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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 Days Sep 01. 2024

보다 더 열린 이주정책을 연구하고 꿈꾸는 TCK

캐나다 이민자로 자란 후 독일에서 국제이주기구 일을 하고 있는 장소영님

소영이는 나의 대학교 때 후배이다.


캐나다 밴쿠버에 위치한 대학에서 만난 우리는, 한인 라디오부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는데, 호기심이 많은 동시 선하고 맑은 그녀와 나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함께 에티오피아 음식점, 인도 음식점, 빈티지 스토어 등 여러 곳을 탐험하던 게 생각이 난다.


나는 당시 20대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술자리, 연애, 쇼핑 등에 관심이 없었고 조금 다른 것들, 예를 들면 음악을 너무 좋아해 여러 lp 스토어에 가 음반을 디깅 하거나, 지금은 많이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북미의 인디밴드였던 밴드들의 공연을 가고, 고전영화 아카이브에서 옛 영화를 찾아보고, 새로운 식당 등을 탐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의 그런 특이한 취향을 이해해 주는, 나의 이상함 (Weirdness)을 함께 공유해 주는 친구들이 있단 것은 당시 내게 큰 힘이었다. *여담이지만 남편은 나를 '인문학 괴짜'라고 부른다.


그 후에 그녀가 멕시코, 대만 등 다른 나라로 가며 중간중간 보내준 우편들과 소포들을 받을 때면 그녀가 얼마나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그녀의 탐험이 부러웠으며 또 보기 좋았다. 인터뷰 덕분에 오랜만에 독일에서 거주 중인 그녀와 연락이 닿아 또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참으로 설레었고, 바쁜 와중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준 소영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2015년 어느 추운 겨울,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소영과 서촌에서 갤러리 투어를 하며



1. 안녕하세요, 소영 님!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 부탁 드립니다. 어디서 자라셨고, 어느 국가에서 사셨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장소영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10살 때 밴쿠버로 이민을 갔어요. 20대 때는 멕시코와 터키에서 교환학생으로 다녀오고 일과 학업을 위해 대만, 스위스, 싱가포르를 거쳐 2017년부터 독일에 살고 있어요. 제 박사논문은 외국인 가사노동자에 대한 정책을 다뤘고 2년 전부터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UN 국제이주기구)에서 근무 중이에요.     


2. 상당히 어린 나이에 이민을 갔는데 캐나다, 한국 중 정서나 문화상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곳은 어디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문화 콘텐츠 (음악, 예능, 드라마)는 캐나다 보다 한국 것을 더 많이 접해요 (이 방면에서는 “북미” 문화는 있더라도 “캐나다” 문화는 딱히 없는 점도 있어요). 정서적으로는…글쎄요. 아무래도 캐나다의 국민정체성 자체가 다문화를 포용하기 때문에 그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어요. 반면 한국사회를 대하는데에서 저는 조금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저랑 잘 맞는 부분이 있으면 ‘아 나는 역시 한국인인가 봐’ 이렇게 생각하고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아 역시 나는 한국인은 아니구나’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해요.


설명이 조금 장황해졌네요.

저는 얼마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 마음은 한국에서 태어났고 내 머리는 캐나다에서 자랐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소통스타일은 캐나다식인데 뭔가 한국에는 가족을 통해서도 굉장히 깊은 뿌리가 있는 느낌이에요.


3. 국제관계학을 전공을 한 후 굉장히 여러 국가에서 학업을 이어오셨어요. 국제기구에서도 계속 일을 하셨는데, 각각의 학교와 지역을 고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20대 때 갔던 나라들은 좀 랜덤 하게 골랐어요. 멕시코는 당시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어서 (그리고 해당 대학교가 장학금도 있었고) 그리고 터키는 고등학교동창인 친구가 올린 이스탄불 여행 페이스북 앨범을 보고 현혹되어서, 대만은 중국어 수업을 위한 장학금이 있어서, 스위스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석사과정을 위해 7군데 지원해서 감사하게도 다 붙었는데 유럽에 살 수 있는 기회가 되게 끌렸어요), 싱가포르는 당시 친구들이 많이 살아가고 싶던 와중에 제 분야에 좋은 인턴십 기회가 올라와서, 그리고 독일은 석사과정 마치고 연구소에 취업되어서 오게 됐어요.

아 이렇게 보니 장학금 이야기가 많이 나왔네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여러 나라에서 국제적인 경험을 누리기 위해 꼭 부유하거나 가족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요. 물론 저는 부모님의 여러 희생을 통해 처음에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 이외에 20대 때부터 거쳐온 나라들에서의 경험과 여행은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 없이 다 제가 모은 돈이나 장학금을 받아서 했어요. 멕시코 갔던 경험이 (그리고 그전에는 퀘벡에서 5주간 불어를 배우려 homestay 했던 것이) 터키 가려는 지원서에서 좋은 거름이 되었고 교환학생으로서의 경험이 에티오피아로 가는 fieldwork seminar 지원서에서도 좋은 장점이 되고 이 모든 걸 바탕으로 해서 석사과정 지원서를 쓸 때도 발휘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계획을 짜고 차곡차곡 세워온 것은 아니지만 뒤돌아보면 그렇게 연결선이 있는 것 같아요.

2010년도 멕시코 Cuernavaca에서 함께 교환학생 생활한 친구들과
2011-2012년도 겨울 터키 동부지방에서 청바지 입고 스키를 타는 모습


4. 국제 관계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관심을 가지게 된데 TCK라는 정체성은 얼마나 영향을 주었나요?


국제 관계학은 실은 그냥 ‘쿨’하게 들리고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다 그 과에 지원하기로 저도 따라한 부분이 커요, 하하. (나라: 실제 우리가 졸업한 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은 특정 GPA 이상을 유지했어야 하는, 공부를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 하는 전공이었다) 솔직히 학부 때는 아직도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학창 시절 때의 부담에 조금 사로잡혀있던 부분이 커서 그 학업을 정말 즐겨 쓰는지는 모르겠어요. 4학년때는 그래도 에티오피아 가는 세미나 수업을 듣고 나서 연구가 정말 재밌다는 걸 몸소 느끼고 석사과정도 생각하게 되었고요.


5. 그럼 좀 더, 소영 님의 경험에 깊게 들어가 볼게요! 본인이 거주하거나 공부한 국가 중 본인에게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곳이 있나요.


다 좋은 추억들이에요. 기억에 남는다면 싱가포르에서 확 왔던 감정이 있어요. 3개월의 짧은 체류기간이었는데 그 시간 동안 너무 즐거운 추억들과 좋은 관계들을 맺어서 2개월 차 접어들면서 떠난다는 게 벌써 슬펐거든요. 그때 느낀 게 ‘아 계속 굿바이 하는 삶이 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 였어요. 그래서 스위스에서 학업을 마친 다음 온 독일에서 계속 눌러앉고 있나 봐요, 하하. 실제로 여기 와서는 처음부터 봉사활동도 시작하고 되게 정착할 사람처럼 살았어요. 3년 계약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끌리기도 했고요).


6. 관련 성장과정에서 만난 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나요.


너무 많은데 한 분을 뽑자면 제6-7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Mrs. Williams에요. 정말 ‘좋은 선생님’의 정석이신 분인데 한없이 다정하고 이해심 깊으시고 그런 선생님이셨어요. 초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마다 podium을 걸으면서 담임선생님이 한 마디 소개를 하셨는데 그때 Mrs. Williams는 저에 대해서 “소영이는 커서 국제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소영이는 글을 잘 써서 나중에 직접 쓴 책을 접해도 놀라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 저는 캐나다에 간지 오래 안 되어서 아직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었는데 언젠가 영어가 ‘감히’ 내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심어주는, 그때는 다소 충격적인 말이었어요. 실제로 숙제에도 항상 격려와 좋은 말을 아끼지 않으셨고 그분 덕분에 제가 오랜 시간 위화감 없이 글쓰기를 쭉 해온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캐나다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 아이들의 적응기를 뉴스로 접하면서 새삼스레 그 당시 어린 저를 품어주셨던 선생님이 생각나서 다시 연락이 닿게 되었어요. 너무 고마운 분이에요. 얼마 전 제출한 제 박사학 논문에도 물론 감사의 표시를 했어요.


7. 어렸을 때 TCK로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해요!


에피소드는 아닌데 고등학교 때 쓴 한 시를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달빛에 심취해서 엄청 감성적인 글을 썼는데 내용이 “금색 바다에 까만색” 이런 식으로 백인사회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맥락이었던 것 같은데 실은 제가 살던 곳은 동양인도 많고 오히려 백인이 없는 동녀였어서 더 웃겨요. 뭔가 TV나 영화에서 접한 ‘마이너리티’ 감성을 오마주 했던 것 아닐까 싶어요.


8. 살면서 정체성의 혼돈 등을 겪은 적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어떤 케이스였고, 그때 느낀 바가 궁금합니다.


정체성 혼돈을 크게 두 번 겪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가는 문턱에서 처음 느꼈는데 그때는 또래 한국인 친구들은 다 ‘이과’를 가고 저만 ‘문과’로 갔어요. 그때는 그저 잘하고 즐기는 과목을 택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는데 막상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던 것 같아요. ‘아 나는 영어를 잘하지만 원어민들이랑은 아직 거리가 있구나’, ‘다른 과를 선택한 한국인 친구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이런 생각도 하고 통학생으로서 워낙 대학적응기 자체에 좀 노력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고민들이 많이 타파됐어요.

두 번째는 독일에 와서 인데 저는 20대 중반 어른으로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에 새로운 전환점이 왔어요. 제 자신을 소개할 때 ‘캐나다인이에요’ 하면 호기심이 해소가 안 되는 표정에 ‘한국에서 태어났어요’라고 말하게 되고 ‘한국계 캐나다인이에요’라고 말하면 뭔지 제 자신을 유별나게 여기는 것 같아서 번거롭기도 하고 아직도 제 소개하는 방식이 상황에 따라서 항상 달라요. 제 인종이 캐나다에서 보다 훨씬 더 도드라지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캐나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좀 희미해져 가는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그리고 동시에 부모님과 할머니가 한국에 계셔서 캐나다보다는 한국에 더 자주 가게 되는 점도 있고요. 요즘은 독일어를 배우려다 보니까 영어가 후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캐나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조금 소멸위기에 있다는 위기의식도 있어요, 하하. 그래도 덧붙이자면 저에게 bilingualism은 두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기 보다도 두 언어에 의존하는 상태예요. 저는 ‘완전’ 하기 위해 많은 언어들이 필요한 거지 매 언어가 완벽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면 새 언어 배울 때도 마음이 좀 더 편해요.

 

9.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 혹은 본인이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장점으로는 여러 문화에 지속적으로 관심과 호기심을 갖는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점이에요. 원래 약간 수줍은 면도 있는데 새로운 곳에 가서 여러 번 새 친구를 만드는 경험을 통해 사회능력이 많이 향상된 것 같아요. 멕시코에 다녀와서 그때당시 뉴스에 나오던 마약카르텔 이야기를 몰입해서 들었는데 그때 생각했던 게 ‘아 내가 더 많은 곳들을 다니고 지구 여기저기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면 온 세상일이 내 일처럼 관심을 갖게 되겠구나’ 였어요.


이런 사고방식은 국제 관계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큰 이점인 것 같아요. 실제로 이제는 세계곳곳에 친구들이 있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이 생기면 친구한테 연락하고 뉴스를 집중해서 보고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났을 때도 친구와 계속 연락하며 더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을 구색해 냈어요. ‘우리’라는 울타리가 넓어진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힘든 (힘들) 부분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멀어져 있는 점이에요. 세계 어디에 있어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어요. 그 어느 순간에도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한 곳에 있기는 어렵겠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친구들은 여러 나라를 오고 가면서 만나게 될 때도 있고 같이 계획해서 여행하기도 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지만 가족과 멀리 있는 게 항상 죄송하고 안타까워요. 그래서 항상 한국이나 캐나다로 이사 가는 것도 가능성을 두고 있어요. 물론 그러면 베를린 토박이인 제 배우자가 ‘롱디 아들’이 되겠지만요, 하하. 아예 1년을 3 등분해서 베를린, 서울, 밴쿠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두 달에 걸쳐 실행한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펀드레이징, 5000유로 정도 모금해서 식량과 의약품을 구매했다
친구 나탈리로부터 받은 수채화 엽서.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수많은 엽서, 편지와 소포를 주고받는 편이다.
2021년 베를린에서 - 배우자인 질라스 덕분에 독일에서 가족이 생겼다. 별일 없으면 일요일 아침에 브런치를 함께 하고 여행도 함께 하는 편.


10. TCK가 취업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국제기구 직업들을 보면 항상 “intercultural awareness”를 언급해요. 아무래도 직접 여러 문화를 겪어본 경험이 있으면 자연스레 충족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제 동료들을 보면 대부분 3-5개 국어가 가능하고 여러 나라에서 산 경험이 있어요.


11.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문화나 국적이라는 틀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세요. 근본적인 것은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특별하지도 않지만
있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품어보세요.

12. TCK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오면서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고 ‘이주민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커리어로 이어졌어요. 10년 전부터 관심 가졌던 ‘이주정책’ 분야를 꾸준히 파고들다 보니 현재 근무 중인 IOM까지 오게 되었어요. 제 경험에 기반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민경험에도 귀 기울이게 되고 국경을 넘는다는 게 보다 쉬워지고 저 자신 역시 더욱더 긍정적인 의미, 이미지, 그리고 영향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요. 저에게 TCK란 풀리지 않아서 더 재밌는 수수께끼 같아요.


13. 궁극적으로 본인은 어떤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성장을 하고 싶나요?


마냥 착한 사람보다는 제 자신을 적당히 객관화할 수 있고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항상 공정하고 따뜻하고 유머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으면 좋겠어요



2022년, 부모님께서 한 달 정도 베를린을 방문하시어 질라스의 고모네서 묵으셨다. 한국식 바비큐도 해 먹고, 다 같이 여행도 해서 참 행복했던 기억.

소영이 보낸 여러 사진과 글들을 정리하며, 그녀가 최근 시작한 의미 깊은 활동 정보를 아래에 붙인다. 어쩜 늘 이렇게 본인이 있는 자리에서 야무지게 본인의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너무 멋지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 우리가 왜 대학교 때 친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2019년 베를린에서 안나와. 안나는 AIESEC을 통해서 제가 봉사활동하던 Pass the Crayon이라는 NGO와 인턴십을 하러 우크라이나에서 베를린으로 왔어요. 그때 제가 혼자 살던 집이 거실이 넓고 거의 사용 안 해서 호스팅을 했는데 그때 계기로 좋은 친구가 되었어요. 2022년에 전쟁이 터졌을 때 계속 연락하면서 2달간 베를린에 와서 지내기도 했는데 6월 초에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갔고 8월에는 폴란드에서 짧은 주말여행을 함께 했어요. 그때 구체화한 아이디어가 함께 운영하는 블로그인데 조만간 론칭하려고 합니다. pestowithmeat.wordpress.com



덧붙이는 글: 이 원글을 쓴 것은 2022년이다. 이 글을 다시 정리하여 올리는 2024년, 우리는 둘 다 엄마가 되었고 서로 아기 물건을 소포로 주고 받으며 독일과 한국 사이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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