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지혜가 담겨오다
대만 2일 차. 타이중 근처 루강에 있는 공업단지에서 종일 업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보랏빛과 주황빛이 절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 이 말은 양치기들이 쓰던 말로, 노을이 지는 시간대가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동물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어려운 시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택시 창 밖의 풍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나는 왜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던 걸까? 낮도 밤도 아닌 애매모호한 시간. 연초부터 천방지축 좌충우돌 실수를 연발하는 나. 마치 이러지도 저러지도, 막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쳐지지도 않는 애매한 나의 상황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려는 것이었을까. 살다 보면 가끔 직관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 또는 단어들이 귀중한 통찰력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연초부터 시작된 나의 실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두고 봐야 알 테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 올 한 해도 역시나 쉽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여운이 길게 남는 하늘이 아니었나 싶다. 올 한 해는 정신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실수는 이제 그만.
숙소에 도착 후엔 같이 일을 한 사람들과 곧바로 저녁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한 몇몇은 로비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후다닥 짐만 방에 놓고 나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다. '엥? 하필 또?'. 그때 프런트 쪽에서 차분하게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누군가 우리 쪽으로 왔다. 어제 분실사건(?)을 맡은 직원이었다. 내가 호텔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잠시 엘리베이터를 멈춰 세운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가방이 타이중 역으로 도착했어요. 내일 타이베이로 가는 길에 찾아가시면 됩니다'. '정말요? 오 마이 갓'. 그렇지 않아도 저녁을 먹으면서 업무차 만난 현지 직원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니 너무너무 잘 된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셰셰. 땡큐 포 유어 헬프 '. 대만에 온 한국인이 현지에서는 영어로, 업무로는 일본어로 소통을 하다 보니 말이 다소 꼬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최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내겐 정말 극적이었다. 이 땅에서 만큼은 의지할 곳 없는 외국인에 불과한 내가 잃어버린 가방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니. 타국에 와서 이 정도 호의를 받아도 되는 것인지 고마우면서도,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업무도 잘 마쳤겠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묵은 체증이 확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호텔을 나서는 발걸음이 참 가벼웠다. 그렇게 대만 3일 차. 타이중을 떠나는 날. 나는 HSR역에서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2년 전, 퇴근하기 1시간 전에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던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 부서는 3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과별로는 4명씩 총 12명, 부서장까지 포함하면 총 1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한데요. 퇴근 전까지 부탁드립니다'. 공사지원부서에서 다음 공사에 필요한 아이템 리스트를 정리해서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퇴근 전까지. 지금, 1시간 전에. 'XX!'. 수백억씩 하는 공사에 소요되는 아이템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걸 굳이 1시간 전에 이야기하면서 시간 내에 달라고 협박을 하는 꼬라지를 보자니 어찌 화가 안 날 수 있겠는가. 욕을 하며 전화를 끊는 나를 본 담당 차장님이 내게 연유를 물었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니 차장님이 말했다. '혼자 하지 말고, 과별로 뿌려서 취합받읍시다. 급한 거니까 다 도와줄 겁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내가 시야가 좁았구나'. 굳이 바쁜 사람들한테 부탁하기보다는 웬만한 일을 혼자서 처리하다 보니 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걸 꺼려했는데, 이게 점점 고착화되다 보니 오히려 도움을 구해야 되는 상황에 닥쳤는데도 도움을 구할 생각을 안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이번 대만 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방을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도움을 구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도움을 구할 생각은 못했다. 도움을 구하니 이렇게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사업의 기초 중에 기초로 꼽는 것이 사람관리다. 개인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불가능하고. 사업이 커질수록 일이 많아지니까 도움을 줄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그들과 일정 보수를 지급하는 계약 관계를 맺게 되고 우리는 그걸 직원 채용이라고 부른다. 주변에 도움을 구할 줄 아는 것. 회사에서 업무를 하면서도, 개인업무를 하면서도, 인생을 살면서도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싶다. 어려움에 처한 입장에서는 남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게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받는 사람들은 별로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해보자. 일단 주변에 도움을 구해보자. 보통 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것을 더 후회한다는데, 최소한 후회는 안 하지 않겠는가? 인생은 호사다마. 누구에게나 좋은 시절이 있으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누구는 특별한 인생을 살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도움을 요청받으면 어떻게든 도움을 줄 것이다. 결국에 우리는 비슷한 존재들이니까.
짧은 글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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