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에는 든든한 추어탕 한 그릇

by traby


특이한 일이지만 정작 마주한 순간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학사 학위증을 받던 일이 그랬다. '첫 발급은 실물로 수령을 해야 하고, 추후 재발급은 하지 않습니다'를 당당히 고지하는데 당시에는 아, 원래 그런 건가? 싶더니만 다시 돌이켜보니 뭔가 이상했다. 전산이 발달한 이 시대에 그 종이 하나 재발급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애초에 종이 한 장에 어느 정도의 권위를 부여해야 하나 싶은 것이다. 다녀왔다는 기록 자체가 중요한 거지.


유사한 위화감을 남대문 시장께 있는 여느 먹자골목들을 돌다 보면 느낄 수 있다. 한국어만큼 자주 중국어며 영어 간판들을 무감각하게 지나치다 돌이켜보면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고객에 맞게 응대하는 건 둘째 치고, 명동을 거쳐 남대문 시장까지 외국 관광객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오나 둘러보면 막상 앉아 먹고 있는 사람들은 또 한국인이다. 그리고 다시 골목을 걷다 한글로만 고스란히 써진 추어탕 집 간판이며 메뉴판을 마주하면 무엇이 보편적인 것인지 헷갈리곤 한다. 이 골목 참 특이하네. 아니, 저 집 참 독특하네.


그리고 어릴 적 먹던 일요일 아침 메뉴 또한 지금 돌이켜보니 녹록지 않았다.

보통 다른 집들은 일요일 아침에 과연 무엇을 먹었을까. 저 옛 CM송 마냥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었을까. 아니면 주말 특식으로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먹었으려나. 물론 보편적인 일요일 아침은, 좀 더 풍족했을 토요일 저녁의 재사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날 저녁 먹은 찌개면 다음날 아침 찌개고 그런 게 일상 아닐까.

내 기억 속의 일요일 아침은 항상 추어탕이 그득한 냄비가 끓곤 했다. 전날 저녁에 추어탕을 먹은 것도 아닌데, 지금 돌이켜보니 여간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일요일 아침 이야기에 앞서 작게 고백하건대 그리 붙임성 있는 자식은 되지 못했고, 때문에 아버지는 다소 멀어 보였다. 마냥 내 붙임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생각한다. 평일에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오시니 저녁을 같이 마주할 일도 없었고, 학업 이야기며 관심사를 논할 기회도 좀처럼 있지 않았다. 그리고 흔한 사춘기의 시기에 자기 방문 닫고 방에 얌전히 머무르는 정도는, 허용 범위 아닐까.


그런 류의 자식임에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요일을 가득 채워 사는 것은 아버지의 소명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쯤은 되어야 아침 일곱시께 부지런히, 아들놈이 일어났나 슬쩍 보시고 아침 같이 먹을래 할 수 있던 것 아닐까. 아버지는 전날의 저녁 찬이며 국거리를 데우며 산길 좀 걸어보려는데 같이 나설래 하시곤, 그분의 일요일 계획을 두리뭉실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낮에는 산길 따라 걷다가 오후에 집에 와서는 한잠 자고, 저녁 장 같이 보고서는 일요일을 마무리하련다. 물론 한창 자라나는 나이에, 잠을 더 잤으면 잤지 따라나서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일어나는 시각이 일곱 시에서 여덟 시, 여덟 시에서 아홉 시로 미루어지며 이 작은 아침의 회합이 사라질 무렵, 추어탕의 얼큰한 향이 아침을 채우기 시작했다. 늦게 일어나 주방으로 슬금슬금 나서면, 추어탕 사놨으니 밥 한 술 뜰래 하시며 어머니가 국을 데우시는 것이다. 아빠는? 하고 물으면 추어탕 사고 운동하러 나가셨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의 일요일이라는 모습은, 그 시절에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정말 부지런하시고 나와는 사뭇 다르게 사시는 구나, 딱 그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그리고는 꾸덕하고 얼큰하게 끓여진 남원식 추어탕으로 아침 한 그릇 하고선, 이게 한국식 브런치구나 하면서 종일 배가 불러 노곤하게 자곤 했다.



한창 추어탕을 먹으며 내 나이며 입지가 체격을 갖춤에 따라, 아버지의 식사에는 제약이 많아져만 갔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정도였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짠 것을 먹으면 안 된다 하고. 그다음에는 고기나 지방도 최대한 피해야 된다 하고. TV 속 내과의사들의 단순한 경고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그 사이 병원에 급히 오갈 일이 수차례 생겼고, 건강에 좋다는 산초 가루며 부추가 무색하게 일요일 아침의 추어탕은 과도한 음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무렵, 추어탕은 그냥 과거의 관습과 같은 형태로 모호하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추어탕을 다시 본 것은, 대학생이 되어 대외활동한답시고 밥도 제 때 먹지 못하고 일하고 공부하던 날이었다.

기분 전환 좀 한답시고 무턱대고 저녁께 시장거리를 나와 걷는데, 왠 작은 골목에 추어탕을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다소 늦은 시각이었는지 가게는 정리 중이었고, 다른 날에 대학 동기들 데려다가 먹기에는 다소 취향이 갈리지 않을까. 혼자 조용히 찾아가 먹어야지 하며 다짐하곤 발길을 돌리다 문득 일요일 아침 기억이 살아난 것이다. 이야, 그때 맛있게 먹었는데.


눈도장 찍어두고도 정작 찾아가서 먹게 된 건, 다시 2년이 흘러 우연히 남대문 시장 부근에서 인턴을 하게 된 때였다. 아, 그때 가려던 곳 있었지 하곤 일을 끝낸 피폐한 모습으로, 저녁 시간에 혼자 앉아도 되나 조심스레 들어가 추어탕 한 그릇을 마주하자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아늑함이 느껴졌다. 익숙한 뚝배기에 미꾸라지를 씹을 새도 없이 곱게 갈아 끓여낸 남원식 추어탕에는, 어느새 타지를 돌며 살아온 내게 집밥 만치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 되어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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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우걱거리며 먹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그 새벽길을 나서 추어탕을 사 왔을까, 비로소 생각이 닿게 되었다. 그 짧은 자식과의 대화를 오가는 길에 담아내셨던 것일까.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추어탕을 먹고 있으면 아버지와 대화하며 식사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헛한 감각은 아닐 것이다.


그날도 그렇게 양껏 먹고는,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대문 시장께 걷다가 추어탕 먹었다 모처럼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셨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지금도 금요일 퇴근길에는 한 번씩 예의 남대문 시장의 골목가에 있는 추어탕 집을 찾는다.


어릴 때 먹던 맛과는 어딘가 다르지 싶다. 그때 먹던 맛이야 아직도 선선하다. 미꾸라지 곱게 갈려 채워진 것은 당연하고, 시래기도 바싹 건조된 것을 다시 뭉근히 끓여 씹는 질감이 살아있고 양도 넉넉하게 포개져 있었다. 거기에 국물의 색감도 좀 더 불그스름하고 짙은 것으로 기억난다. 진한 국물에 항상 아들놈이 좋아한다고 더 챙겨 오신 시원한 콩나물 무침까지 입 안 가득히 채우고 나면, 그보다 든든했던 식사가 있었을까 싶은 맛이었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찾은 추어탕의 맛이 막 부족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미꾸라지며 시래기며 큰 뚝배기에 그득 채워 넣고, 부추도 옆에 그릇을 따로 내어 소복이 내어주곤 한다. 새로 보이는 손님이 여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김치며 깍두기며, 예전 먹던 맛과 같은 시원한 콩나물 무침까지 비는 족족 더 내어주시니 제 돈 내고 먹는 게 민망할 지경이다.


그렇게 푸짐히 먹고 나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뿐만 아니라 혀 끝에도 헛헛함이 감돌곤 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남원에서 살던 집까지, 그 긴 거리를 차로 이동하고 다시 끓인 추어탕은 필연적으로 조금 더 짜고 맵고 되직하게 되던 것 아닐까. 그러니 서울서 그 여느 추어탕 집을 찾아가 먹더라도, 추어탕을 짙게 채운 아버지의 그 오고 가던 시간을 담아내진 못할 수밖에.


그러나 그 맛이 약간 다른 들, 그 너머에 담겨 있는 추억이 바뀔 일은 없지 않을까. 금요일 저녁마다 아버지의 기억이 담긴 일요일 아침 음식을 맞이하는 것은, 여전히 일주일 지탱해주고 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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