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ra Days Sep 01. 2024

카메룬을 품은 따뜻하고 친절한 영혼

카메룬에서 자라 뉴질랜드, 스위스, 태국을 거쳐 한국 거주 중인 한강희님

강희님을 알게 된 것은 공통 지인을 통해서다. 내가 어른이 된 TCK들을 인터뷰 중이라 하니, 가까운 지인이 흔쾌히 강희님을 소개를 해주었는데 강희님을 소개받을 때 정말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와닿았던 표현은 "카메룬에서 백일잔치를 한 분이에요"라는 말이었다.


나 역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살아서 아프리카의 생경한 삶을 맛보기로 경험을 해보았지만, 카메룬이라니? 그리고 카메룬에서 백일잔치라니? 나에게 카메룬은 축구의 나라, 그리고 불어를 쓰는 나이지리아 근처 나라 정도로만 인식이 되어있었기에 그녀의 삶과 경험이 너무 궁금했고, 강희님에 대한 소개를 듣자마자 너무나도 바로 연락을 해보고 싶었다. 

 

강희님과 직접 인터뷰를 위해 이야기를 나눠보니, 강희님은 정말 따뜻하고 단단한 마음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그녀를 오랫동안 알아오지 않았기에 그녀의 그러한 면모가 단순히 그녀의 TCK 경험과 성장 환경 때문이라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몇 번 오고 간 이메일의 문단 속에서 나는 그녀의 그러한 부분들이 그녀만 겪을 수 있던 특별했던 성장경험의 영향도 분명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선사해 주신 특별한 경험 덕에 카메룬이라는 곳에서 자라고, 학업으로 인해 뉴질랜드, 스위스, 태국 등을 거쳐 신기하게 현재는 한국에서 거주 중인 그녀는 특유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호스피탈리티 (Hospitality) 전문가로 거듭나서 세계를 누비게 된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강희님께 감사 말씀을 드리며, 내가 그녀의 인터뷰를 정리하며 느꼈던 생동감과 즐거움이 부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전달이 되기 바라는 마음이다.


Photo by Edouard TAMBA on Unsplash




 1. 안녕하세요, 강희님! 반갑습니다.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3개월 만에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가서 중학교까지 있다가 뉴질랜드에서 3년, 스위스에서 4년, 태국에서 6년 살다가 작년에 처음으로 한국으로 들어와서 살고 있는 한강희입니다.


카메룬은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고 계셔서 엄마는 저를 낳고 ‘fit to fly’ (출산 후 비행 적합 시기) 일 때 바로 먼저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가셨어요.


저는 카메룬으로 가서 유치원, 초, 중학교를 다니면서 15년 정도 있었고, 고등학교 진학으로 뉴질랜드로 혼자 이주하여 3년 정도 살았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옵션 중 스위스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선택하여 4년 동안 스위스에서 거주를 한 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유럽을 떠나기가 너무 싫어서 프랑스에서 4개월쯤 있다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러 태국으로 갔어요.


그런 다음 2021년 4월 1일, 한국으로 처음 들어와서 쭈욱 살고 있어요.


저는 대학교에서 전공을 호텔 쪽으로 해서 일 역시 계속 호텔일을 해왔고 코로나 이후에 한국으로 와서는 온라인으로 고객을 응대하는 일로 바꿨어요. 호텔에서 서서 일하면서 사람을 응대하는 것에 저도 모르게 지쳐있었는지 앉아서 온라인으로 응대하니까 또 색다르더라고요 :)


여담이지만 저는 항상 원래 이름인 한강희로 불려 왔어요. 스위스에서는 K (케이)로도 불렸었어요. 태국 가서는 사람들이 너무 헷갈려해서 Kay로 바꿨었죠! 그리고 한국 스타트업에 들어가서는 아주 랜덤 하게 갑자기 Kathy로 되어서… 그냥 한강희라고 불리는 게 제일 편합니다!   


2. 카메룬에서 거주한 한국인이라니 정말 손에 꼽을만한 특징인 것 같아요. 카메룬은 어떤 곳인가요?   


저는 태어난 지 세 달쯤 되자마자 카메룬으로 가서 백일잔치를 했고, TMI지만 최근에 아버지가 전화를 주셔서 카메룬에 간지 30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세월이 참 빠르죠?


카메룬 떠난 게 오래전이라 그때의 기억으로 말씀드리자면…


카메룬은 아프리카 서쪽에 있는 저개발국입니다. 저에게는 고향 같은 의미의 ‘집’이어서 좋은 기억들이 더 많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생활하기에는 어려운 나라입니다.


우선 인프라가 잘 안 되어있어요.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완전 시내 센터가 아니면 도로 사정도 많이 안 좋았어요. 정전도 엄청 자주 되고 물도 끊기고… 도로에 설치되어 있는 가로등(이라고 하나요?)에 가끔 전구가 없었어요. 이유는 사람들이 훔쳐가서요. 기본적인 생활이 많이 어려운 나라지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온순한 느낌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훔쳐간 가로등의 전구를 훔쳐간 사람이 직접 쓸 때도 있고, 팔 때도 있었어요. 길거리에서 정말 이것저것을 다 팔아요. 담배 1개, 한 갑이 아닌 정말 한 개비씩도 팔고요.


뱀, 사슴도 팔아요. 이건 식용으로 팔았을 것 같은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다 사서 집에서 키우셨어요… �

바닷가에서 팔던 바다거북이도 사서 집에서 키웠고, 거위, 닭, 돼지, 개미핥기, 사슴, 원숭이, 개, 고양이, 침팬지 등등 뭘 많이 구조해서 키우셨죠. 그때의 영향으로 저는 아직도 동물을 많이 사랑한답니다.


우리 집 오공이와 함께 (손오공 할 때 오공)

또, 카메룬은 프랑스 식민지였기에 불어권 나라입니다. 학교들도 불어를 쓰는 학교들이 대체적으로 많고 프랑스 학원, 프랑스 슈퍼, 프랑스 회사들이 많아요. 물론 그중에서도 미국 학교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다 불어로 해야 합니다.


카메룬은 이슬람 국가예요. 그래서 이슬람 달력에 맞춰 공휴일도 추가로 있었죠.


아, 카메룬에서 정말 특이했던 부분은 축구에 진심인지라 축구 시합에 이기면 다음날은 공휴일이었어요! 정말 신기하지요? (이제는 안 그렇다고 하네요.)


카메룬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꼭 한번 가봐!”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살았으니까 재밌게 그냥 지내고 그랬는데, 굳이 안 가봐도 되는 것 같아요. 딱히 유명지도 없고 봐야 해! 할만한 것도 없어요. 굳이 뽑자면 바닷가가 좀 특이해요. 화산의 영향으로 흑사장 바닷가를 볼 수 있어요.


흐름이 다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저도 덕분에 카메룬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이것저것이 막 생각나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해보았어요.   


3. 부모님께서 아직 카메룬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의 카메룬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안 가본 지 오래되어서 지금은 어떤지는 잘 모르겠네요.


들은 바로는 카페도 많이 생기고 몇 년 전에 첫 피자헛이 생겼다네요! (프랜차이즈는 처음이에요!)


또 최근에 몰 (mall)이 하나 생겼는데 대규모에 첫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건물이어서 뉴스에도 나오고 유튜브에도 화제가 되었었어요!


그거 말고는 아직도 정전이 잦고 물도 안 나올 때 많고 인터넷은 한없이 느리고.. 그렇다네요! 그래도 아주 천천히 발전 중인 것 같아요!  


4. 카메룬에는 어느 정도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나요? 그곳에서의 한인의 삶이 궁금합니다.   


부모님께 여쭤보니 선교사 포함 대략적으로 70-80명 정도라고 해요.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고 합니다.

제가 살고 있을 때는 100명이 쪼금 넘었었어요.


제가 살았던 곳은 경제적 수도인 두알라(Douala)라는 곳이에요. 실제 행정적 수도인 야운데 (Yaounde) 보다 한국사람들이 더 많이 거주하는 곳이고, 거주하시는 대부분의 한국인 분들은 개인 사업을 하세요.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 구요.


최근에 마트 오픈한 분도 계시고 식당 하는 분도 계세요. 그 외에는 사진관 사업, 자동차 수리 사업, 스포츠 용품 사업 등등이 있어요.


대사관은 야운데에 있지만 한인들이 두알라에 더 많아서 명절 행사는 두알라에서 하는 게 더 커요. 다 같이 모여서 게임도 하고 노래방도 하고 할 건 다 했었어요! :)  


5. 카메룬에 거주하시다가 뉴질랜드로 이동을 하시게 된 계기와, 그곳에서의 학창생활이 궁금합니다.   


카메룬에서 미국식 학교를 쭉 다니다가 고학년이 될수록 학생들이 하나씩 하나씩 줄어드는 바람에 9학년때는 몇몇 과목을 인터넷 스쿨로 듣기 시작했고 10학년부터는 전체 수업이 인터넷 강의로 진행된다고 안내를 받았어요. 교육을 중요시하시는 부모님께서는 절대 용납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죠.


그렇게 부모님께서 저를 어디를 보낼까 신중하게 고민을 하시다가 큰아버지께서 계신 뉴질랜드로 선택했어요.


지구 반대편에 있던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는 영국식 GSCE가 아닌 인터내셔널 한 국제 수능 프로그램 프로그램인 IB (International Baccalaureate)를 하는 사립학교를 다니게 되었어요.


사실 고등학교는 저에게 제일 힘들고 싫은 기억이 많은 곳이에요. 아무래도 처음으로 한국인들을 많이 보게 된 계기였고, 같이 지내게 되어서 부딪히게 되더라고요.


저는 자라며 한국인들은 거의 없는 환경에서 컸고 있는 몇몇들도 다 친하게 반말을 쓰면서 지냈는데 거기 기숙사에서 만났던 언니들은 존대를 해야 한다는 둥 인사는 고개 숙여서 해야 한다는 둥 이런… 교육?을 시켜주더라고요.


그 당시의 한국에서의 학생들 문화 또 한국어 은어 등을 몰랐던 저는 적응하기가 많이 어려웠어요. 자연스럽게 한국인 친구는 한 명 (뉴질랜드로 이민 가 있던 친구)만 사귀게 되었고 나머지는 중국인 친구들이랑 놀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에서의 3년은 저에게 전혀 좋은 기억은 없고 학창 시절 생각하면 ‘힘듦’만 생각이 나네요. 트라우마까지도 안겨줬죠.


Culture Day에서 한복을 입고 행사를 진행 중인 모습


6. 뉴질랜드에서 학교를 다니시다가 스위스로 대학교를 가셨어요. 대륙 대 대륙을 오가며 생활을 하셨는데, 자발적인 선택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네, 뉴질랜드에서 커리어 위크 때 대학교를 3개 선택해야 했는데 그때 어쩌다가 호텔 쪽을 알게 되었어요. 그쪽에 관심을 가지고 리서치를 하다가 보니 전 세계의 탑 10개의 호텔 학교들 중에 7개가 스위스에 있더라고요! ‘이왕 갈 거면 유명한 학교를 가자’라는 생각에 세계적으로 호텔 경영 학과로 유명한 스위스를 택했어요.  


7. 여러 언어를 하고 많은 공부를 하며 여러 옵션 중 궁극적으로 호스피탈리티 (Hospitality)라는 전공을 택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결정적인 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때 즈음, 친한 언니가 호텔 학교에 많이 관심을 갖고 알아본 프로그램을 같이 보다가였어요. 그 언니가 호주 애들레이드에 있는 호텔 학교에서 1주일 체험 위크가 있다고 같이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1주일 동안 배운 게 칵테일 만들기, 와인 테이스팅, 요리, 체크인 등등이 있었는데 정말 하나 같이 다 재미있었어요!


그때부터는 정말 본격적이게 리서치를 하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어렸을 때부터 호텔들을 많이 가봤더라고요. 아무래도 카메룬에서 한국으로 넘어갈 때 직항이 없으니 파리에서 또는 남아공에서 놀다가 가고 그랬던 기억들이 나면서 ‘아.. 나의 이런 경험과 언어 능력을 같이 활용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스위스 호텔학교 2학년 때 키친 유니폼을 입고


8. 그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하는 첫 국가로 태국을 선택하셨어요. 그곳에서의 경험이 궁금하고, 왜 많은 옵션 중 태국을 선택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스위스에서 다닌 모교에서 졸업 전 세 번의 학기에서 인턴십을 해야 했었어요. 그중 1학년때랑 2학년때는 스위스에서 인턴을 하고 마지막으로 태국 푸껫에서 인턴십을 했어요. 그때 푸껫이 정말 정말 좋았었어서 꼭 다시 가고 싶었어요!


그때 그 기억에 졸업 후 바로 푸껫을 선택했고 호텔 라이프를 시작했어요. 푸껫에서 3년 동안 일을 한 뒤 성장 할 때가 될 무렵, 방콕에서 또 좋은 기회에 닿아서 더 큰 호텔로 옮겨가서 3년을 더 거주했어요.


태국은 정말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이에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착하고 차별 없이 제가 편안하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나라예요. 지금도 가끔 생각나고 나중에도 꼭 놀러 가고 싶은 곳이에요.


태국 방콕 아난티 호텔에서

9. 5년 정도 태국에서의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한국으로 들어오셨어요. 카메룬과 뉴질랜드에서 사시면서 한국을 종종 들어오셨나요? 한국이 많이 생경하게 느껴졌을 것 같은데 들어오신 이유도 궁금하고, 적응과정이 어떠셨는지도 궁금해요.   


아무래도 학생 때는 방학이 정해져 있으니 방학 때마다 들어왔었어요. 한국에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도 다 계시니 1년에 한 번씩은 들어왔었어요.


카메룬에 있을 때는 여름방학이 2-3개월씩이어서 정말 오래 있었는데 뉴질랜드에 있을 때는 방학 때 한국 대신 저의 고향이자 집인 카메룬을 더 자주 갔었죠.


사실 태국에서 들어온 것도 코로나 때문이에요. 코로나로 인해 호텔/여행업계가 많이 힘들어지면서 제가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정말 ‘일’이더라고요. 출근은 하는데 하는 일이 없으니 너무 지루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된 김에 좀 쉴까 해서 비자 없이 쉴 수 있는 대한민국으로 오기로 결정했어요. 자연스럽게요.


때문이라고 위에 썼지만 사실 저는 코로나 ‘덕분에’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한국사람인 제가 한국에도 살아보게 되었고, 덕분에 업종도 바꿔보고, 덕분에 친척들이랑도 처음으로 이렇게 자주 만나보고, 덕분에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요.

덕분이라고 여겨질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아직도 저에게 한국은 많이 낯선 나라인 것 같네요. 적응과정을 물어보셨는데, 아직도 적응 중입니다 :) 분리수거도 아직 적응 중이고 스팸 전화 오는 것도 아직 적응 중이고 지하철에서 치이고 하는 것도 적응 중이고 겨울이 끝나고 여름옷 빼내야 하는 것도 적응 중이고 그냥 다 아직 적응 중이에요, 열심히 열심히.  


10. 들어오신 후 취직을 하신 회사가 글로벌한 호텔이 아니라, 한국 스타트업이었어요. 어떻게 하다가 한국 스타트업으로 취직을 하시게 되셨는지도 궁금하고 그 과정과 경험에서 느낀 문화차이 등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오기 전부터 한국 호텔 문화에 대해 이미 루머들을 많이 들어서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 호텔에서는 일하지 말아야지 했었어요. 그런 확고한 생각이랑 코로나로 인한 적은 수요가 더해져서 호텔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던 와중 경험을 다 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저의 언어 스킬이랑 고객 상담 스킬을 살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했을 때는 CS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여담이지만 호텔에서 6년 정도 일을 하고 나니까 몸이 많이 상했었어요. 계속 높은 구두를 신고 서있고 식사는 제때 못했기에 육체적으로 조금 더 편하게 일도 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한국 와서 제일 중요하게 본 게 기업문화였어요. 제가 한국에서의 삶에도 적응을 해야 하는데 회사도 힘들면 너무 힘들 것 같았죠. 그래서 영어를 쓰는 곳 아니면 글로벌팀이 구축된 곳, 뭐 이런 식으로 제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았었어요. 그래서 입사한 게 한국계 스타트업이지만, 글로벌한 한 팀이었고 CS를 담당하는 팀이었죠.


제가 기대했던 것은 영어로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고 일은 제가 잘해 왔던 고객 상담이어서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문화차이가 있더라고요.


저는 여태 대기업스러운 제도와 기준안들이 체계적으로 잡혀있는 호텔 문화에 익숙해있어서 스타트업에서의 “free”함이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이런 문제에 이런 대응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하나도 없이 저한테 만들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나가고 기준을 잡고 문서화하고 하다가 보니, 이것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어요.


그 외에 충격적인 부분은… 복장이었어요. 물론 호텔 출근룩은 반바지에 티셔츠였지만 가서는 정장 유니폼에 올백 머리, 진한 색조화장이었는데 IT 회사는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거이 잠옷차림에 쪼리 신고 담요 두르고 다니는데… 얼마나 이상하던지… 그래도 그 부분은 잘 적응했답니다!   


11. 살면서 정체성의 혼돈 등을 겪은 적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어떤 케이스였고, 그때 느낀 바가 궁금합니다.

  

음… 혼돈까지는 안 느껴본 것 같아요.


카메룬에서는 물론 동양인 여자애가 흑인이 많은 나라에서 미국식 학교를 다녔어서 어딜가건 로컬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그랬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커서 별생각 없이 자라왔어요. 뉴질랜드에서는 백인이 많은 나라지만 학교 자체는 동양인이 많아서 그냥 삶이 힘들었지 정체성 생각은 많이 안 해봤어요. 스위스에서는 굉장히 인터내셔널 해서 그런 거 못 느꼈다가 태국에서는 많이 편했죠.


굳이 픽을 해야 한다면 한국에 들어와서 인 것 같아요. 누가 봐도 한국인인 제가 마인드는 아니었을 때? 한국인 직장 동료들이랑 이야기하다가 보면 제가 생각하는 게 좀 다를 때가 있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오픈되어 있던 환경에서 많은 나라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말씀하신 “정체성의 혼돈”은, 운 좋게도, 못 느껴봤어요.   


12.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 혹은 본인이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다른 문화에 노출되고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소수의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단점은 아무래도 친구 관계가 깊진 않은 것 같아요. 가끔 한 곳에 오래 있었던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동네친구’들을 아직도 만나더라고요. 20년 된 친구들,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들 같은 친구들이요.

물론 이제는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지면서 아마 이런 단점이 줄겠죠?  


13. TCK가 취업시장이나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생각해 보면 많겠지만, 제일 큰 장점은 아마 적응력인 거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부모님 없이 15살 때 혼자 뉴질랜드로 가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또 혼자 18살 때 스위스 기숙사 생활했기에 적응을 어디서든 좀 빨리 저만의 방법으로 했던 거 같아요. 그만큼 이직하는 거나 이사하는 거나 이런 변화는 좀 더 순조롭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다른 장점은 아마 언어 능력이라던지 “exposure to other cultures”인 거 같아요. 요즘에는 뭐든지 글로벌한 시장으로 나가는 트렌드이기에 이런 인재가 있으면 회사한테도 좋지 않을까요? ;)  


14.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인맥의 중요성을 잘 몰랐던 저의 실수를 안 하게끔 지인들과 연락을 잘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연락 툴이 얼마나 많아요! 친한 친구들, 선생님들, 동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걸 강력하게 추천드려요. 아마 나중에 더 크면 서로에게 영양가 있는 관계일 거예요. 파이팅 :)  

15. 무언가 ‘다른 나라의 기분’ 혹은 ‘TCK’의 기분을 느끼고 싶으실 땐 어떻게 하세요? (전 옛 사진과 기록을 자주 들춰봅니다)

  

음… 저도 아마 사진들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또는, 가족들이랑 위클리로 통화를 하는데, 부모님은 카메룬에서, 동생은 캐나다에서, 저는 여기 한국에서 하다 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가 있는 공간에 대해 얘기를 하다 보니 항상 TCK인 느낌은 계속 들어요.  


16. TCK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모든 사람이 다르게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 이겠지만, 저한테는 좋은 점이 가득한 기억들과 경험들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도 어린 TCK 시절들을 못 때어 놓을 것 같고 따로 분리시켜놓고 싶지도 않아요.


저의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멋진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