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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11. 3 입대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

해군 군악대 “Gonna fly now – Rocky OST”

by 거칠마루

1살 위 사촌 형이 해군에 입대한 이후로 같은 또래-나와 내 동생(동생과 나는 이란성쌍둥이), 나보다 1살 어린 사촌동생- 모두 해군으로 입대했다. 나만 종류가 다른 해양경찰이었다. 하지만 내가 입대할 당시만 해도 해양경찰 역시 해군과 마찬가지로 진해 해군 훈련소로 입대 후 인천 부평의 경찰 종합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따로 받았다.


1997년 초여름에 병무청에서 입대 지원을 했다. 필요서류로는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꼭 제출해야 했었다. 이유인즉슨 출결사항이 나쁘거나 정학 같은 징계가 있으면 불성실하다는 걸로 간주되어 해군이나 해병대로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1차 서류심사 후에는 2차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회사 입사 면접처럼 힘든 게 아닌 형식적인 면접으로 일종의 요식행위였다. 입대 지원자 5-60명을 한 공간에 몰아넣은 후 심사관(아마도 중령 정도)이 지원자별 서류를 보며 관심 가는 사람에게만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혹시나 질문을 받을까 봐 내심 긴장했지만 심사관은 거문고를 전공했다는 나보다 세 살 많은 동기에게 국악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체대 출신 동기에게 물어본 것을 빼고는 나머지에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달이 지나도록 입영일자 통보는 없었다. 해군 떨어지면 내년에 육군 가지, 그런데 하사관이나 장교 지원도 아니고 일반병으로 지원하는 건데 합격과 불합격이 나뉘는 건 너무 한 거 아냐라며 불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9월 추석 이후였나? 집에 들어오니 입대 영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지원한 동생은 11월 24일, 난 11월 3일 입대였다. 동생이 웃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실없는 놈, 지도 3주 뒤에 훈련소 들어올 거면서, 그때 울지나 말아”라고 쏴 붙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입대하기 전까지 4주 정도 남았었던 것 같다. 부랴부랴 달력에 요일별로 만날 사람을 정하고 친구와 선후배,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광주에서 시작해 서울, 대전, 목포 등 여러 군데를 쏘다녔고 마치 이번 기회가 아니면 못 만날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길 잘했다. 그 만남 이후로 연락이 끊기거나 못 만난 선후배, 친구들이 꽤 있었다. 항상 만남의 끝무렵엔 “11월 초에 군대 가니 잘 지내세요, 휴가 나와서 만나요”가 단골 멘트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진해로 향하는 날이었다. 버스터미널까지 나오신 부모님의 마지막 인사는 별 거 없었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잘 갔다 와”, 어머니는 아버지 말에 몇 마디 덧붙인 아마도 아프지 말고 건강 챙기라는 걸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나중에 듣기로는 3주 뒤 입대하는 동생은 버스터미널에서 여자 친구와 울고불고 난리였다는데 난 참 어디 수학여행 가는 것처럼 담담한 이별이었다.


진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전 헤어진 여자 친구는 잘 지내고 있을까? 배 멀미가 심하다는데 난 잘 견딜 수 있을까? 아직도 군대에서는 때리나? 훈련소에서는 담배를 못 피우게 한다는데 너무한다. 8주간 어떻게 견디지?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답지도 않은 생각이 이어졌다. 천천히 이어지는 내 생각과는 달리 버스는 빨리도 달려갔고 어느새 난 전라도에서 경남 진해 터미널로, 터미널에서 다시 훈련소 앞으로 도착해 있었다.


훈련소 앞에 있는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걸어가는데 멀리서 연주 소리가 들렸다. TV에서 볼 수 있는 오케스트라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관악기, 현악기의 여러 종류로 이뤄진 군악대의 모습이 보였다. 10분 남짓한 연주에 간간이 이어지는 곡 소개 그 뒤로 간단한 클래식과 익숙한 유행가 멜로디가 이어졌다. 그렇게 훈련소 앞에서 멍하니 음악을 듣는 게 20분쯤 됐을까? 갑작스레 지휘자로 추정되는 분이 크게 말씀하셨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입영 장병들을 위해 영화 록키에서 나오는 음악을 연주하겠습니다. 장병 여러분 모두 훈련 잘 마치고 몸 건강히 제대하길 기원합니다.”라고 얘기였는데 막상 이 음악이 끝나면 훈련소에 들어가야 하는 내게 가슴에 와닿았다. “아, 드디어 내가 군대 가는구나,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생각만 했었는데, 내가 군인이 되네.” 소년에서 청년으로,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듯 노래가 시작되자 내 안에서 한 꺼풀 허물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무엇 무엇이라고 영어로 된 제목을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나팔 소리와 심벌즈 소리가 경쾌했다는 것만 생각났다. 3분 남짓 흐르던 음악이 끝나고 군악대가 자리를 정리하자마자 “입영 장병 여러분은 훈련소로 입소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조교의 안내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28개월 해양경찰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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