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오만, 사우디 등 일곱 개 국가에서 자란 김주형 님
Third Culture Kid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자전적인 글들을 쓰고 스스로의 경험을 떠올려오던 나는, 문득 나와 비슷하게 자란 Third Culture Kid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기존에 알고 있는, 그리고 건너서 소개를 받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로 결심했다. 인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많은 발달이 이루어지는 10대에 여러 국가에서 자라며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장해 온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모습,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과, 성인이 되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김주형 님은 상당히 글로벌했던 나의 전 직장에서 만난 동료이다. 주형님은 다양한 분야에 아는 것이 많은 박학다식한 모습, 어디서든 전달력이 좋은 화술과 목소리, 가정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유머러스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동료이다. 그는 늘 이야깃거리도 많고, 무언가 표현하는 방법도 다채로운 사람이라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늘 재미있었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회사의 모 파티에서였는데,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기혼자라서 일차 놀라고, 여러 아랍권 국가에서 자랐다고 하여 이차 놀랐으며, 자유분방 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굉장히 독실한 종교인이라는 것에 삼차 놀랐다.
우선 바쁜 와중에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준 주형님께 감사 말씀을 드리며 나 역시 이 기회를 통해 주형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여러 국가에서 자란 양분으로 본인만의 커리어 역시 글로벌하게 만들어나가며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를 멀리서 지속적으로 응원하고 싶다.
1.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7개월 딸아이를 두고 있는 32살 김주형이라고 합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이집트에서 3년, 그 이후 우간다에서 3년, 중국에서 3년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서 3년 그 이후 오만에서 3년, 사우디에서 3년,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4년 뒤) 1년 동안 로마에서 살았고, 이후부터는 한국에서 쭉 살고 있는 일반적인 TCK들보다는 조금 특이한 국가들의 조합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대부분 거주했던 국가들의 한해서 대부분 한인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외국인들 (expat - expatriate의 줄임말, 고국이 아닌 국외 거주자를 의미한다) 또는 현지인들과의 생활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한인 커뮤니티의 경우, 최소 20명 (전체, 아이 포함)에서 약 500명 정도까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문화, 종교, 음식 등을 접할 수 있었고, 그런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경험하는 것이 제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여러 회사를 거쳐 현재는 작은 외국계 스타트업에서 세일즈 담당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자라오며 여러 별명들이 있었지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고등학교를 재학했을 당시 약 3-4년 동안 사우디 (또는 우디)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2. 굉장히 다양한 나라에서 거주하셨는데, 각자 나라의 다른 점이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아랍/무슬림 국가는 생소해서요!
사실 같은 중동이어도 문화권이나 과거 어떤 나라에 식민 통치를 받았는지 등이 조금씩 다릅니다. 제가 3-4개월 이상 살았던 곳들을 한 곳 한 곳 정리해드려 볼게요!
이집트 : 제가 이집트에 살았을 당시에는 독재정권시대였고, 굉장히 친미, 친서방 시대였습니다. 2010년대에 Arab Spring을 통해서 이집트가 정치적으로도 많이 바뀌었지만, 제가 살았을 당시에는 이집트 내에서는 백인이 주기득권자처럼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유명한 소설인 아가사 크리스티의 Death on the Nile에서 보이고 있는 백인들의 휴양지 그리고 판타지 같은 느낌을 지닌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저는 가난한 대학원생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살거나 같은 식으로 느낀 건 아니었지만, 당시 외국인으로 살았던 이집트의 분위기가 그런 느낌이 강했습니다.
우간다: 우간다 같은 경우에는 당시 저희 가족이 내전 직전에 탈출했던 심장 쫄깃한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 대사관문을 아버지가 닫았고, 추후 2009년도에 다시 개소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 아프리카는 르완다 호텔이라는 영화만 봐도 느껴지겠지만, 쉽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항상 테러/강도 등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저희 집에도 약 3-4번 정도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집에는 각 방별로 철창문이 따로 있는데,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항상 같이 생활했던 안방만 잠가 놓으면서 생활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머지 방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죠ㅎㅎ 엄마…?)
중국: 제가 살았던 중국은 많은 TCK들 또는 중국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생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중국에 거주했을 당시만 해도, 지금의 중국의 이미지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동안 두드러지는 경제성장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은 1990년대의 (구) 소련 국가들과 비슷하게 매우 어둡고, 칙칙한 사회였습니다.
당시 저는 베이징에서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살았습니다. 당시 글로벌 호텔체인인 쉐라톤 (베이징에서 거의 유일한 미국식 호텔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근처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그 권역만 살짝 벗어나면 매우 다른 베이징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과의 외교관계도 1994년도에 시작했기 때문에 한인 인구 또한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국을 떠올릴 때 대한민국보다는 북한을 먼저생각하고, 북한사람들이 엄청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 김치등을 먹으러 북한 식당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몰래몰래 가셨다고 합니다.
오만: 오만 같은 경우에는 지금도 은퇴하거나 추후에 꼭 다시 한번 살고 싶은 나라입니다. 실크로드의 한 포인트인 오만 무스카트는 지금도 도시가 기본적으로 원형이 아닌 긴 라인처럼 쭉 뻣어나간 형태로 모든 집에서 거의 10-15분 만에 바닷가로 갈 수 있는 그런 도시였어요. 가장 행복하고 생각 없이 살 수 있었던 초등학교 5 - 중학교 2학년 (다행히 전 사춘기는 따로 느끼진 않았던 것 같아요)까지 원하던 활동도 다하고 다양한 스포츠도 배우고, 악기도 배우고 여러 활동들을 집약적으로 했던 곳이다 보니 정말 좋은 경험 그리고 기억이었어요. 오만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기에 오만 내에 여전히 영국 스러움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커피보단 차를 많이 마셨던 것 같고, 약간 영국 식민지에 사는 느낌도 (영화에서 본 것처럼 또는 Agatha Christie의 Death on the Nile 같은 분위기) 그런 느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기억과 좋은 날씨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3박자처럼 정말 딱 알맞은 그런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웃기긴 하지만 전 집돌이 E거든요. 사람을 좋아하고 기본적으로 외향적이지만, 또 시끄러운 것은 안 좋아해요. 그래서 오만은 그런 면에서 엄청 조용하고 근데 있어야 할 것은 있고 그러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라 동네였어요.
사우디: 사실 오만으로 이사 갔을 당시가 2001년 7월 말이었고, 이후 9월 11일 끔찍한 테러가 뉴욕에 일어났죠. 그 이후로 중동에 사는 것 자체가 많이 위험하다는 인식 그리고 무섭다는 인식이 갑자기 많아졌을 때에요. 근데 오만에 실제로 2001년부터 살고 뉴욕 9/11 테러가 일어난 이후에 계속 주변 국가인 UAE나 카타르 등등을 방문했을 때도 크게 다르거나 무섭거나 두려운 부분이 있진 않았어요. 근데 사우디를 가니까 진짜 달랐어요. 학교를 진입하는데만 10분 이상 걸렸고, 친구 집에 가려면 군부대를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살던 외교단지도 실제 사우디 부대가 1 대대급(약 200명 이상) 군인들이 상주하면서 외교단 전체를 지키기도 했고요. (사실 군부대뿐만 아니라 큰 규모 대사관들은 자체 파견 군인들도 있었어요 (저희는 해병대 분들이 3분 정도 있었고) 미국 같은 경우에는 주한미군처럼 주사우디미군이 매우 규모가 커요. 수십만 명 정도 될 거예요…. ㅎㅎ 그래서 그런지 미국 학교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오만에 살 때에 비해서는 조금 달랐어요.
오만에 있을 때는 엄마가 운전도 하고 아빠가 바쁘더라도 엄마와 함께 이동이나 이런 게 좀 쉬웠는데, 사우디는 여자가 운전도 못하다 보니 어디론가의 이동이 너무 어렵고, 택시나 이런 것도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에 미성년자인 저는 탈 수 없었고, 그렇다고 기사를 고용할 만큼 여유가 있는 집안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미국학교에서는 조금 흔한 하우스파티 등에 초대를 받아도 여러 이유로 못 가게 되었고 (사실 오만은 그래도 가정의 여유로움이 우리랑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사우디는 정말 넘사벽이었어요. 만수르 같은 느낌…) 그러다 보니 비슷한 친구들끼리 한 3-4명만 친하게 지냈죠.
전 축구/야구/농구/배드민턴/탁구 등 웬만한 Junior Varsity 팀으로 활동했는데도 진짜 정말 현실적인 이유로 모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거나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사우디 같은 경우에는 약간 억압되고 조금 답답한 상황이 많았어요. 추가적으로는 사우디는 한인 인구가 좀 크다 보니 한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한인 커뮤니티라는 걸 처음 겪게 되었죠.
TCK에게는 한인 커뮤니티는 약간 악의 축 같은 곳이에요. 왜냐면 TCK들은 대부분 3-4년 만에 국가를 옮기거나 하는데 한인 커뮤니티는 그 국가로 이민을 갔기에 거의 평생 사는 친구들도 많고 뭔가 터줏대감이라고 해서 약간의 텃세를 많이 부리는 일도 잦았어요. 그래서 그런 게 너무 싫었고 어려웠어요. 사실 그전에 국가들은 한인이 많아도 너무 어렸을 때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약간 이해가 안 되고 뭔가 적응이 어려웠어요.
3. 굉장히 다이내믹한 유년기/청소년기를 지나 대학교를 조금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포항의 기독교 관련 대학으로 간 게 신기했어요. 주형님의 액티브한 성격을 알기에, 그곳에서 적응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저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외할아버지도 모태신앙 수준이시다 보니 기독교 문화나,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고 사실 신앙생활을 조금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단적인 예로 전 사실 술을 23-4살까지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종교적 신념이 강했지만, 누구에게도 강요받은 적도 없어요. 저랑 친한 목사님들도 대부분 술을 직접 하시진 않았지만 저희에게 한 번도 정죄하시거나 그러시지 않았던 약간 신세대 목사님이셨거든요. 근데 술을 하지 않은 것도 정말 개인적인 판단과 생각으로 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고 신앙이 조금 말랑해졌지만 지금도 자랑스럽게 교회 다니는 거나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가정 안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실 특별하게 기독교 대학에서 적응이 힘들거나 그렇진 않았어요. 또 추가로 저는 외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다시 고1로 편입했다 보니, 한국문화도 대학교로 입학할 때 즈음에는 미리 약간 적응 아닌 적응도 했고요 그래서 크게 적응이 어렵거나 다르진 않았어요.
TCK로 자랐지만 생각보다 저는 개인적으로 엄청 보수적이에요. 근데 그냥 그건 개인의 성향으로만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아요.
4. 궁극적으로 국제 관계 쪽으로 전공을 하고, 관련하여 인턴 생활을 한 것도 다 TCK로 자란 것으로부터의 영향이 있었나요?
사실 국제관계나 정치외교 쪽으로의 전공은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하나는 저희 아버지의 역할이고 그리고 살아온 환경이 강해요.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조금 말씀드리자면, 대부분 외교관 자녀라고 하면 놀라요. 왜냐면 엄청난 스펙이라고 생각하고 엄청나게 특별한 직업이라고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외무고시 출신이 아니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영사라는 직책까지 진급하셨죠.
아버지가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어떤 라인인지 어떤 학교 출신인지 외시출신인지 아닌지 이런 것들에 대한 편견도 많았고 그러한 끌어주고 라인이 중요한 문화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노력으로 좋은 위치까지 가셨던 그런 여정을 옆에서 보면서 아버지가 하시고 있는 일을 조금 이어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어요. 근데 반대로 그런 힘든 여정을 보니 그 문화가 옳지 않다고 생각도 많이 했고요. 아버지는 아랍어 전공이신데, 중동에 있는 한국 대사님들이 아랍 어하실 수 있는 분이 몇 명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 명도 없을 때도 있어요. ㅎㅎ
근데 저는 그런 아버지랑 살다 보니 그런 일이 재미있어 보였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감사한 건 아버지가 어린 저를 데리고 수많은 행사, 소위 말하는 리셉션을 갈 수 있게 하셨어요. 대사관마다 공식행사들을 매년 하는데, 그런 곳을 어린 저를 가능하면 많이 데리고 가셨어요. 지금 아이의 아빠가 되어보니 어쩌면 진짜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그리고 아이가 있다 보면 업무이야기나 진짜 네트워킹이 힘들 때도 많은데, 꼭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가셔서 인사시켜 주시고 참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주셨어요. 그런 경험을 하다 보니 진짜 외교관이 된 것처럼 기쁠 때도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나 경제 등등 (너무 얕고 하찮은 지식이었지만) 실제 외교관들이랑 이야기할 수 있었던 기회를 주셨어요.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서 외교관 또는 국제기구 진출이라는 목표를 두고 살았죠. (PS 지금은 비록 테크 쪽에 일하고 있지만, 지금도 꿈꾸고 지금도 지원하고 있어요 ㅎㅎ)
두 번째는 TCK로의 삶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삶이에요. 정치외교를 공부하다 보면 가장 많은 어려움들 그리고 해결할게 많은 곳이 아프리카와 중동이에요. 정말 면밀하게 보면 사실 미국과 유럽이 잘하면 당연히 해결될 문제도 많지만요.
동아시아인으로서 중동/아프리카에서 17년 동안 살면서 느낀 게 있어요. 만약 내가 전문가가 된다면 조금 객관적으로 내가 이문제를 보고 해결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책으로 보는 문화가 아닌 직접 경험한 문화이고 사실 처음에 살았던 곳이 지금은 또 변해있지만 그러한 곳을 경험한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기회가 된다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문화도 사람도 역사도 다 경험했다 보니, 조금 제삼자인 동아시아에 작은 나라에서 온 나 같은 사람이 그래도 조금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 조금 더 연결해주고 싶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조금씩 늘어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더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5. 살면서 정체성의 혼돈 등을 겪은 적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어떤 케이스였고, 그때 느낀 바가 궁금합니다.
정체성의 혼돈은 결국 전 한국에 들어와서 느꼈어요. 대학교나 고등학교를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제 자신이 조금 정체성이 혼돈이 많이 왔어요. 특히 사춘기 없이 지냈던 유년시절을 보내고 전 대학교/군대 그리고 대학원까지 조금 길게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고민하고 그리고 제 자신이 투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대학생활 그리고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인친구들도 많았고 동시에 한국 동기 선배 후배들도 많았죠. 그런데 각 친구 그룹에 들어가면 전 애매한 사람이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대부분 유년시절 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지금 성인인 외국인과는 또 다른 느낌의 문화 갭이 보였고, 한국 그룹에서는 또 뭔가 외국생활한 유학생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뭔가 중간에 애매하게 둘 다 껴있지 못한 것처럼 계속 지냈던 것 같아요.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상황들 그리고 느낌들은 항상 어렸을 때부터 동일하게 있었는데 모르고 넘어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많은 TCK에게 느끼는 동일한 감정이겠지만 저는 “not belonging anywhere”라는 생각으로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그 어디에도 없는 그런 사람처럼 느꼈고 난 한국인인 걸까? 아니면 그냥 유학생인 걸까? 아니면 외국인일 걸까? 이런 생각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 같은 경우에는 다문화이기보다는 약간 단일민족 형태가 강한 것 같아서 그런 부분이 더욱더 심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에게 참 진정한 한 명의 친구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좋은 관계 좋은 친구는 많지만, 정말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정말 없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외로움도 많이 느끼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가정도 이루고 그리고 한국에서의 삶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정체성에 대한 혼란도 많이 줄었고 하지만, 아직도 애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6. 주형님도 TCK로 자랐지만 저처럼 완전 코리안! 배우자분을 만나 가정을 꾸리셨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저는 정말 제 남편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100% 그분도 해외파냐는 질문을 받았거든요) 배우자 분과 성장과정의 다른 점에서 오는 에피소드 등이 있는지 궁금해요.
저도 똑같은 질문 엄청 받았어요.
저희 부부는 원래 친구로 있다가 연애를 한 케이스라서 저희를 같이 아는 친구들은 그런 의미에서 엄청 놀랐어요. 그리고 사실 친구로 있을 때도, 서로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요. 서로에게 어필할만한 케이스가 없었고 서로 거의 싫어하고 짜증 나는 존재였어요. 와이프는 저가 너무 시끄럽고 활발해서 싫어했고, 초등학교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제가 느끼기엔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들도 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왜 저래? 그러면서 생각했고, 근데 결혼을 하니 서로 비슷한 점이 너무 많은 거예요.
와이프는 알고 보니 약간 국내 TCK느낌이었어요. 제주도에서 10년 군산에서 2년 포항에서 1년, 분당에서 3년, 서울에서 3년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 이사를 많이 한 친구다 보니 저랑 약간 비슷한 면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의지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윗질문에서 나온 그런 정체성의 문제를 지금의 아내가 해결해 줬어요. 나라는 사람을 제일 인정해 주고 나라는 사람을 가장 많이 빛나게 해 줬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어요. 또 다른 부분은 나의 평생 제일 친한 친구 같은 사람이 생긴 것 같아서 든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7.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 혹은 본인이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장점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인 것 같아요. TCK들은 대부분 조금 보편적이지 않은 국가를 다양하게 갈 수 있다 보니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에요.
단점의 경우 관계를 계속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인터넷이 활발하다 보니 조금 나아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거리가 생기면 결국 친구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관계에 타임라인이 존재하게 돼요. 이게 가장 큰 단점이고요.
8. TCK가 취업시장이나 사회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다양한 경험을 하다 보니 여러 일 들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언어적인 부분에서도 조금 더 어필할 수 있는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여러 해외 마켓 담당자가 될 수도 있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일을 조금 더 편히 할 수 있고. 근데 가장 큰 장점은 SMALL TALK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SMALL TALK가 아이스브레이킹이 되다 보니 그런 강점을 가질 수 있어요.
두 번째는 빠르게 관계 형성을 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TCK들은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뭔가 타임라인이 있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어서 빠르게 관계형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성향에 맞지 않더라도 약간 뭔가 생존의 법칙처럼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관계 형성이 빠르고 신뢰하는 관계를 서로 만드는데 거부감이 없고 그렇다 보니 조금 더 쉽게 관계 형성이 가능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는 적응력. 이건 정말 쉬워요. 살면서 일곱 개의 나라에 적응을 했는데, 새로운 부서/직무 적응은 껌이죠! ㅎㅎ
9.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즐겼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저는 사실 생각보다 많이 즐기지 못했어요.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돌이켜보면 훨씬 더 재미있는 경험을 더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하고 있어요.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열심히 이어나가세요. TCK의 장점은 여러 국가와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들과의 네트워크이거든요! 근데 그런 관계를 정말 열심히 유지하고 서로 더 알아가는 친구로 성장하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요!
나중에 성인이 돼서 그런 친구들과의 관계가 정말 많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10. 주형님과 주형님의 아내 분은 두 분의 자녀 역시 TCK로 키우고 싶으신지, 어떻게 키우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저는 한국 교육시스템과 외국 국제학교 교육시스템을 둘 다 경험해서 그런지, 한국에서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없어요. 조금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은데, 돈이 너무 많이 드네요 ㅎㅎ
근데 사실 저는 한 번도 학업스트레스 뭔가 진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어요 부모님께서 저에게 꼭 말씀하셨던 게 있거든요.
“주형아 네가 하고 싶은 거 좋아하고 싶은 거를 계속 찾아봐 그리고 계속해봐 그러면 그것들 중에서 네가 잘하기도 하는 것을 찾게 될 거야. 좋아하는 것들과 잘하는 것들이 오밀조밀 여러 형태로 만들어지면 너의 인생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질 거야”
저도 똑같이 로희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재미있고 즐겁게 살자고, 그리고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거 다해보라고! 그러면 그게 답이라고.
11. 무언가 ‘다른 나라의 기분’ 혹은 ‘TCK’의 기분을 느끼고 싶으실 때는 어떻게 하세요? (전 옛 사진과 기록을 자주 들춰봅니다)
저는 걸어서 여행하는 youtube을 (말없는 영상) 보거나, 와이프랑 예전의 여행경험 그리고 거주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음식이에요, 여행을 하며, 혹은 외국에서 살면서 현지에서 먹었던 음식을 꼭 먹어요. 전 그래서 그렇게 케밥을 찾을 때가 많아요! ㅎㅎㅎ
12. TCK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TCK는 저의 삶에서의 무지개 같아요. 엄청 오글거리지만, 사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리고 생각이 많아질 때 그것들을 없앨 수 있는 좋은 기억들을 떠오르고, 그 경험들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비가 오고 난 이후 무지개 같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