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도 Feb 11. 2023

긴자에서 친구와 소바를 만들고 눈물을 훔쳤다

프리섹스가 넘치는 미래를 꿈꿔온 나에게 신념 따윈 쉬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도쿄에서 한겨울을 보내면서 옷을 버리고 단 한 벌의 패딩을 찾아 신주쿠의 백화점과 옷가게를 헤매다가 나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주방 용품과 그릇으로 바뀌었다. 취침 전에 인테리어 유튜브를 틀어 놓고 자는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홍콩에서 친구가 도쿄를 방문했다. 친구와 나는 뉴욕의 대학원에서 만났고 우리는 매일 같은 세미나 수업을 들으면서 같은 아시아 유학생으로서 친해졌다. 그녀는 유럽의 어느 유서 깊은 대학을 나왔고 나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기에 자국이 아닌 다른 국가를 거쳐 뉴욕에 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성과 게이라는 묘한 조합이 서로에게 안정을 주웠고 이어 우리는 재학하던 대학원의 남자들에 대한 평가를 공유했다. 학부 시절 철학을 전공하고 대도시에서 매일 가계부를 꼼꼼히 기록하는 성격을 가진 그녀는 나를 보고 철없이 낭만적이다고 놀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나는 운이 좋게 센트럴 파크 바로 옆에서 방을 구해 거주하게 되었다. 브라질 출신의 할머니가 룸메이트이었는데 이어 이분은 나에게 주짓수를 수련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셨다. 기숙사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마치고 아직 뉴욕에 낙엽이 물들기 전 나는 친구를 집에 초대해 소바를 만들어 대접했다. 소식가이자 유럽에서 입맛을 다진 친구에게는 왠지 소바가 어울렸다고 생각했다. 일식 슈퍼마켓에서 소바를 샀고 부엌에서 면을 끓었다. 단출한 방에서 친구는 소바를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졸업 후 우리는 뉴욕에서 각각의 회사에서 일하다 서울과 홍콩으로 흩어졌다.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한국에서는 옷을 따뜻하게 입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던 무렵이었다. 약 3년 후 우리는 서울에서 콘퍼런스에서 재회했고 다시 3년이 지나서 도쿄에서 재회했다. 2019년 홍콩에 가서 그를 만나려고 했으나 마침 그러나 10월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비행기가 취소되고 말았다. 당시 홍콩은 마천루에서 시민들이 몸을 던지면서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고 친구는 거리와 경찰서에서 시대와 광복의 종언을 목격했다.  


이어 난데없이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었고 세계에 흩어진 우리들은 언제 만날지 모르는 날을 고대하며 3년이 흘러가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이케부쿠로에서 사천음식을 먹다가 문득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설날에 친구가 도쿄로 오겠다고. 친구는 도쿄에서 소바 쿠킹 클래스를 예약했다고 말했고 같이 듣자고 했다. 6년 전 뉴욕에서 만든 소바를 떠오르며 나는 바로 수업에 가겠다고 답장을 했다. 이어 한 달 후 긴자의 어느 카페에서 친구와 친구의 남편을 만났다.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인 남편은 등산을 하다 산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깁스를 두르고 목발을 짚으며 도쿄까지 왔다. 목발에 의지해 걷는 남편을 부축하며 우리는 긴자의 어느 사설 “소바 연구소”에서 수업을 들으러 갔다.


선생님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고 도착한 연구소 겸 부엌에는 벽에 책과 기구가 빽빽이 수납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쯔유 국물을 우리는 방법과 소바 제면을 위한 반죽부터 자루 소바를 즐기는 방법을 꼼꼼히 가르쳐 주었다. 쯔유의 맛을 해치기 않기 위해 고추냉이는 쯔유에 풀지 말고 혀에 살짝 올린 후에 국수를 삼키라는 팁이 기억에 남는다. 미쉐린 별을 받은 제자를 4명이나 배출했다는 선생님의 수업은 약 2시간 정도로 예상했으나 4시간이나 이어졌고 허기에 집중력을 잃은 친구의 남편은 소바 반죽을 대강대강 자르고 말았다. 수업을 듣는 도중 - 그러니까 선생님이 파를 연필 깎듯이 자를 때 -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아직 남자친구가 없냐고. 나는 선생님의 귀도 있으니 나중에 알려준다고 했고 수업에 집중했다. 우리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몇 년 만에 나눈 수업 도중 잡담을 나누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의 다음 일정을 위해 지하철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친구에게 나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친구야 게이로서 나는 다음 섹스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할지 모르겠어. 즐겁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말했다. 돌아보니 나는 이런 자유로운 생활을 정말 즐기는 것을 넘어서 오히려 훈장처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목발을 짚으며 걷는 남편과 함께 걷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나누자 나는 갑작스럽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때아닌 1월이지만 나는 이게 일본의 그 유명한 삼나무 꽃가루 알레르기라고 둘러대었다. 이어 긴자를 걸으면서 나는 “과연 나는 행복한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시울이 넘치고 말았다. 프리섹스가 넘치는 미래를 꿈꿔온 철없이 낭만적인 나에게 신념 따윈 쉬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친구를 만나고 소바를 만들기 며칠 전 나는 아침 일찍 눈이 떠져서 무심코 자전거를 타고 도쿄 도심에서 에노시마까지 갔다 왔다. 사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도쿄에서 서울로 미련 없이 떠나고 싶었지만 하코네 고게를 넘을 자신도 없었다. 나카노에서 출발해서 서쪽을 향해 타마가와를 건너가 츄오린칸에서 남쪽으로 꺾어 에노시마에 도착했을 때는 정작 어두워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도쿄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우선 요코하마의 비즈니스호텔을 예약했다. 요코하마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그다음 점심 무렵 도쿄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어느 이름 모를 연상의 남자와 예상에도 없던 섹스를 가지고 말았다. 차이나타운에서 이름도 모르는 상대방으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정중한 육체적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전거 여행 중 현지 주민과 즉흥적으로 섹스를 하는 사이클리스트는 세상에 몇 명이나 될지 세상은 모르는 법이다. 눈물을 닦아내자 친구는 “아니 여자를 사귀지 그래? 시도는 해 봤니?”라고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고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여자와 사귄다고 해도 나는 아마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할 거야.”



긴자에서 시부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면서 나는 영어로 나의 최신 섹스 라이프를 고해성사하듯이 이야기했다. 이어 나는 친구에게 뉴욕에서 공부하고 살던 당시 나는 모든 인종과 섹스를 하는 목표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보란 듯이 그 목표를 달성했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갔다. 2016년 시리아 내전 당시 알레포에 폭격이 가해지고 난민들이 국경을 탈출할 무렵 어플을 통해 나는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아랍 남자와 유대인 남자 두 명을 일주일이라는 간격을 두고 섹스를 가졌다. 나는 난민을 도울 수도 없었고 시리아에도 갈 수 없었고 심지어 중동에 가더라도 이란의 경우 게이들은 게이라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지고 린치 되거나 구금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나는 뉴욕에서 중동에서 온 게이와 육체적 관계를 가진 후 언젠가 그들의 정세와 문화에 대해 조금 가까워지며 이 지옥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을 친구에게 고백했다. 당시 우리가 다니던 학교에는 정기적으로 기독교 단체가 한국인 학생회에 불고기와 잡채를 제공했으나 나는 뉴욕 노점의 하랄고기를 씹으며 중동에서 온 남자들을 찾아 헤맸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지하철을 타면서 친구 부부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이는 또 이른 삼나무 꽃가루 알레르기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만약 내가 뉴욕에서 경험한 “망한 섹스” 회고록은 재미있을까 질문을 했지만 친구는 대답을 흐리고 말았다. 우리는 바로 시부야 지하철 인파들에게 바로 압도되었기에. 사실 이성애자인 그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언젠가 쓸지 모를 회고록의 가제까지 그녀에게 알려줬다. 친구는 나에게 묻지 않았지만 왜 사람들이 나보고 문란하게 산다고 하면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내일의 남편을 위해 오늘 다른 남자와 잠을 잔다고. 문장을 직접 찾지 못해서 인용을 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읽어 기억해 낸 알랑 드 보통의 말을 빌리자면 오늘 타인으로부터 배운 키스와 애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만약 이를테면 오늘 내가 처음 만난 스즈키 군의 귀를 추릅추릅 빠는 것은 10년 전 이름 모를 아저씨가 정성스럽게 내 귀를 빨아줄 때 혀에서 고막으로 직접 전달되는 청각적인 기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휠체어를 탄 시민들이 지하철에 탑승하지도 못하고 끌려가고 압도적인 다수의 경찰들에게 직접 위협을 받은 1월이었건만 같은 달 지하철을 탄 도쿄의 시민들은 목발에 의지하며 걷던 내 친구의 남편에게 친절했다.


나는 친구에게 도쿄를 빨리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에게 동시에 작년 싱가포르의 어떤 포지션의 면접을 봤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시절부터 가장 들어가고 싶은 회사의 최종면접까지 갔지만 낙방하고 말았다고. 친구의 남편은 나에게 싱가포르의 게이 인권 상황에 대해 알고 있다고 물어봤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싱가포르에서는 동성애자의 인권보다는 아마 옆방 사람들과 분리될 수 있는 부동산 문제와 사생활 보장권이 먼저이지 않을까라고 했다. 내가 듣기로는 싱가포르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의 월급까지 물어본다고 한다. 이어 집에 돌아와 수업을 마치고 직접 제면 한 생면을 냉장고에 넣으며 게이의 섹스라이프과 소바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공간에 구애를 받는다는 점이다. 섹스도 소바도 쉽게 하려면 쉽고 까다롭게 하려면 한없이 어려워지지만 결국 장소, 즉 부엌의 크기와 자취 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소바나 파스타를 반죽을 거쳐 제면까지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도시의 청춘들이 자신의 부엌에서 밀대를 굴릴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친구는 알까. 남자는 25살부터 싱글이 아닌 퀸사이즈 침대에서 자야 한다는 어느 게이의 조언을 실천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한없이 적대적인 도쿄 부동산에서 지금의 자취방을 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이야기를 듣던 친구 남편 왈 싱가포르는 정말 이상한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홍콩에 산다는 것에 대해 말을 아꼈다. 나는 감히 홍콩에 대해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묻지 못했다. 이어 나는 도쿄는 아시아 최대의 게이 커뮤니티가 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다고 했다. 친구 부부를 시부야의 전망대까지 바래주고 나는 며칠간 방에서 소바를 끓어 먹었고 이어 신주쿠의 백화점과 상점을 헤매면서 쯔유그릇과 면을 담을 대나무채를 찾아 헤매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르쿠르제 무쇠냄비로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소바를 끓어먹으니 면이 냄비에 달라붙어서 마카로니 파스타처럼 면이 짧아졌다. 이는 4리터를 넘어가는 국수용 냄비를 사면 해결될 문제였지만 나의 퀸사이즈 침대보다 좁은 나의 주방에는 현실적으로 들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완벽한 소바를 온전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물거품 같은 꿈은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어머니가 쓰던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던 면수를 바라보며 나는 앞으로 몇 년을 걸쳐서라도 친구 앞에서 벌컥 쏟아진 눈물의 의미를 회상하고 고민할 거라고 직감했다.  


작가의 이전글 버려진 옷과 기억을 추모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