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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환 Jul 24. 2023

금속 파편으로 장식된 정원

노이즈가든 < nOiSeGaRdEn >(1996)

PC통신의 부흥은 곧 인디 신의 태동을 의미했다. 1세대 인디밴드의 대표주자인 언니네이발관과 델리 스파이스가 하이텔 메탈동호회 게시판 내 '모소모(모던 락 감상소모임)'를 산실 삼아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잘 알려진 유명 설화다. 자우림은 나우누리의 록 동호회 '우드스탁'에서 빚어진 인연이 결성 시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전으로 넘어가면 그 시작점에 노이즈가든이 존재한다. 너바나의 등장이 전 세계 청년들에게 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사건이었다면, 이들의 등장은 한국 밴드 음악의 춘추전국시대를 알린 그야말로 기폭제와 같았다.


“우리의 음악은 사운드가든(Soundgarden)에 비하면 소음(Noize)에 불과할 뿐이다.” 모소모의 설립 멤버이자 독설가, 음악광으로 유명했던 윤병주를 주축으로 박건과 이상문, 박경원 이렇게 세 명의 회원이 모여들었다. 이들에게는 모두 그런지 밴드 사운드가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소음의 정원'이라는 명명의 유래는 겸손을 담은 존경의 수식이지만 그룹의 색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표현이기도 하다. 여러 악기를 중첩하며 천천히 페달을 돌리는 예열 격의 인트로에서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흘러나오는 소리는 마치 앞으로 나올 정체에 대한 배려 섞인 경고문처럼 느껴지고, '나는'이라는 문장의 시작은 뒤이어 등장할 두 개의 트랙에 대한 수사처럼 다가온다.


블랙 사바스의 'Iron Man'이 연상될 만큼 강력한 노이즈를 견인하는 '기다려'가 운을 떼고, 기타 음향이 화려하게 진동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가 밴드의 거대한 형상을 눈앞에 턱 내려놓는다. 한없이 어둡고 묵직하며 느릿하게 흘러가는 이상문의 베이스와 박경원의 드럼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 여기에 고해하듯 기교 없이 정렬된 문장들을 하나하나 씹어 삼키고 소화하는 박건의 보컬이 놓이는 식이다. 그것이 노이즈가든의 음악이다. 중력이 짓누르고 하늘은 불길하며 거리를 따라 금속 파편이 장식되어 있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정원.



< nOiSeGaRdEn >은 단순히 DIY 정신에 따라 모인 청년들의 야심찬 인디 데뷔작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해외 음악에 몰두했던 외골수가 다듬은 '헤비니스'에 대한 가장 한국적인 해석에 가까웠다. 헤비메탈이라는 견고한 그릇에 록 음악의 총체를 차례로 담아낸 플레이팅부터 남달랐으며, 영어 가사 위주의 첫 데모와는 달리 오직 한글로만 구성된 노랫말을 택했다는 점도 달랐다.


밴드는 '말해봐'로 1980년대 스피드 메탈의 과감한 속도감을 호출해 능란한 합주를 선보인다. 반면 '우주꽃사슴'은 블루지한 분위기에 서정적인 기타 솔로로 반전을 도모하고, 매끈한 선율을 자랑하는 '유혹' 역시 차분한 모던 록의 잔상을 가져오기도 한다. 슈게이즈를 표방한 '동정'을 거쳐, 10분가량의 대곡으로 정통 메탈의 골자를 완벽히 재현한 '타협의 비'는 탄탄한 기본기의 산물이다. 전곡 프로듀싱을 맡은 윤병주의 손길을 거친 작품은 일관된 기조 아래 음표라는 활자로 얼터너티브의 정체성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젊은 패기, 능숙한 연주, 그리고 너른 음악적 배경을 필두로 한 높은 이해도가 삼박자처럼 결합한 앨범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적 성취뿐만 아니라 < nOiSeGaRdEn >이 지닌 또 다른 가치는 그 누구라도 자신감을 갖고 본연의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전반에 거대한 창조의 정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어떠한 확신이 생긴다. 그 수단이 마침 '메탈'이었을 뿐, 이들은 어떤 흐름과 기호 선상에 놓였더라도 철저히 본인의 소리를 구사했을 것이다.


노이즈가든은 평단과 마니아들의 찬사 속에서 두 장의 앨범을 끝으로 해체했지만, 선배 헤비메탈 밴드들의 의지를 가져와 인디 신의 물꼬를 틈과 동시에 후대 아티스트에게는 영원한 바이블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베이스의 이상문은 훗날 언니네이발관의 멤버로 < 후일담 > 제작에 도모하여 모던록 열풍에 일조했으며, 윤병주는 블루스 전법의 밴드 '로다운 30'에서 꾸준한 활동을 거치며 여전히 계속해서 족적을 남기고 있다. 동명의 앨범이 1996년 등장한 순간, 한국 인디 음악의 밀레니엄은 4년 일찍 도착했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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