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파리를 1시간 요약본으로 볼 수 있다면?

유람선은 꼭 타세요!

by 회색토끼

결국 우리는 노트르담 성당을 보기로 한 일정을 과감히 지우기로 했다. 당시의 계획표상으로는 이랬다.




16:20-17:00 정류장 도착 후 숙소 이동

17:00-17:40 체크인하고 짐 풀기, 숙소 앞의 슈퍼마켓에서 간식 구입해서 출발

17:40-18:20 노트르담으로 지하철 타고 이동

18:20-19:00 노트르담 성당 관람

19:00-19:40 노트르담에서 식당 지하철 타고 이동

19:40-20:40 저녁식사

20:40-20:55 바토무슈 타러 도보 이동(Bateaux-Mouches)

20:55-21:20 바토무슈 승강장에서 대기

21:20~22:30 바토무슈 탑승(마지막 탑승 시간에 탔다고 가정)



둘 다 파워 J였기 때문에 작성 가능한 여행 계획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40분 만에 다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프랑스에서 밥을 1시간 만에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숙소로 이동하는 데에도 시간을 많이 허비했고, 또 숙소를 찾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원래 나는 파리여행을 할 때마다 숙소로 한인 민박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아침마다 든든한 한식으로 시작할 수 있는 데다가, 현지인만이 아는 여행 팁을 한국어로 얻어갈 수 있다. 숙소도 쾌적한 데다가 싸다.


대개 파리의 숙소는 가격 대비 가성비가 몹시 떨어진다. 예를 들어 1박에 20만 원짜리인데 막상 가보면 좁고 답답하고, 에어컨이 없다. 옛날 건물을 지금까지 계속 유지보수만 하며 사용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에펠뷰 숙소는 아무것도 구비되어 있지 않더라도 에펠뷰 하나만으로 1박에 30만 원도, 40만 원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애용해 오던 한인 민박 업체들은 (1박에 10만 원 안팎) 이미 다 몇 년 전에 없어져버렸었다. 대신 오피스텔 같은 현대식 건물을 숙박용으로 바꾸어 비슷하게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건물 입구가 찾기 어렵게 되어 있는 데다가 주인아주머니와도 연락이 잘 되지 않아서 또 기다려야만 했다. 설명과는 달리 실제로 에펠탑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고 바로 앞에 건물이 교묘하게 에펠탑을 가리는 바람에 뷰 또한 아쉬웠다.

묘하게 아쉬운 숙소뷰

그럼에도 괜찮았다. 파리는 이상했다. 모든 게 뜻대로 안 되어도 에펠탑 하나만 보고 있으면 다 괜찮아졌다. 특히 밤에 황금빛으로 변한 에펠탑을 보고 있으면 난 프랑스 시민이 아님에도 알 수 없는 뽕(?)에 차올랐다.


에펠탑은 매 정시마다 반짝거린다. 해가 지면 1시간마다 반짝거리는 에펠탑을 볼 수 있다. 분명히 한 시간 전에 본 반짝 거림인데 나는 매번, 매시간 동영상을 찍었다. 그 반짝거림이 소중해서 동영상으로 붙잡아보려고 하지만 눈으로, 머릿속에 담는 그 짧은 순간의 생생함까지 담지는 못했다. 그게 언제나 아쉽다. 그렇기에 파리는 늘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그건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니, 그래도 유람선은 꼭 타자. 토끼는 꼭 파리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유람선을 추천해.”

“이런 날씨에도… 하겠지?”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유람선 일정은 포기할 수 없었다. 파리에 처음 여행 온 사람이라면 난 무조건 이 유람선을 태운다. 요즘 유튜브로 드라마 1시간 몰아보기와 같은 요약본이 흥행하듯이 파리라는 큰 도시를 1시간 동안 요약본으로 훑어볼 수 있다.


이 유람선의 이름은 바토 무슈(Bateaux Mouches)다. 프랑스어로 배는 바토(bateaux), 앵앵 날아다니는 파리를 mouche라고 한다. 배 모양이 날아다니는 파리를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당시에 나는 바토 무슈를 탔었지만 최근에 바토 파리지앵이라고 최신 버전이 더 뜨고 있다. 신혼여행 때는 이 바토 파리지앵을 이용했다.


둘은 거의 차이가 없다. 코스도 비슷하고 가격도 한화로 약 1만 2천 원 정도다. 다만 바토 파리지앵의 경우 배가 좀 더 최신식인 점, 뷰가 더 탁 트인 편이라서 가격 차이도 없으니 웬만하면 바토 파리지앵을 타는 걸 나는 추천한다.


우리는 미리 공식 홈페이지에서 바토무슈 표까지 예매해 갔었기 때문에 이 일정만큼은 삭제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배는 변함없이 운행 중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탑승했다.


★유람선 관광 팁: 일몰시간에 맞춰 타면 석양과 함께 골드 에펠로 변하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대에 타는 게 좋다.

종점 인근에서 찍은 골드 에펠


물론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지만.


파리의 명소들을 배 위에서 보는 건 퍽 낭만적이었다. 센강을 잇는 다리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다리 위 장식들이 고풍스럽다.

비와 함께 초점도 날아가버림

센느 강가에는 청춘들이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 하지만 이 날은 날이 궂어서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명소가 보일 때마다 우리는 최대한 가까이 가서 보려고 했다.

비맞으면서도 찍었던 노트르담 대성당

우르르쾅.


번개소리와 함께 배가 흔들렸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장대비로 바뀌었다. 우리는 2층 야외석에 있다가 호닥닥 1층으로 내려갔다.

캐러비안의 해적 같았다. 블랙당근호에 탑승한 고라니와 토끼는 에펠탑만 보면 셔터를 눌러야 하는 병에 걸렸다.

빗물과 성에가 뒤섞여 꼬질꼬질해진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렇게라도 파리를 보고 싶다. 다른 현지인들은 추운지 몸을 웅크린 채 멀찍이 좌석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았다. 반면 우리는 사진이라도 건져가자는 마음으로 문을 살짝 열고 팔만 빼꼼 내밀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팔이 비에 흠뻑 젖더라도 에펠탑만큼은 사진으로 남기리라. 대한민국의 사진의 민족이었다. 이런 광풍과 빗속에서도 사진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우산쓰고 찍다가...포기

우리는 쫄딱 젖은 심신 미약 상태로 숙소에 복귀했다. 원래는 화이트 에펠을 보러 가기 위해 밤 열두 시반쯤 나갈 생각이었다. 화이트 에펠은 새벽 1시부터 약 15분 간 볼 수 있다. 에펠탑의 완전 소등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우리는 만약 이 상태로 또 나간다면 둘 다 쓰러질 걸 알았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1시까지 숙소 안에서 제한된 화이트 에펠 뷰를 보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당장 내일이면 베니스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러 가야 했다.

드디어 예정된 1시. 갑자기 에펠탑의 황금빛이 폭하고 꺼졌다가 새하얀 눈송이 같은 불빛만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진귀하고 소중하여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루 종일 비 맞고 강풍에 휩쓸려 다녔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신이 또렷했다.


“우와... 저게 화이트 에펠이구나... 예쁘다.”

“가까이서 보면 더 예쁠 텐데.”

“오늘만 사는 거 아니잖아. 지금 나가면 우리 죽을 수도...”

“짐이나 싸자.”


라니 언니는 낭만에 빠져 있으면서도 단호했다. 우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초점도 나가고 밤이라 제대로 찍히지도 않은 유람선 사진들을 보며 웃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내일을 위해 방금 짐을 풀었던 것 같은데 도로 짐을 쌌다. 이게 뭐지. 힘든데. 재밌어.


이후 코로나가 만연하면서 화이트 에펠이 한동안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이날 본 화이트 에펠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다.



[Behind the Scene]

1. 이건 파리 여행기인지 우중 여행기인지 헷갈리는 거 있죠... 하핳. 사진을 보니까 다 물에 절여져 있습니다.

2. 이제 토끼는 라니언니와 베니스로 떠납니다.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벌써 떠나려니 조금 아쉬운데요. 한편 더 쓸까 고민되네요.

3. 힘들었던 여행이 미화되어서 더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4. 1분 소설 공모전에 참가중입니다. 한번씩 봐주세요! (3화까지 있으니 끝까지 봐주세요!)

https://oneminutego.com/novels/f1cf01a8-a652-4a94-9b4e-481b69673bff/episode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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