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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린내 속에서 피어난 향기

<눈물꽃 소년> / 박노해

by 세자책봉
돌아보면,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기억되는 순간은 영혼의 순수가 가장 빛나던 시간, 삶의 정수만을 살았던 소박하고 순정하던 날들이었으니. 언뜻 은밀하고 무심하던 어린 날의 시간이 실상 가장 밀도 높고 충만한 생의 시간이었고 거기 잊히지 않는 나의 절정 체험이, 아직 풀리지 않는 생의 신비가, 굽이쳐온 생의 원점이 빛의 계단처럼 놓여있으니.
- 본문 중에서

박노해 작가의 유년 시절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풀어낸 자전적 에세이
이야기 속에 담긴 공감과 위로, 그리고 삶의 향기

<눈물꽃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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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물어물어 찾아간 길

남겨두기를

장날, 할무니 말씀

아버지와 함께한 기차 여행

빨간 알사탕 하나

짧아서 찬란한

내 영혼의 화인

하늘이 열린 날

나를 키운 동강공소

참 곱지야

천자문 공부

동네 한 바퀴

나의 첫 요리

빛나는 구구단

눈 오는 밤의 방물장수

그래, 늙으면 두고 보자

꽃씨들의 속삭임

당골네 아이

나의 아름다운 지도

오늘은 니가 이겨라

비밀한 그해 여름

어떤 형제

달그림자 연이 누나

도서실의 등불 하나

돌아온 청년

흰 고무신 한 켤레

연필 깎는 소녀

수그리 선생님

싸리댁과 장미씨

달려라, 자전거

꿈을 찾아

눈물의 기도

그날 소년 졸업하다


저자 소개

작가 박노해

본명 박기평(朴基平). 1957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 벌교에서 자랐다. 16세에 상경해 노동자로 일하며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1984 27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냈다. 이 시집은 군사독재 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가 발간되며 한국 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감시를 피해 쓴 박노해라는 필명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으로, 이때부터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2019 『하루』를 시작으로 ‘박노해 사진에세이’ 시리즈 6권, 2020 시 그림책 『푸른빛의 소녀가』, 2021 경구집 『걷는 독서』, 2022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펴냈다. 2024 감옥에서부터 30년간 써 온 책, 우주에서의 인간의 길을 담은 사상서를 집필 중이다.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 〈참사람의 숲〉을 꿈꾸며, 오늘도 시인의 작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기르며 새로운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그리고 익숙한 냄새. 육군 현역 복무를 마치고 예비군 8년 차를 지나 민방위 교육을 받으러 왔다.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거주하고 있는 도시 '구미'이건만, 왜 남정네들이 한데 모이면 어김없이 매번 같은 냄새가 풍기는지. 표현을 적나라하게 하는 편이 낫겠다. 이건 결코 감각기관 한 곳을 자극시켜 인간을 즐겁게 만드는 그 어떤 향기, 향취 또는 꽃내음 따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명력을 가진 남자들의 땀과 페로몬이 뒤섞여 만들어낸 풍미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이건 그냥 구린내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가 벗어나는 걸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동시에 스스로도 돈다. 익히 배운 '공전'과 '자전'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도, 이렇게 지구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시간의 존재를 분명히 느낀다.


구름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질 때마다 내 생명력도 아주 미세하게 줄어들고 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온종일 동네방네 뛰어놀고도 밤새 엄마를 잠 못 들게 만들었던 내가, 이제는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되었다니.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세월이 참 야속하다. 영원히 아프지 않을 줄 알았던 두꺼운 다리 여기저기가 삐걱대기 시작할 때, 눈치챘어야 했거늘. 몸은 점점 늙어가는데, 마음은 아직도 스무 살 청춘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하지만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보다 중요한 건, 지금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다. 그렇다. 나는 지금 민방위 교육 시간에 몰래 노트에 펜을 굴리며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교육을 십 년 넘게 계속 듣는 것도 나름 고역이다. 그래서 이건 단지 죽은 시간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몸부림에 가깝다. 맞다. 궤변이다. 아까 점심을 먹으며 민방위 교육에 가는 나를 부러워하던 부장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노해. 그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연단에 서있는 강사가 마이크에 한껏 침을 튀기고 있는 교육장 안에서 사람을 이토록 사색에 들게 만드는 것인가? 왜 나는 그의 어린 날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련함과 슬픔,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가? 유년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기억은 저마다 다를 것이고 서로 다른 정서를 품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추억에 잠기게 만드는 달콤함일 수도, 떠올리기 싫은 쓴맛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기억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절을 발판 삼아 성장했으니, 우리들은 '추억'이라는 것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추억을 갖고 있지는 않겠지만,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박노해 작가의 추억이 그렇게 특별한 걸까? 아니, 오히려 동시대를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추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어르신들의 이야기처럼, 그의 어린 시절도 특별하거나 특수하지 않다. 그저 그 시대의 일상이었을 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그의 추억이 특별하지 않기에, 그 기억을 엿보던 내가 나의 추억으로 빠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글은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공감'은 특별하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그대로 옮긴 문장은 시골 사람들의 순박한 음성을 생생히 전달하고, 섬세하게 펼쳐진 시절의 풍경은 생각의 층위를 한층 부드럽게 만든다. 또한 곳곳에 남겨진 여백은 독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준다. 분명하게도, 그의 추억이 담긴 글이 나의 추억을 불러내고 있다. 그래서 정정해야겠다. 그의 글은 분명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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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박기평인 박노해 작가는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문구에서 필명을 따왔다고 한다. 그의 글에는 박기평의 유년 시절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에 재주가 있었고, 도서관의 책을 모조리 섭렵할 뿐만 아니라, 웅변으로 상을 휩쓸 정도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재능은 타고나는 것일까?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이미 그 시절에 증명된 능력이었을지도. 반면, 재능이 부족한 나는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나의 책 <아빠 말보다, 엄마 말을 들어라>는 내 유년 시절부터 서른 살까지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박노해 작가의 책 <눈물꽃 소년>과 비슷한 책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책이기도 하다. 나는 조각난 기억의 부스러기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빽빽하게 글을 채웠다. 반면 박노해 작가의 글에는 여백이 많다. 정보 전달을 위한 글이라면 여백이 오류가 되겠지만, 추억을 담은 글에서는 오히려 상상을 자극하는 장치가 된다. 독자가 그 여백을 자신의 기억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또 하나 배운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반드시 논리적 설명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때로는 감정을 일으키는 여백과 공감이 훨씬 더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된다. 언젠가 내가 다시 내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온다면, 이번엔 좀 더 여백을 담고, 공감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써보고 싶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늘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아직 민방위 교육은 끝나지 않았고, 내 주변은 여전히 구린내가 가득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어쩐지 좋은 향취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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