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행동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
관리감독자의 주요 업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어쩌면 그 본질은 단순히 일의 진척 상황을 관리하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은 때로 제3자의 무심함 앞에서 갈피를 잃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일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감독자의 말 한마디일까, 아니면 33도 땡볕 아래서 고온고압의 증기가 흐르는 배관에 온몸으로 불을 지피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몫일까?
감독자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인다 한들, 결국 그 운명은 저들의 손짓과 발걸음에 달려 있다. 나는 그 사실 앞에서 허탈함을 느낀다. 일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코 사무실 책상에 앉아 펜을 굴리는 우리가 아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공구와 함께 살아온 저들이다. 노가다용 목장갑을 끼고, 허리춤에 못집을 찬 저들의 손과 발이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또한, 그들이 움직일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다시금 나는 내가 맡은 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계속해서 제3자의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이 일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나의 역할은 어디까지이며,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옳을까? 더 나아가, 이러한 성격의 일을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어느 자리에 둘 것인가? 여전히 1순위일까, 아니면 2순위, 혹은 그보다도 뒤일까? 어쩌면 인생의 최후순위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왜일까. 이 일은 본질적으로 1인칭 시점으로 살아가려는 나와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생각만 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것의 차이랄까. 그 차이는 종이 한 장보다 얇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을 가진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고민을 멈출 수가 없다.
이런 것이다. 나는 1인칭으로 내 삶을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대부분 제3인칭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여전히 ‘직접’ 살아가는 삶을 동경한다. 커다란 종이에 일정표를 촘촘히 채우고 형광펜으로 표시해가며, 누군가에게 소리를 높이는 이 행위는 과연 공사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본질이 무엇일까? 남들의 삶을 관찰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을까? 결국은 타인의 행동에 의존하고 있는 삶이라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스스로를 경계한다. 이 삶에 잠식되지 않도록. 지금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생존을 위한 사회적, 금전적 의미 때문이지, 이 일이 내 인생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이것은 100세 인생에서 잠시 거쳐가는 하나의 사회적 놀이에 불과하다.
만약 이 일이 전부라고 느낀다면, 내가 얻는 건 아마도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권위의식, 탐욕, 그리고 이기심일 것이다. 내가 본능적으로 꺼리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은 훌륭한 태도지만, 거기에 매몰되는 것은 문제다. 세상은 넓고,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하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는 없다.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느끼고 이해해야 한다.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겸손해야 한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기고 살아가는 것뿐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기보다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는 것이 더 현명한 삶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진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은 넓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내 남은 수명이 70년이라 해도, 병상에 누울 시간을 제외하면 50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잘 선택해야 한다. 남의 선택이 아닌, 온전히 나의 선택. 나의 성향과 의식에서 비롯된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니 각설하고, 글이나 열심히 쓰자. 지금 할 수 있는 나의 선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