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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지 Jun 03. 2020

너 요즘엔 왜 결혼하잔 말 안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자꾸 기약하게 된다. 함께 차려 먹는 흰쌀밥과 따뜻한 국, 집을 나서기 전 나누는 짧은 입맞춤 등을 자연스레 상상하기 때문인가 보다. 이건 나도 그러했고, H도 그랬다.

우리가 만난 지 1년쯤 되던 어느 날, H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의 결혼과 미래를 종종 상상한다고 말했다. 그때 우리는 고작 스물다섯 남짓의 나이였다. 대학 졸업도 아직 못한 내겐 다소 부담스러운 주제였지만, 그 이야기에서는 H의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부담감을 은근히 즐기곤 했다.


그로부터 3년쯤 지난 어느 날,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 시절 나와 H는 속초와 서울을 오가며 뜨거운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다. H는 직업군인이었고 나는 갓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내게는 너무 먼 미래이자 상상이었던 결혼이 친구에겐 현실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친구는 내게 부케를 받아달라고 했고 나는 부케를 받게 될 모습을 그리다가 자연스럽게 H와의 결혼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스물여덟의 H는 내 앞에서 더 이상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막상 H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자,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감정적 인간의 끝판왕인 나는 끝내 H에게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너 요즘은 왜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 안 해?”


“음…. 이제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얘기는 쉽게 하기 힘들지.”

H의 대답을 듣는 순간, 너무 서운해서 눈동자 가득 눈물이 차 버렸다. 눈물이 흐르는 게 들키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H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때는 회로가 고장 나버린 사람처럼 우리의 관계가 모조리 부정당하는 느낌만 들었다.

나는 극단적인 초등학생이 되어 모 아니면 도 식의 떼를 썼다.

“뭐야. 나 안 사랑하는 거야?”

“아니…. 사랑하지이….”

“그럼 사랑은 하는데 결혼은 안 하고 싶은 거야?”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이제 결혼을 하려면 고려해야 될 게 많아졌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뭘 고려해야 돼? 내가 너와 가족이 되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아니…. 현지야, 너 자꾸 왜 상황을 이상하게 몰아가? 그런 거 아니야. 전혀! 나는 너 진짜 많이 사랑한다고.”

“그런 게 아니라면, 나를 사랑하고 결혼도 엄청 하고 싶은데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면 되잖아. 지금 내가 당장 결혼하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흐어어어어엉.”

그 후 나는 단단히 토라졌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결혼 계획이 있냐고 물어보면 아주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없어요.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라고 대답했다. (과거의 나야, 왜 그렇게 쫌스러웠니….)

이 대화를 다시 문자로 담고 있자니 지난날의 내 모습이 너무 창피하다. (하지만 꾸며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한 달쯤 지났을까. 그간 H의 부서에 일이 많았던 관계로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 장거리의 애틋함은 한 달 전의 서운함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늘 그렇듯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H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현지야. 우리 결혼할까?”


순간 훅 들어온 H의 결혼 이야기에 너무 놀라 심장이 잠깐 멈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뭐?!!!!!!!!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하며) 왜. 갑자기.”

“그냥. 집으로 들어가는 통통한 뒷모습이 귀여워서 맨-날 보고 싶어.”

“에에? 갑자기? 치…."

통통한 뒷모습이라는 말에 ‘치’라고 했지만, 거울에 비친 내 입꼬리는 한껏 치솟아 있었다.

"그래, 좋아.”

감정이 너무나 투명한 나는 한번 튕겨보지도 못하고 속내를 헤벌쭉 드러냈다. 우리는 그렇게 다소 즉흥적인 대화를 시작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일이 다시금 떠올라 H에게 물었다. 그때 왜 갑자기 결혼하자 했냐고. 뜻밖에도 H는 우리의 다툼을 통해 결혼에 대해 다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대답했다.

“너와 결혼을 못 할 이유가 없는데 그냥 막연히 겁을 낸 건 아닌가 싶더라고.”

“뭐야 뒷모습이 귀여워서 맨날 보고 싶었다더니.”

“아, 그것도 맞는 말이지 당연히. 참! 근데 우리 오늘은 뭐 먹을까?”


이제 H는 더 이상 내 딴지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나를 다루는 데 도사가 되었고, 나는 오늘도 H의 화제 전환에 속아 넘어간다.


“된장국 해 먹을까? 배추 들어간 거.”

“그래! 우리 그럼 마트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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