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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도 Dec 20. 2022

버려진 옷과 기억을 추모하며

옷장에 틈이 생기자 재빠르게 그 빈자리에 다른 모습의 공허함이 채워졌다.

시부야의 방송국 일을 그만두고 9년간의 도쿄 생활을 정리하고 슬슬 한국으로 귀국할지 고민이 현실로 다가왔다. 먼저 귀국 이사를 알아보면서 나는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옷장에 넘치는 옷을 버리기 위해 편의점에서 쓰레기 비닐봉지 묶음을 샀다. 몇 년간은 물론 올해 봄에 샀으나 입기가 애매모호한 옷을 가려내고 그 결과 45리터 봉투 5묶음 분량이 나와 결과적으로 옷의 약 반절을 버렸다. 처음에는 지인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도 했지만, 주위에 체구가 90kg를 넘어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드물었고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입기 꺼려지는 옷을 타인에게 줄 수 없었다. 옷장에 틈이 생기자 살아남은 옷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빠르게 그 빈자리에 다른 모습의 공허함이 채워졌다.


먼저 방출하기로 한 옷은 몇 년 이상 옷장에 걸려 있던 보라색 캘빈 클라인의 슈트였다. 이명박 정권 당시 20대 초반이던 나는 이성애자인 고등학교 친구 몇 명과 홍콩으로 여행을 갔을 때 금종 (Admiralty)에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 묶었다.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 캘빈 클라인이 있었고 그중 내 눈에 들어온 슈트는 무려 70퍼센트나 세일을 하고 있었다. 남중국의 남자들은 대부분 대나무처럼 호리호리한 사람들이 많아서 홍콩에서 나의 체격에 어울리는 옷이 있는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왠지 이 슈트를 입으면 왕가위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되어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밀실에서 마작을 호탕하게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슈트를 공연과 파인 다이닝에 가기 좋은 옷이라 여기고 지금은 형기를 채우고 있는 이명박의 747 공약만큼 멋진 미래를 꿈꾸며 카드를 긁었다. 그러나 당시 20대 중반에 게이 친구들이 적어서 세상에 갓 나온 아기 호모였던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남자들과 함께 공연을 보거나 파인 다이닝을 하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지도 모르는 지젝의 사막 같은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즉 그 슈트를 자주 입는 일은 없게 되었다. 뉴욕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금융 기자로서 짧게 일했던 당시 나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메트로폴리스 극장에서 열리는 오페라를 감상했다. 오페라에 대해서는 지식이 짧았지만, 뮤지컬 티켓은 100불은 쉽게 넘어가는데 오페라 좌석 끝자리는 때때로 20불 정도 싸게 풀려서 영화 티켓만큼 가볍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혼자 오페라 공연을 봐도 결국 그 슈트를 입은 적은 거의 없었다. 주위에 오페라를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 편안한 모습으로 가서 입기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슈트를 구입했을 때 당시 나의 체중은 80kg대였고 언젠가 운동을 통해 몸이 줄어들기를 기대했지만 10년이 지난 후 나의 체중은 운동과 미식에 더불어 100kg에 육박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극장이나 레스토랑과 거리를 두고 반바지나 운동복을 입고 예전 뉴욕의 오페라 티켓보다 더 비싼 클럽 입장료를 내고 더러운 댄스 플로어에 앉아 소프라노가 아닌 드랙의 퍼포먼스를 보고 이어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도로에 거쳐 앉아 마시는 라이프스타일에 물들고 말았다.


이어 스타일의 변화로 나는 브룩스 브라더스의 셔츠를 버렸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넥타이와 재킷 그리고 구두까지 교복이 지정된 학교를 나온 이유라서 그런지 나는 어릴 때부터 셔츠를 일상적으로 입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대학생 시절 나는 매일 브룩스 브라더스의 셔츠를 5장이나 돌려 입었다. 또한 자취하는 대학생으로서 브룩스 브라더스는 다림질이 필요 없는 셔츠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이어 뉴욕으로 넘어갔을 때도 브룩스 브라더스 셔츠에 대한 사랑은 이어졌는데 거리에서 타인에게 최대한 무해하고 전문적인 인상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치 미국에서 흑인이 안전을 위해 스타벅스 종이컵을 들고 다니듯 말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첫 직장이 정해졌을 때 나는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지내던 집 근처에 있던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브룩스 브라더스의 셔츠를 대량으로 구입했다. 그중 하나가 약 6년간 입어 온 분홍색 줄무늬가 들어간 보라색 격식 없는 셔츠이었다. 나는 이후 직장을 두 번이나 더 옮겼는데 마지막으로 일한 공영방송국에서 일할 당시 나는 회사보다는 댄스클럽에 눈을 뜨기 시작하며 클럽과 셔츠는 궁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클럽에서 가장 좋은 옷은 움직이기 쉽고 남들의 손길을 유도하는 편한 옷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30을 넘기자 젊은이는 옷을 젊게 입어야 하는 게 의무임을 뉘우쳤다. 한편 세간의 사람들은 진지함을 귀찮아하는 게 타인에 대한 배려이자 미덕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어 태평양 너머 미국의 패션은 발 빠르게 바뀌어 갔다. 2020년 Black Lives Matter라는 흑인 인권 운동이 전 세계로 퍼져갔고 같은 해에 미국의 상류층의 유니폼이라고 여겨지던 브룩스 브라더스는 파산신청에 들어갔다. 지금 나에게는 뉴욕에서 산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와 와이셔츠 단 두 장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나와 고별하기 위해 수많은 이벤트 의상을 버렸다. 예를 들어 나에게는 4년 전 주위에 떠밀려 니쵸메에서 드랙으로 무대에 섰을 때 아마존으로 구입한 노란색 투투가 있다. 게이라면 응당 살면서 한 번은 드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인의 파티에서 교양 삼아 데뷔했으나 내가 드랙 퍼포먼스를 해 나가기에는 니쵸메의 현대 드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나에게 드랙을 하라고  종용한 사람은 1990년대부터 드랙을 하던 간사이 출신의 게이인데 당시의 미감으로 남자가 여장한다는 점은 그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지금 21세기의 드랙으로서 활동하기에는 이미 패션, 메이크업, 예술 그리고 기갈까지 아이돌 수준의 종합 기예를 선보여야 하기에 관객의 눈높이가 다르다. 나에게 처음 드랙을 하라고 종용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화장을 해 주고 “처음에만 화장을 도와주지만 다음에는 스스로 화장하라”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드랙이 즐겁기 때문에 스스로 화장품을 사고 분장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나의 마지막 드랙이 되었고 나중에 퀴어 잡지를 제작하고 많은 드랙들을 인터뷰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드랙은 다른 드랙을 도와야 한다고. 암사자가 새끼 사자를 벼랑에서 떨어트린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 그릇된 낭설인 것처럼 다른 어린 드랙이 자립할 때까지 모두가 키워내는 게 드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인지 나는 드랙 공연을 사랑하지만 정작 본인의 드랙 공연에 미련은 더 이상 없다. 이어 니쵸메에서 어느 파티에서도 무명의 고고 보이로서 뛰었고 디제이도 찰나의 B2B이었지만 한번 시도를 해 봤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드랙 의상을 이번에 모두 버렸다. 이벤트 등에서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입는 야한 속옷도 다 버렸고 운동하기에 편한 것만 남았다. 속옷은 비싸면 비쌀수록 수명이 오히려 짧아진다고 본다.


이어 파티와 데모에서 구입한 정체성을 드러내던 티셔츠는 반절이나 버렸다. 이를테면 한때 일본의 대학생으로서 “Tokyo Against Racism”이나 “원전 재가동 반대” 또는 “My Body My Choice”라는 시대의 외침이 반영된 문구가 인쇄된 티셔츠가 나에게는 20장 정도 있었다. 자민당의 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티셔츠. 국회 앞 데모 당시에 입었던 티셔츠. ANTIFA의 티셔츠. 퀴어와 페미니즘의 연대를 위한 티셔츠. 퀴어 프라이드의 티셔츠. 미국 보험의 사각지대에 빠진 흑인 디제이의 병원비 모금을 위한 티셔츠. 데모 파티 예술 등등 코로나 이전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던 옷들에 나는 결별을 고했다. 자주 입는 옷이 아니라면 다 버렸기 때문이다. 아베의 독재적이며 반민주적인 언행에 반대하던 티셔츠도 이제는 아베 암살과 함께 의미를 상실했다. 나는 작년까지 일본의 공영방송국에서 숨김없이 이데올로기가 담긴 옷들을 입었고 같이 일했던 방송국 인력 사람들은 외국인의 이름을 가진 나에게 찬사 또는 경멸이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버리기 직전 나는 그 옷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니 대부분 옷감이 구겨졌고 헤어졌다. 19세기말의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잘 입어야 하는 이유>의 저자 아돌프 로스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자고로 “올바르게 입는 것은 그 문화의 중심지에서 튀지 않게 입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신주쿠 블루보틀에서 파타고니아의 합성섬유 소재의 옷을 입고 맥북을 열어 글을 다듬었다. 나의 맥북도 옷도 모두 간결하게 콘크리트 같은 회색이다.


내가 버린 옷을 바라보고 나는 어떤 색의 옷이 어울리는지 (예를 들어 본인의 피부가 웜톤인지 쿨톤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보라색 슈트를 포함하여 베를린에서 구입한 나이키의 성조기가 프린트된 재킷 등 울긋불긋한 옷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튀는 모양의 옷은 사라지고 오로지 시대 변화에 무감각한 클래식한 아이템만이 남았다. 옷장에 걸린 셔츠와 재킷 그리고 바지의 색깔은 엄격하게 그레이와 네이비 그리고 블랙밖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더 이상 도발하고 싶지 않다는 나의 새로운 마음가짐이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내친김에 얇은 플라스틱 옷걸이도 모두 버렸다. 비싼 옷 싼 옷 등 귀천 없이 공평하게 버려졌다. 하지만 이 해방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여유가 있는 옷장을 바라봤고 쾌감을 느꼈지만, 옷장을 통해 나의 삶에는 직접적인 커다란 변화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옷장이 비면 새로운 옷을 꿈꾸게 되었다. 옷은 떠나도 집착은 남는다. 셔츠를 다리기 위해 약 2만 5천 엔이나 하는 다리미대가 가지고 싶어졌다. 예전에 일본의 어느 백화점 에디터가 왜 비싼 다리미대를 써야 하는지 스스로 시연을 하는 동영상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꽃꽂이를 배우기 위해서는 꽃보다 꽃병에 돈이 들어가고 다도를 즐기려면 결국 비싼 다구를 사야 하듯이 옷보다는 먼저 비싼 다리미대를 사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이다.


마침 며칠 후 10년 넘게 입은 다운재킷이 벽에 걸린 금속 액자에 걸려 찢기고 말아 추가로 버리고 말았다. 12월의 도쿄는 나날이 추워지고 있었고 나에게는 따뜻하고 가벼운 다운 재킷이 필요했다. 신주쿠역 빔즈 백화점에 가서 피레넥스를 입어보고 내친김에 결국 이세탄 백화점으로 이동해서 몽클레어의 다운재킷을 걸쳐봤다. 몽클레어의 다운재킷은 맵시 있고 가벼워서 편했다. 몽클레어의 마야를 입어보고 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바로 이거라고 느꼈다. 하루 만에 3만 엔 패딩에서 20만 엔 패딩까지 입어보고 비싼 옷은 왜 비싼지 마치 펜트하우스를 향해 솟구치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처럼 몸소 체감했다. 하지만 나는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의 에르메스 매장을 지나 거리로 나오자마자 추위에 기겁하고 길 건너편의 눈에 들어온 유니클로에 들어가 처음으로 간편하게 내복을 비대면 무인 체크아웃으로 구입했다. 이는 나에게 있어 몇 년 만에 구입하는 유니클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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