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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지 Aug 26. 2020

사랑이 변해버릴까봐

크림을 샀다. 꿀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성분의 크림인데 주름개선과 미백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나 뭐라나.... 점원의 권유에 팔랑대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다른 크림에도 시선을 주었지만, 나는 이내 꿀벌 크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서른두 살 유부녀의 얼굴. 신혼이랍시고 밤마다 야식을 즐긴 탓에, 티가 잘 안 나던 얼굴마저 살이 붙었다. 적나라한 화장실 조명 아래 드러난 내 모습이 요즘은 낯설게 느껴진다. 술을 여러 잔 마신 날의 몰골은 더하다. 눈꼬리를 따라 선명하게 금 간 눈주름, 푹 패인 미간 주름이 유독 눈에 띈다.

거울을 보고 있으니 문득 몇 년 전 들었던 '이효리 - 변하지 않는 건'이라는 노래와 인터뷰가 떠올랐다.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이상해

모든 건 시간 따라 조금씩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위험해
모든 건 세월 따라 조금씩 변하는데


노래와 함께 이어진 인터뷰 내용은 이러했다.
'변하지 않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마음이 힘들어지니까 나이가 들고 주변의 것들이 변하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젊은 날의 외모도, 내 인기도, 남편의 사랑도 변하지 않는 건 없을 테니까.'

그 인터뷰를 보며 나도 나이 들어가는 모습과 변하게 될 많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내 멘탈을 긁는 사건이 발생했다. 때는 남편 H가 맥주를 사러 나간 지난여름이었다. 밀키스가 먹고 싶어진 나는 H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H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메시지도 통 읽지 않았다. 딱히 H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짜증이 치밀었다.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하지만 맥주를 홀짝이다 보니 그런 기분은 금세 잊혔고, 나는 주말 예능을 보며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애매하게 취한 탓에 통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뒤척이다보니 아까 전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누구랑 통화를 그렇게 오래 했냐'고 묻자 어물쩡 '친구'라고 대답하던 H의 표정.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취해서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H를 흘끗 바라봤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그의 휴대폰을 몰래 집어 들었다.


통화 상대는 얼마 전까지 H의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윤지 씨였다. 윤지 씨는 H의 직장 회식에 초대받았을 때 만난 적이 있다. 갓 대학을 졸업한 나이, 밝고 싹싹한 인상이었던 그녀는 처음 보는 나에게도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어느새 H와 윤지 씨가 주고받은 메시지까지 읽고 있었다. 연애와 결혼 도합 8년을 만나 제법 익숙하고 가끔은 권태롭기도 한 우리 사이와 달리, 윤지 씨와 H의 대화에서는 신선함이 느껴졌다. 윤지 씨는 내가 먹어본 지 족히 5 년도 더 지났을 것 같은 추억의 컵밥과 학식 등의 메뉴를 점심이라며 찍어 보냈고, 며칠 동안은 종일 잠만 자고 있다며 킥킥거렸다. 하루하루를 쫓기듯 사는 나와는 달리, 윤지 씨에게서는 20대 특유의 나른함과 풋풋함이 느껴졌다. 내 기억 속의 윤지 씨는 별로 예쁘지도 않고 촌스러웠던 것 같은데, 대화를 읽고 나니 괜히 그녀가 달라 보였다. 파마기가 없는 일자 생머리, 쌍꺼풀 없는 눈, 값싼 틴트를 바른 것 같은 새빨간 입술. 그런데 이 모든 게 어리고 촌스럽기에 예뻐 보이는 거다.

윤지 씨가 나보다 족히 6살은 어리다는 것과, 남편이 연하라는 몹쓸 사실들은  자격지심을 더했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자체로  자존심은 치명상을 입었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덮어버리고 자세를 고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눈두덩이가 뜨끈해졌다. 효리 언니의 인터뷰와 나의 다짐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음이 변해버린 우리 사이' 상상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에 덜컥 겁이 났다. 이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같았다. 쉬이 잠을 이룰  없었던 여름밤이었지만, 나는 H에게 아무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자존심이 지켜질  같았다.




순간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그 여름밤의 기억도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사실 그날 이후 며칠은 시간이 너무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또 여느 날처럼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즐겁고 소소한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여름이 훌쩍 갔고 가을을 넘어, 한 해도 막바지를 지났다.


침대에 걸터앉아 꿀벌 크림을 열심히 바르고 있는 날 보며 H가 말한다.

“너만 좋은 크림 바르냐. 사람들이 다 나보고 오빠 같다잖아.”
 “그럼 너도 바르던지.”
 “이씨, 발라줘.”

휙 드러누워 얼굴을 갖다 대는 H에게 크림을 문질문질 발라줬더니,

 “나 아저씨 되고 늙어 보여도 사랑해줄 거야?”라고 묻는다.

“몰라.”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래도 속으로는 이렇게 말해본다. 우리 서로 변해가는 모습도 부디 아껴주자고, 우리가 함께 보내온 행복한 시간들을 제일 사랑해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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