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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Feb 18. 2023

준비 없이 맞이한 맛집 방송 출연,
이것은 福일까?

2023. 2. 17.(금) 간판 없는 김밥집

겨울이라 집에만 있는 걸 답답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어제도 길을 나섰다. 집에 있었다면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명목 아래 영어, 수학 등 공부할 분량을 꼼짝없이 해야 하지만 아빠와 같이 바깥나들이를 하는 날엔 공부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아이들이 나들이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공부가 그리 중요한가? 못 이기는 척하고 밖에 나가자는 아이들에게 이끌려 광화문 교보문고로 출발했다. 출발 시간은 10시였다. 광화문에 도착할 때쯤이면 11시 10~20분이라 이른 점심시간이 될 터였다. 애들 점심을 무얼 먹일까 고민하며 네이버 검색을 했다. 그러다 얻어걸린 생활의 달인-간판 없는 김밥집이란 블로그 게시글을 보고 오늘 점심은 그곳에서 해결하리라 결심했다.      


원래 내 계획은 이와 같았다. 

11:10 종로5가역 도착 → 11:20 역에서 700m쯤 걸어서 간판 없는 김밥집 도착 → 12:00 식사 후 교보문고까지 2.8km 걷기 → 12:30~13:00 교보문고에서 2km 명동성당으로 걷기 → 14:00 명동성당에서 종각역으로 이동     


하지만 계획은 언제나 계획일 뿐이었다. 11:20 간판 없는 김밥집에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 잔치국수 두 그릇과 김밥 두 줄을 주문했다. 가게 안의 여섯 테이블 중 절반이 벌써 차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2~30분 이상 줄 서서 기다린 이후에야 점심을 먹을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다. 도착한 지 5분도 못되어 자리는 꽉 찼고 안으로 못 들어온 사람들이 김밥집 밖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가게 인원은 음식을 만들고 조리된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주인 내외 단 2분 뿐이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10여분 동안 얼추 10명도 넘는 사람들이 “김밥 포장 되나요?” 끊임없이 가게문을 여닫으며 사장님 내외에게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음식을 만드시던 사장님은 쌀이 다 떨어져서 포장주문을 못 받는다는 대답을 하셨다. 손을 바삐 움직이며 주문받은 김밥을 말고 소면을 삶는 동안 가게 안에 앉은 우리들에게 틈틈이 하소연을 하셨다. 자초지종은 아래와 같다.     


2월 10일 금요일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 제작진이 방송 촬영을 했단다. 사장님 내외는 적어도 1주일은 지나야 방송이 나오겠지 생각하며 평소처럼 영업 준비를 해왔는데 느닷없이 촬영한 지 3일 만인 월요일에 방송이 나온 것이었다. 방송된 다음날인 2월 11일 화요일부터 많은 손님이 들이닥치기 시작했고 주인 내외 두 분은 그렇게 몰려드는 손님들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눈치였다김밥집을 하는 이유는 그냥 노부부가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방송으로 인해 손님이 몰려드니 가게 운영하는 것이 힘에 부친다고 말씀하셨다. 갑작스러운 방송 때문에 수요일은 11시 30분에 모든 재료가 떨어져서 줄 서서 기다리던 분들이 주문도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단다. 그렇게 말씀하시다가 혼자 오신 분이 김밥 두 줄과 잔치국수를 주문하자 갑자기 사장님이 주문한 손님에게 되물어 보셨다.      


사장님 : 그걸 혼자 다 드실라고?(내가 손님 입장이었다면 조금 불쾌했을 것 같았다)

손님 : 네, 그렇게 주문하고 싶은데 안 되나요?(주문하신 분이 기분 나빠하지 않고 되물어서 분위기를 전환함, 옆에서 보는데 현명하게 말씀을 잘하셨음)

사장님 : 그게 아니고 지금 쌀이 다 떨어져서.....

손님 : 먹고 남으면 가져가려구요.

사장님 : 그럼 이번만 김밥 두 줄, 잔치국수 주문받을게요, 쌀은 다 떨어졌지손님들은 줄 서서 기다리지 미안해요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손님이 많아지니 내가 몸도 힘들고 마음도 여유가 없어서 그래요미안해요친절하게 잘 응대해야 하는데(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안타까웠다손님이 많아도 좋은 게 아니구나 싶었다

손님 :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재료가 다 떨어져서 그런 건데요.    

 

말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손님과의 대화는 두 분의 넓은 마음으로 인해 별문제 없이 마무리됐지만 이후로 김밥은 테이블 당 한 줄만 주문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유명한 진미채 김밥을 먹어보게 됐다. 블로그에 쓰여있던 것처럼 부드럽고 맛있었다. 오징어조림의 식감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다만 잔치국수는 내가 기대한 것과 달리 보통이었다. 진한 멸치육수 맛을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도 주인 내외 두 분이서 수없이 몰려드는 손님을 상대하며 주문하는 대로 음식을 만들고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신 점은 좋았다. 아이들도 맛있게 먹었다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사장님 내외에게 인사를 했다. 다만 카드결제가 되지 않는 점은 아쉬웠다.      


두 아들과 함께 맛있게 점심을 먹고 광화문을 향해 걸으며 생각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복은 과연 약일까독일까김밥집 사장님이 처한 현재 상황을 내 입맛에 바꾼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로또를 사며 매번 1등 당첨을 기원하는 내가 얼마 후 1등으로 당첨되었다과연 이게 복일까화일까지금 내 입장은 이렇다고민하기 전에 1등 당첨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월급은 쥐꼬리만큼 올랐는데 체감물가는 2배 이상 뛴 것 같다. 돈 나갈 곳은 많은데 들어올 것은 적다. 당첨되고 고민하련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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