구멍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처럼 쉽게 넘어가질 못했다. 왜 모시는 분이지? 그냥 같이 일하는 상사라고 표현하면 안 되는 건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은 "난 절대로 그렇게 못해"였다. 이상하게도 난 윗분의 능력이나 업무 자세, 됨됨이 등 내가 윗분에게 감동받지 않으면 그분을 모신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리고 내 속마음으로도 윗사람으로 쉽게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회사에서 나온 윗사람이니 말과 행동은 “네네” 대답은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사회생활을 할 때 바람직한 자세가 아닌 걸 알지만 태생이 그런 걸, 아마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소방관이 된 이후에는 정말 모신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탁월한 팀장님들을 여러 차례 만나게 되었다. 이젠 나도 40대 중반인데 과연 후배들이 나를 볼 때면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할 때도 있다. 내가 Role model로 삼았던 분들을 닮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나 역시 후배들에게 Role model이 되고 싶다.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분위기 좋게 회사 생활을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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