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Culture Kid (제3문화아이)의 좌충우돌 성장기
**주의: 이 글은 깁니다. 저의 성장과정을 담고 있고 엄청난 TMI이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안녕하세요. 여섯 개의 나라에서 자라나 여러 나라 알리는 태나라입니다." 한참 관광청 일을 할 때 내가 스스로를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1987년 서울, 그것도 서울의 (당시) 배꼽, 충무로 제일병원에서 태어나, 갓 두 돌이 안되었을 때 대만으로 이사를 했고, 그 후에는 필리핀 마닐라로 부모님과 거처를 옮겼다.
대만에서의 기억은 흐릿하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렴풋이 아주 조금 기억이 나는 것은, 유아원의 낮잠 시간 때 중국어를 잘 못해 긴장을 했던 터라 늘 이불에 실례를 했던 기억,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경극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하루 종일 경극에서 나오는 춤과 표정을 따라 하며 놀던 기억, 그리고 타이베이의 꽤 유명했던 백화점에서 (이름이 소고백화점인가, 소공백화점인가 그랬던 것 같다) 엄마와 쇼핑을 하던 기억이다.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열 살 정도는 어린, 해외 생활이 처음이었던 젊은 아기엄마였다. 내가 길을 걷다 소변이 너무 급해 결국 골목길에 쭈그려 볼일을 볼 때 때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담벼락 너머의 집주인이 나와 소리를 지르며 "너네 일본인이지!!!!"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 맞다고, 죄송하다고 하며 함께 내 손을 잡고 줄행랑을 치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 집주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이 일이 정말 미안했던지 두고두고 이 이야기를 하셨다.
필리핀에서의 기억은 조금 더 선명하다. 조금 더 커서 가서였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 특유의 후덥지근하고 지독한 기후의 탓이 더 큰 것 같다. 나는 필리핀에서 꽤 즐거운 유아원 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내 기억에는 산다라 박보다 더 예뻤던 현지인, 해피 선생님이 이끄는 반에서 나는 너무나도 적응을 잘하는 타지의 아이였다. 당시 나에게는 나보다 체구는 작지만 눈망울은 세 배나 큰 Fe라는 베스트 프렌드가 생겨 하루 종일 붙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영어가 조금 미흡했던 내게, Fe는 통역가였으며, 손발이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그녀에게 어떠한 자랑스러운 마음 같은 것을 주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온 이 친구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같은. 여하튼 너무나도 적극적이고 용맹했던 그녀는 우리 부모님의 귀여움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에 필리핀의 기억은, 냉방이 빵빵하게 되던 맥도널드에서의 생일파티, 우리 집 다락에 있던 말린 망고, 그리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No"로 응수하던 도우미 언니였다. 당시 한인들 사이에서 도우미 언니를 채용하면 몇 달 안에 사라지는 것 때문에 다들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우리 집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무조건 "No"라고 하는 언니가 몇 번째 언니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무래도 언니의 "No"는 세상 궁금한 게 많은 내가 당시 영어 말문이 트여 열심히 쫑알대던 것을 조용히 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워낙 더위에 약한 엄마는, 필리핀에서 사는 것을 유독 힘들어하셨고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던 우리는 거주하고 일 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여섯 살이 채 안되었을 무렵 한국에 들어와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 2학년이 시작되었을 때 즈음 나는 아버지의 발령에 따라 다시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동유럽에 있는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였다. (지금은 전쟁으로 모두 알고 있는 그 나라 맞다.) 그 넓은 유럽 땅에 아무도 모르는 우크라이나라니, 너무 창피해서 친구들한테 "유럽 어딘가"라고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집요하게 물어보는 선생님들한테는 대충 "동유럽인데, 이름이 어려워서 기억이 잘 안 나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유아원부터 12학년까지 200명이 채 안 되는 국제학교 (원래 있는 큰 국제학교는 교육 커리큘럼이 엉망이라, 교육열이 높은 학부모들이 나와 따로 만든 프랑스의 IB 커리큘럼을 따르는 학교)에서 나 같은 외국 주재원 자녀들, 우크라이나에서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의 자녀들, 심지어 대통령의 자녀들과 학교를 다녔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8학년이라고 해봤자 반에 채 8명이 안되었는데, 여중도 아닌데 다 여자 아이들이고, 텃세가 심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친절하게 나를 도와주는 아이가 없었다. 그나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구는 역시 나처럼 그 해 새로이 입학한 세네갈에 살다 이사를 온 브라질 친구 사라였던 것 같다. 그녀는 나보다 영어를 조금 더 잘하기도 했고, 불어를 잘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내가 영어를 못해 (그래도 한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는 늘 영어는 무조건 100점을 맞았는데, 애들이 내 앞에서 일부러 빠르게 이야기하는 건지, 왜 영어 선생님은 필기체로만 쓰는 건지, 왜 이리 억양은 다들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Can I have a shit of paper?"이라고 선생님한테 호기롭게 물었을 때 (심지어 나를 못마땅해하던 마른 쿠바인 영어 선생님이었다) 애들이 다들 눈물을 쏙 빼며 자지러져도 속으로 도대체 쟤네가 왜 저리 웃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빠를 닮은 친화력과 인복 덕인지 그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빨리 적응을 한 것은 학교의 캐나다인 사회 선생님, 마이클 선생님에게 개인 강습을 받은 이유가 컸었다. 마이클 선생님은 선생님들 중에서는 잘생긴 편에 총각이라 학교가 끝나고 우리 집에 차를 같이 타고 가면 애들이 뒤에서 엄청 쑥덕댔었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그 선생님은 수업을 좀 대충대충 하고, 집에 오면 엄마가 만들어주는 한국 음식에 더 집중을 했었던 것 같긴 하다. 선생님은 엄마가 간식으로 만두를 주시거나 김밥을 주시면 그거에 대해 삼십 분은 이야기를 했다. “이건 뭐니?” “이런 것 자주 먹니?” 등... 여하튼 그 선생님이 강조하던 여러 말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Canada is a big country. Korea is a super small country."다. 나도 지도 보면 다 아는데... 여하튼 6개월 뒤 나는 우습게도 투표를 통해 반장이란 것을 맡게 되었고, 12학년까지 그 작은 반 (고학년이 될수록 숫자가 좀 늘긴 했었다)의 반장을 맡아 나름 반의 살림을 도왔다.
그 와중 정말 죽고 못 떨어지는 단짝이란 게 생겨 매 주말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잤고, 그 단짝은 전교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친구 중 하나여서 나의 학교 생활은 여러모로 편해졌다. 친구들과 나는 나름 재미있는 "청소년 문화"를 즐기러 다녔다. 물론 애들이 클럽을 갈 때 즈음에 나는 아빠가 데리러 오는 터에 일찍 집에 갔어야 했고, 좁은 한국인 사회와 어린 동생을 생각해 절대 부모님한테 누가 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서 친구들은 나를 종종 재미없어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점점 더 고학년이 될수록 커다란 파티 문화에서 점점 나는 빠졌던 듯하다. 지금도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을 하고 지내는 당시 나의 단짝은, 보스턴 대학교에서 정치를 공부한 후 유엔에 입사해 일을 하다가 본인의 끼를 주체 못 하고 컬럼비아에서 영화 쪽 석사를 따고 유명 영화사에서 일을 하다 지금은 다시 공부 욕심이 생겨 뉴욕에서 로스쿨을 다니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학교 밖의 우크라이나는 정말 순박한 나라였다. 교내 우크라이나인들은 그 나라에서 손에 꼽는 부자들이었기 때문에 아예 다른 삶을 살았다. 나의 삶과도 다른 삶이었는데, 우크라이나 현지인들과는 더욱이 달랐다.
지금은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알려져 있어 안타깝지만, 사실 우크라이나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순박하고, 삶이 가난할지언정, 영혼은 정말 정말 정말 고귀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꽃을 사랑했고, 동물에게 친절했으며, 예술을 중요시했다. 아무리 재정적으로 힘든 사람일지언정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오페라를 보러 갔고, 엄마와 내가 늘 우스갯소리로 "개털"이라고 불렀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뻣뻣한 ㅇ모피옷을 거치고, 최대한의 예우를 갖춘 채 공연에 착석을 했다. 그들은 문학을 사랑했고, 공원에서 시를 읽었으며,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며, 언제나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30도를 웃도는 시린 날씨에도 그들은 영혼은 언제나 고귀했다. 그들에게서 받은 초콜릿, 꽃, 그리고 사랑은, 내가 살면서 다른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친절과 예쁜 마음이었다.
내가 가장 가깝게 접하는 현지 사람들은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 아주머니, 기사 아저씨, 그리고 과외 선생님들이었다. 마음이 맞는 아주머니, 스베따 이모를 만나기 전까지 엄마는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도우미 직업은 실제 우크라이나 내의 다른 직업보다 꽤 벌이가 좋았던 터라 (그래도 당시 한국돈으로 월 20만 원을 넘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많이 왔었다. 노래/언어 치료사인 안나 이모는, 우리 집에만 오면 따뜻한 물이 잘 나온다며 1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며 목욕을 했다. 그러고 나와 나의 머리보다 아마 1.5배는 커 보이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젖은 머리를 말렸으며, 계속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집안 살림과 친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고, 엄마가 도시락 통 설거지를 부탁했을 때 손바닥 만한 플라스틱 통 분리를 어려워하다가 결국 나가게 되었다.
그다음 온 친구는 비까였다. 비까는 정말 잘 나가는 대학생이었는데, 딱 봐도 모델 같았다. 커트머리, 긴 다리, 넘치는 패션 센스, 당당한 자세와 우아한 얼굴. 도대체 왜 일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까는 영어도 꽤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영어도 하고, 외국인 집에서 일을 하는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비까는 종종 한국 음식 냄새에 비위가 상했었는데, 어느 날 짜파게티를 끓여 먹는 엄마와 나를 보고 "국수가 까매" 라며 헛구역질을 하고 부엌을 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 온 아주머니는 나따샤 아주머니.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여러모로 힘든 아주머니였고... 소통이 어려웠다. 엄마는 한두 달 호흡을 맞춰보고 죄송하지만 우리 집과는 인연이 아니라고 그녀와 작별을 했다. 그녀는 생활고 때문에 일이 정말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으로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녀는 거동도, 몸도 불편하며 느렸고, 일을 부탁하기에 미안할 정도였다.
그러고 그 후에 온 다른 아가씨 나따샤. 나따샤는 20대 초반의 새댁이었다. 돈이 없어 식을 올리지 못했다는 나따샤는, 말이 많았고 덕분에 나는 러시아어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우크라이나에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쓰는데 (현지 말로 쑤르직이라고부른다) 나는 이게 우크라이나어인지 러시아어인지 분간이 안 가는 말들을 배웠다. 나따샤는 우리 엄마를 너무 사랑했고, 엄마한테 종종 "미세스 태, 나가지 말고 나랑 놀아요"라고 해서 엄마는 당황 스러워 하셨다. 엄마는 옷가지와 여러 가지를 나따샤에게 줬던 것으로 기억하고, 나따샤는 그럴 때마다 팔짝팔짝 뛰며 행복해했다. 특유의 종잇장처럼 마른 몸과 해맑은 미소는 종종 나 역시도 당황하게 했다. 너무나도 해맑게 물이 흥건하게 적셔져 있는 화장실에 청소기를 돌리는 둥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빈도가 잦아지는 동시, 우리 엄마에 대한 애착이 점점 심해져 결국 그녀와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우리 집을 떠나며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따샤 아가씨는, 위의 나따샤 아주머니의 딸이었고, 모녀 관계인 것을 숨기고 우리 집에 왔던 것이었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 우리는 스베따 이모를 만났다. 스베따 이모는 정말 민첩했다. 민첩한 다람쥐 같았는데 실제 생긴 것도 다람쥐 같았다. 통통한 몸 때문에 늘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는데 라면만 끓이면 이모가 더 좋아했다. 라면 국물에 밥도 말아먹었다. 김치를 척척 얹어먹으며. 스베따 이모는 청국장까지 먹는 완전 한국 입맛을 지녔고, 한국 드라마를 켜면 한국어를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서 우리랑 함께 울고 웃었으며 다음 편이 언제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녀가 제일 좋아했던 드라마는 풀하우스였다. 비가 너무 잘 생겼다고 박수를 쳤다. 자꾸 비가 뭐라고 하는지 실시간 통역을 하라고 해서 나는 드라마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스베따 이모는 엄마는 어느새 단짝이 되어있었다. 우크라이나 여자들은 하나같이 바느질 솜씨들이 좋아 우리 집의 모든 옷을 다 꿰매고 수선해 주었고, 엄마가 털실을 사 100 그리브나 (당시 한국 돈 이만 원)만 주면 스베따 이모의 딸 나따샤는 (나따샤는 정말 흔한 이름인가 보다) 기가 막힌 목도리들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스베따 이모는 보풀이 많이 오른 내 옷을 면도기로 정리해 주었고, 내가 키우던 기니피그가 하늘나라로 갔을 땐 나와 함께 묻어주었다. 하교 후에 스베따 이모는 항상 나와 동생에게 새콤달콤한 치즈를 넣어 구운 파이, 얇게 부친 팬케이크 같은 우크라이나식 디저트를 만들어주었으며, 또 "살 빼야 하는데"를 반복하며 본인도 많이 드셨다. 스베따 이모는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왔고, 지금도 페이스북 메시지로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낸다. "나의 예쁜이들"이라며 "사랑한다"는 말을 종종 하신다.
스베따 이모를 너무 믿었던 터라 엄마는 파마비용을 좀 아껴보기 위해 스베따 이모의 친구 (미용 기술을 배워 남의 집에 가서 머리를 한다는)에게 머리를 맡겼다가 한번 머리를 다 태운적이 있었다. 원래 파마를 해본 적이 없는지, 너무 긴장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중화제를 넣지 않고 파마를 한 아주머니 덕에 우리 엄마는 정말 아프리카인 머리처럼 바스락거려지게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겼지만 웃긴 티를 낼 수 없었다. 그 아주머니는 자꾸 "파마 중간에 사모님이 과자를 먹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우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그것은 정말 거짓말이었다. 엄마는 속상해하셨고 우셨지만, 그래도 스베따 이모와 엄마의 관계를 갈라놓진 못했다.
당시 고등학생인 나는 플라시보, 뮤즈, 라디오헤드 등의 락밴드를 좋아했던 터라 엄마에게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했었고, 엄마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는 음대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다. 셰브첸코 대학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의 교수님이었는데 (성함이 잘 기억이 안 난다) 알고 보니 클래식 기타리스트였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내 기대/상상과는 달리 나는 기타를 제대로 잡는 법만 두 달을 배웠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특유의 진지한 성격 때문에, 그 선생님은 내 왼 발아래에 책을 열 권을 끼었다 두 권을 뺐다를 반복하며 "이게 아니야"를 반복했고 나 역시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을 했다. 석 달간의 기타 교습 후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의 발냄새뿐이었다. 지금도 그 냄새는 또렷하게 각인이 되어있다.
그렇게 나는 우크라이나의 작은 학교를 졸업해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이미 우크라이나에서 내가 고 3이 되었을 무렵 아빠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발령이 났는데, 내가 고 3이라 엄마와 동생은 우크라이나에서 나와 함께 더 머물고 아빠만 혼자 먼저 가셨다.
한 학년에 학생이 총 12명이 안 되는 작은 학교를 다니다가 간 대학교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한국인과 5년 동안 교류가 없었던 나는 아시아인이고 한국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레 한국인 모임으로 분류가 되었다. 지금 보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나는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국인의 술 문화를 배우고, 그들 속에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했었던 것 같다. 전교생 수가 대학원생까지 합치면 약 40,000명이 넘는 이 학교의 캠퍼스도 내게는 너무 컸고, 한국 친구들은 어려웠으며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 생긴 좋은 친구들이 많고 여전히 내게 매우 소중한 친구들이다), 바보같이 수강신청을 해 놓은 나도 미웠다.
게다가 내가 정말 아꼈던 사촌동생이 하늘나라로 간 것을 "막 대학교에 간 나의 학업에 문제가 될까 봐" 가족들이 모두 꽁꽁 숨겼다는 것을 나중에 밴쿠버에서 만난 먼 친척 분이 알려줬을 때의 배신감 때문에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더 자주 보러 가지 못한 게 미안했고, 그러한 감정들은 가족과 처음 떨어져 있는, 나이만 스무 살이 넘었지 아직은 여리고 미성숙한 내게 너무나도 크고 어려운 감정들이었다.
나는 일 학년을 마치고, 당시 심적으로 어려웠던 내게 조금 쉬는 시기를 주기 위해 일 년 남짓 남아공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남아공에서의 삶은, 따뜻했고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비록 외국인들만 사는 단지에 모여 살아 생활 반경이 좁고, 단지 내에서만 걸어 다닐 수 있었으며, 바깥 외출은 모두 쇼핑몰 (안전상의 이유로)이어서 답답했지만, 집에서 키우고 있는 두 마리의 잭 러셀 테리어, 집 안의 수영장, 주말의 브라이 (바비큐) 문화 등이 모두 천국 같았다.
남아공에 있을 때는 남아공 구석구석 여행을 많이 다녔고, 부모님은 내가 좋은 것을 먹고, 푹 쉴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40개 남짓의 국가들을 여행한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 하면 나는 여전히 주저 없이 남아공을 꼽을 것이다.
나는 남아공에서 몸과 맘을 잘 정비를 하고 밴쿠버로 돌아가, 학업과 인턴활동을 병행했다. 또한 동시에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의 봉사활동, 한인 라디오 방송국 일,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 물론 복학을 한 후에도 가족이 지구 정 반대편, 한국도 아니라 남아공에 있다는 물리적 거리감은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나는 남아공에서 받은 햇살과 에너지 덕에 단단해져 있었다. 밴쿠버에 살며 나는 이주민들, LGBTQ, 장애가 있는 사람들 등 다양한 소수를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관련한 내용들을 블로그 등에 글로 펼쳤다. 그리고 육류 섭취를 하지 않는 페스코 베지터리언의 삶을 살았다. 지금 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지 어연 13년. 한국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왜 해외에서 계속 안 살았어?"다. 나는 해외에서 계속 사는 것이나, 다른 해외 국가 어딘가로 옮기는 것을 당시 선망하지도 않았고 "어디에 살든 사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미세먼지가 심할 때는, 종종 "해외에서 살걸 그랬나"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은 낯설었지만, 나를 환영해 주고 반겨주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으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들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한식을 더 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사회생활을 하며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으며, 행복하고 보람찬 일들 역시 많이 했다.
물론 아직도, 여전히, 사회적인 통념, 예를 들면 "여자가" "남자가" 혹은 "이 나이에" 등의 성별이나 나이로 레이블링을 하는 것이나, 가끔 마주치는 불편함 등에는 종종 반기를 드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Third Culture Kid로서 지금 너무나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과 가까이 살며, 가급적 다문화적인 일을 하면서 영어를 많이 쓰고 다양한 나라를 출장이든 여행이든으로 다니며, 의미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며 살고 싶은 나의 소망 역시 이루며 살 것이다. 나는 내 성장과정이 그러했듯, 앞으로 살면서 내가 마주칠 것들이 얼마나 멋있고 다이내믹할지, 나를 얼마나 성장시켜 줄지 기대가 된다.
나처럼 복잡하고 다채로운 성장과정을 지닌 후배들이나 지인들은 종종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부터 시작해서 내가 과거에 느꼈던 많은 것들에 대한 고민상담을 한다.
나는 그들에게 "현재를 즐겨라, 나중에 그것이 다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답을 한다. 나 역시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분류되는지"에 대해 대한 고민도 많았고, 한참 예민한 시절 친구들과 이별을 해야 했던 나, 어디를 가든 늘 이방인이었던 나, 그리고 이렇게 살게 된 가장 큰 이유인 아버지를 원망도 했건만- 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난 후 스스로 답변이 되었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유동성과 적응력"이고 어떠한 곳에서,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든 나는 감사할 것이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내가 살면서 만난 환경과 고마운 사람들 덕분, 나라는 Third Culture Kid는 언제 어디서든 나만의 환경과 나만의 것을 만들어나가는 Any Culture Kid로 성장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