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지 Jul 30. 2020

콩깍지보다 무서운 권태기

2800일의 H

'500일의 썸머'라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의 주인공 톰과 썸머는 서로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지만 그 사랑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두 사람이 322일이 되던 날, 톰은 썸머를 이렇게 표현한다.


썸머가 싫어.
60년대 헤어스타일도 싫고,

울퉁불퉁한 무릎도 싫어.
목에 있는 바퀴벌레 모양의 얼룩도 싫고,

말하기 전에 혀를 차는 것도 싫어.
그녀의 삐뚤삐뚤한 치아도 싫고,

그녀의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싫어.


누군가를 만나다 보면, 물론 상대방의 어떤 점이 싫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톰에게 분노했던 이유는 대칭을 이루는 완벽한 변심 때문이었다. 그는 썸머와 154일째 되던 날엔 이렇게 말했었다.


썸머를 사랑해.

그녀의 머리칼이나, 그녀의 무릎도 사랑해.

목에 있는 하트 모양의 점도 좋아하고,

가끔 말하기 전에 입술을 핥는 것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웃음소리도 좋고, 그녀가 잘 때 보이는 모습도 좋아.


한 사람의 같은 모습이 이렇게나 정반대의 관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건가? 사랑의 지독한 모순성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나쁜 놈!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나면 썸머가 나쁜 X이라며 욕을 했지만, 나는 오히려 톰에게 깊게 배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두 장면의 진한 콘트라스트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H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와 결혼했다. 우리는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맞이하며 서로를 알아갔다. 상대방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 민낯을 마주했고, 시련 앞에서는 깊은 우정을 다지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겪으며 서로에게 길들여진 관계는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나는 안정감이라는 묵직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안정감이 익숙해지자, 그 감정은 권태로움이 되기도 했다. 다정하게 느껴졌던 H의 침범은, 어느새 귀찮은 잔소리가 되어버렸다. 특히 내 업무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권태로움은 한층 더 날카롭게 변해 우리의 안정감을 헤집고 다녔다. H는 불안에 떠는 나를 다독였다.

“현지야,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좋아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찾아서 하는 모습이 멋있고 대단해."

그런데 어느 날은 H의 위로와 세심한 관심조차 나를 짜증나게 했다. 나는 어느새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세상에 일 잘하고 멋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알지도 못하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로 어쭙잖은 위로 좀 하지마.
그냥 관심 끄고 날 내버려 둬.’


이런 나의 속마음은 표정과 말의 행간으로 새어 나왔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고 조심스레 건네는 H의 말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고, 대화의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아주 조금의 변명을 붙이자면, 나의 상태를 너무 잘 아는 H에게 더 초라한 속마음을 꺼내고 싶지가 않았다고 설명하고 싶다. 매일 밤마다 재잘댔던 우리의 대화 시간은 고요한 적막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건조한 눈빛, 한숨과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들로 H를 힘들게 했다. 어떤 날은 나의 냉랭한 태도에 상대방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모른 체 하며 등져 누워버렸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지속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주말, 나는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가 오랜만에 ‘500일의 썸머' 포스터 썸네일을 마주하게 되었다. 영화 포스터를 보자마자 '톰, 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던 강렬한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문득 톰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토록 싫어하던 사랑의 모순성을 왕창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니! 진짜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그제서야 H가 눈에 들어왔다. H는 내가 경직되어 있거나 눈빛이 달라지면 단번에 눈치를 채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냉랭한 내 표정을 몰랐을 리 없는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그저 잠잠히 기다려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 내 못된 속마음은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을 거다.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H의 눈빛은 너무 축축해보였다.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그 눈이 어느새 슬픈 모양으로 바뀌어 있는 거다. 이를 깨닫자, 마음이 저릿해졌다. 나는 권태를 느끼기 이전의 내 감정을 떠올려 보았다.


‘날 존중해주는 네가 너무 고마워.
너와 함께 있으면 내가 꼭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래서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해져.

나도 세심하고 다정한 너의 모습을 닮고 싶어.'


나의 예민함과 상황에 따라 H의 장점이 모조리 단점처럼 보였다는 걸 알게된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후회와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해서, 잠시 바람을 쐬겠다며 집을 나섰다. 나는 동네 한 바퀴를 커다랗게 걸으며, 내 기분에 따라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준 날들을 곱씹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함부로 대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해졌다.

바람을 쐬고 차분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집에 가서 H를 꼭 안아주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갈 채비를 한 채 서 있는 H를 마주쳤다.

“괜찮은 거야? 나갈 때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걱정했어.”

나는 상대에 대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뒤섞인 채로 감정이 터져버려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를 달래주는 2800일의 H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의 앞에서 숱한 눈물을 보였음에도, 내가 우니까 처음 마주하는 장면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관심을 기울여주는 게 특히나 따뜻했다.

그 소중한 마음들을 잊지 않고 싶다. 훗날 또다시 권태로움이 찾아와도 금세 이겨낼 수 있도록.

작가의 이전글 청소를 지지리도 못하는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