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국, 캐나다의 유학생활을 통해 TCK로 자란 오진주 님
진주는 나의 대학교 후배이다. 우리는 같은 한인 라디오 방송국 동아리에서 만났고, 당시 진주는 통통 튀는 피어싱과 진주만의 멋진 패션 감각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친구였다. 우리는 가끔 모여 맛있는 것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돌이켜보면 진주나 나나 그리 쉬운 유학생활을 하고 있지 못했고,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 다 졸업을 잘하고, 어느덧 진주 역시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몇 년이 지나 만난 진주는 언제 힘들었냐는 듯 보다 가볍고, 더 밝아진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진주는 당시 내게 명상과 마음공부가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고, 나 역시 한국에서의 삶에서 자리 잡으며 나만의 페이스를 찾고, 한결 더 행복하고 안온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그 말이, 진주의 변화가 참으로 반가웠다.
유학은 (특히나 조기유학은) 단순히 다른 나라에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외국어를 잘하게끔 하는 과정이 아니다. 정말 예민하고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춘기에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혼자의 삶을 일궈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내가 TCK의 삶과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점점 조기유학을 비롯하여 주재원 및 부모의 사업 등으로 전 세계에는 TCK들이 넘쳐나는데, 성장기의 TCK들이 자라며 느끼는 혼란과 어려움이 본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데도 도움을 주고 싶었고, 뿐만 아니라 자녀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 역시 단순 외국어를 잘하게끔 하기 위해 자녀를 멀리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염두에 두고 유학 등의 과정을 겪는 자녀들을 서포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게 정서적으로 지지를 해주는 것 뿐만 아니라 자녀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자원을 더 잘 펼칠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그러한 것을 이야기 함에 있어 TCK라는 정체성은 빼먹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ㅇ
여하 간에 오랜만에 만난 진주는 본인이 충청도에 있는 교육청에서 일을 한다는 이야기와,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후자보다는 전자가 나에게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보통 유학을 하거나 TCK로 자란 친구들은 공무원의 삶을 선택하지 않을뿐더러 내 머릿속 진주는 참으로 자유분방하며, 답답한 분위기를 못 견딜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직업을 택하게 되었지?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공무원 세계에 대한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나는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시점에서 또 몇 년이 지난 지금, 진주와 연락을 해서 그때의 그녀의 커리어 선택에 대해 묻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하고 자녀에게도 TCK의 삶을 선사하고 싶어 쉽지 않은 이민이라는 선택을 한 그녀의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며, 그녀가 자녀 양육과 본인의 정체성에 있어 TCK라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역시 들어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진솔하게 답해준 나의 귀한 친구 진주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으며, 그녀의 이야기가 조기유학이나 이민 등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 그리고 어떻게 TCK가 충청북도 교육청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한 분들에게 재미있게 다가가길 바란다.
1. 안녕하세요,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1991년생 오진주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미국을 계속 왔다 갔다 하다가 (처음 가기 시작한 것이 3학년이나 4학년 때인 것 같아요) 미국에서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중학교를 1년 다닌 뒤, 중국 광둥 지역으로 이주하여 국제학교에서 4년 기숙생활을 하며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캐나다 밴쿠버에서 4년간 대학생활을 한 뒤 한국으로 2013년 여름에 돌아와 잘 살다가 작년 12월에 영주권을 딸 목적으로 (그리고 나중엔 시민권까지!) 다시 캐나다로 돌아왔어요.
2. 성장을 하며 여러 변화를 겪어오셨네요. 각 과정마다 에피소드도 있고, 진주님 스스로에게 변화도 많았을 거 것 같아요. 그 이야기들을 좀 더 들려주시겠어요?
가장 어릴 적 한국에 거주할 땐 저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 친구들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고집도 세고, 사회성은 부족한데 책을 많이 읽어 잡다한 지식이 많다 보니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토론하다 작은 논쟁으로 번져나갈 때도 많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봐도 많이 재수 없는 애였던 것 같아요.
미국에 아예 넘어가서 살게 되면서 제 인생의 첫 번째 고비가 왔어요. 부모님은 한국에 계시고, 당시 가족과 친했던 가족의 어머니와 딸 둘과 함께 유학을 간 것이었는데, 저희 부모님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고비가 더 크게 다가왔었어요. 그 당시 저는 어려서 몰랐지만, 정당하게 부모님이 제 양육비를 보내며 같이 지내던 것인데 그걸 몰랐던 저는 항상 눈칫밥을 먹으며 지냈죠. 그래도 다행히 타고난 인복으로 좋은 친구들 만나 학교에서는 정말 행복한 생활을 했죠.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가는 것도 싫어했고, 학교에서 꽤 먼 거리에 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틈만 나면 친구들이랑 방과 후 약속을 잡아 만났습니다.
당시 함께 유학을 갔던 그 가족과 저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는데,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써서 혼이 나고 욕을 먹어도 (지금 생각해 보면 고구마 스토리가 참 많은데 어려서 그랬나 왜 그때는 항상 아무것도 안 하고 당하고 참기만 했나 몰라요) 미국에 계속 있고 싶었어요.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 자기 전에 상상 속에서 엄마를 만들어내어 제 침대 옆에 눕혀 상상의 엄마 얼굴을 만지며 잤는데도 한국에 돌아가기 싫었어요.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가족들이 저와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도 안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신기할 정도로 집에서 힘들고 억울한 일을 많이 겪는 만큼, 밖에서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학교에선 제 인생 처음으로 눈만 마주쳐도 서로의 생각을 읽고 모든 게 통하는 게 느껴지는 영혼의 단짝! Greg와 Dana가 큰 힘이 되었어요.
행복했던 학교 생활 덕에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야 했을 땐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마지막 날이었는데, 당시 학교 규정상 이성친구와는 가까운 스킨십 (안기 이상)을 하면 안 됐는데도, 하루종일 Greg와 서로를 붙잡고 눈알이 빠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울었어요. 엄밀히 말하면 학교 규정 위반이었지만, 제 사정을 다 아는 학교의 모든 분들이 그냥 같이 마음 아파해주시고 안타까워해 주셨죠.
한국으로 돌아와 중학교 생활을 1년을 하고, 중국으로 이주하여 국제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어요. 중국에서 유학생활은 총 4년을 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죠. 중국에 서 첫 번째 주에 느꼈던 감정은 ‘괜히 왔나’ 였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했던 유학생활 중 유일하게 오빠가 함께 했던 유학생활이었는데, 오빠가 같이 왔다고 하더라도 성별에 따라 기숙사 건물이 달랐어요. 그리고 원래는 2인 1실 기준인 기숙사 방을 저는 혼자 사용했어요. 텅 빈 기숙사와 제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니 학교 일과가 끝나고 난 뒤엔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죠. 저는 어려서부터 불면증이 있었는데, 그래서 온기 하나 없는 숙소에서 밤늦게 잠들을 때까지 더 불안감을 느꼈어요. 중국에 오기 전까지 가졌던 대부분의 관계의 전제가 서로 호의적인 마음이었다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과는 여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관계를 맺으며 힘들었어요.
기숙사의 다른 학생들이 거의 저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었는데, 소위 전형적인 선후배 관계를 당연시했어요. 존댓말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언니들이 시키면 모든 일에 수긍을 하고 따라야 했으며, 그 기준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학교 일과가 끝난 뒤 불려 가 혼이 나고 ‘게임’이라는 명목 하에 육체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았어요. 언니들과 밥을 먹으면 사이좋게 하하 호호 함께 식사를 하는 것 같지만 눈치껏 알아서 물을 떠 오고 더 필요한 반찬을 받아와야 했고, 한국에서 부모님이 소포를 보내주면 언니들이 원하는 물건은 먼저 언니들이 대놓고 달라고 하기 전에 줘야 했어요.
중국 유학 초반까지도 저를 힘들게 했던 것들은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한다고 했던 생각과 착한 아이증후군이었어요. 다른 TCK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살며 마주친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랬던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어렸기에 지금보다도 더 모난 모습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요. 불행 중 다행히 이런 상황에 계속 노출이 되면서 점차 정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고, 제 권리를 되찾고 맞서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죠. 물론 상황과 사람의 성격에 따라 같은 환경에서도 다르게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인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처음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양보하는 것, 참고 인내하고, 내가 상대방에게 맞춰 나가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상황을 점점 겪으면 겪을수록 그건 착한 게 아니라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됐죠. 상대방이 나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나도 배려와 존중이 뒤따르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무조건 배려하고 참고 존중하자. 그러면 언젠간 알아주겠지’라는 안일하고 순진한 생각을 했던 거죠. 저는 타고난 성격이 고집에 굉장히 세고 목소리도 큰 편인데 어딜 가나 처음에는 이런 모든 면들을 숨기고 관찰하고 맞추는 것에 중점을 뒀던 것을 보면, 정말 사람들에게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었나 봐요.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남한테 맞추는 제 모습이 아닌, 본래의 제 모습을 편안히 드러내게 되었고, 자신감도 되찾았어요. 중국에서의 의 4년 중 마지막 2년은 외국인 여학생 기숙사 회장도 했어요. 타고난 제 모습처럼 목소리 크고, 나서기 좋아하고, 정의감에 항상 불타있는 모습이 나타났죠.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시기에, 제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해주신 분은 당시 IB과정을 하며 Korean A1 선생님으로 계셨던 장사미 선생님이셨어요. 정의감에 항상 불타있는 저이기는 했는데 그 정의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밀하고 객관적인 논리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들어주신 분이셨죠. 그저 학교과정(한국문학)만을 가르쳐주신 것만 아니라,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신 분이셨어요. 모든 것에 ‘왜?’라는 질문을 해보고 당연시했던 것들의 사고를 많이 뒤집던 시기였어요.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각도가 당시엔 얼마 안 됐던 것 같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각도의 갭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기에, 장사미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제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되지 않네요.
중국에서 국제학교를 졸업하고는 캐나다로 대학을 갔어요. 캐나다에서도 처음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조금 힘이 들었지만, 미국과 중국에 처음 갔을 때보다는 훨씬 빨리 적응해 나갔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새로 마주하게 된 문화에 대해 완벽한 해석이 되기 전까지는 제 본래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못했던 저라 처음에는 본래의 제 모습보다 항상 훨씬 업되어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죠.
저는 사실 어려서 큰 상처가 되었던 일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상처가 너무 커서 무의식적이게 상처를 묻어두고 없었던 일처럼 잊고 살다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뒤늦게 문제를 마주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려서부터의 불면증도 문제가 생겼던 시점부터 생긴 거였더라고요. 문제를 마주하며 우울증이 생기고, 점점 심해졌어요. 당시에는 제가 왜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너무 들뜨고 신나 있고, 굉장히 많이 웃고, 장난과 농담도 많이 하며 극도로 밝은 모습을 보였나 몰랐어요(그냥 제 성격인 줄 알았죠.). 지금은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상처가 회복이 된 건강한 마음으로 돌아보면, 상처를 외면하고 잊으려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캐나다에서의 대학생활은 우울증이 심해지며 점점 정상적인 일상생활조차 힘들어졌어요. 3, 4학년이 돼서는 우울증, 불면증과 함께 공황장애, 불안증, 섭식장애가 너무 심각해져서 학교 수업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죠. 언제 공황장애가 찾아올지 몰라 밖에 나가는 것 자체를 점점 두려워하게 됐어요. 그나마 용기를 내 수업에 갔다가 수업시간 도중에 공황장애가 온 적이 있는데, 전공 수업 중이었어서 수업 규모가 작아 정말 모든 학생과 교수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더 힘들었어요. 그저 사람들의 시선뿐이었는데 당시에는 공황장애 중에 정말 내가 죽을 것 같은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져 어떻게 그랬는지 기억에 나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교실을 빠져나왔어요.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캐나다에서는 의학적인 이유로 학교 수업을 빠지거나 과제를 제출하지 못할 때 교수님께 제출하는 doctor’s note에 제가 어떠한 병명 때문에 수업을 빠지고 과제를 제출하지 못했는지 적혀있지 않아요. 많은 교수님들 눈에는 제가 그저 수업에 오기 싫어서, 과제를 제출하기 싫어서 그런 것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몇몇 교수님들이 대놓고 저를 싫어하시고 모진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힘들지만 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려고 하면, 본인은 그걸 알 이유도, 필요도 없다며 딱 잘라내며 제 이야기를 대부분 들어주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그냥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침대에서 나오는 것도, 끼니를 챙겨 먹는 것도, 심지어 나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고 그저 살아있게만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제 상황을 아는 사람이 당시 남자친구와 친했던 동생 한 명을 제외하곤 없었어요. 법적 보호자가 제 곁에 없고, 제 상황을 모르니, 정신적으로 많이 아픈 상황에서 제가 일으킨 문제들을 (수업,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못하고,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거나 시험을 보러 가지 못하는 것) 제가 모두 수습해야 하는 것들이 가장 힘들었어요.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려운데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와야 했고,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해지니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데 여기저기 날짜와 서식을 지켜 제출하고 설명해야 할 것들은 왜 이리 많은지.
그때는 항상 죄책감에 휩싸여 있고, 그러다 보니 더 자기 파괴적인 행위와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낙제받은 수업 없이 학교를 4년 안에 졸업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같아요. 그 시절 저를 지금 만날 수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어요. 많이 위로해 주고, 본인을 미워하지 말라고 도닥여줄 것 같아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선 저 자신을 건강하게 하는데 가장 큰 힘을 쏟아부었어요. 그러기 위해 마음공부를 참 많이 했어요. 저의 마음과 정신이 건강하지 못할 때 하는 연애는 상대방에게도 저에게도 독이 된다는 생각에 홀로 제 모습이 완전하다고 느낄 때까진 연애도 안 했어요(과거의 남자친구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그리곤 제가 갖고 있던 다양한 문제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또 제가 단단하고 건강해졌다고 느껴지자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도 더 이상 독이 되는 관계가 아닌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연애나 결혼이 삶의 목적은 절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그때 지금의 남편의 제 삶에 나타났죠. 남편은 저와 만나고 (사귀고가 아닌 만나고) 한 달 만에 저와 결혼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실제로 저희는 만나고 10개월 만에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그해 아이를 가졌어요.
남편을 만나 많이 성장했고, 앞으로도 남은 평생 동안 더 같이 잘 성장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모두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리고 엄마가 되어보니,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선 제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는 것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꼈어요. 아이를 양육하고 가르치는 건 저인데, 사실 부모가 되는 과정 속에서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저 자신을 돌아보게 돼요. 그러면서 저도 몰랐던 제가 갖고 있던 문제들 (제가 예민하고 약했던 부분들)을 깨닫고 재정비하게 돼요. 또 엄마가 되기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들을 고민하고 정의를 내리게 되고요. 이제는 삶이 힘들 때는 있지만, 그래도 항상 행복은 전제로 깔려있는 상태입니다.
3. 한국으로 복귀 후 충청도에 있는 교육청에서 일을 했던 게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보편적으로 보았을 때 같은 학교를 다녔던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 지역적으로나 업무 환경적으로나 조금 다른 결정을 했던 이유가 궁금해요.
사실 특별히 이 일을 하고 싶다! 이 일을 해야겠다! 하고 시작했던 일은 아니었어요. 처음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충청북도교육청에서 근무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는 처음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내가 정말 하고픈 일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처음엔 서울의 한 회사에서 업무자체는 흥미롭지만, 딱히 무언가를 배우는 곳은 아니었어요. 그저 그곳에서 근무를 하며 배운 것이라곤, 대부분의 직원이 굉장히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고(본인 포함) 박봉의 인턴 6개월 과정을 거치며 ‘아 이런 회사와 이런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 걸러야 하는구나’ 딱 하나뿐이었죠.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둘 것이라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하자마자, 청주에 와서 같이 살자고 하셨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해외생활을 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살지 않았던 제가, 나중에 결혼까지 해 버리면 정말 이대로 영원히 같이 살 기회는 없을 것 같다고 하셨죠. 저도 부모님의 말씀에 동의해 우선은 다음 직장을 정해두지 않고 무작정 청주로 내려왔죠. 그리곤 아무런 경제생활 없이 다음 직장을 알아보기만 하기 싫어서 우선 돈이라도 벌며 알아보자 하며 시작한 일이 영어학원 강사였어요. 별생각 없이 쉽게 시작할 수 있어서 한 일이 이렇게나 제 적성에 잘 맞을 줄은 사실 생각도 못했어요. 저는 원래 타고난 성향이 무언가를 배우는 것 자체를 굉장히 즐기는 사람인데, 그 즐거움을 남에게 가르쳐 주는 일이라니! 게다가 근무를 했던 학원은 아이들에게 단순히 영어라는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를 갖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핵심이었거든요.
일을 하며 많은 보람을 느꼈는데, 아이들도 너무 좋았고, 또 원래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굉장히 히 흥미로운 일이었어요. 아이들을 보며 저를 돌아보기도 했고,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정말 아이들을 통해 저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아이들만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깊이 매료됐고, 또 아이들이 나아갈 방향의 길라잡이를 하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큰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쳤어요.
제가 근무를 하기 시작했을 때 타이밍도 도왔고, 또 열심히 하다 보니 실력도 인정받아 거의 들어가자마자 Head Instructor로 승진할 수 있었어요. 다른 원어민 선생님들의 수업을 매주 모니터링하고 피드백 주며 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트레이닝해 주고, 신규 원어민 강사도 트레이닝하고 수업 커리큘럼도 짰어요. 단순히 수업만 하는 것보다는 많이 바빴지만 정말 재밌었어요.
제가 느끼는 배움의 즐거움 자체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뻤고, 아이들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부모님이 보내서 학원에 오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영어 실력과 함께 생각이 커지는 모습을 보며 행복했죠. 다른 선생님들 수업보다 제 수업을 찾는 것에도 큰 감사함을 느꼈어요.
감사하게도 당시 학원의 부원장 선생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저에게 또 다른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주셨어요. 이 때 알려주신 일자리가 충청북도교육청에서 국제교육교류와 교육감님 해외순방 업무, 그리고 교육청 통번역을 하는 일자리였는데, 알려주신 것처럼 도교육청 웹사이트에서 구인 공고를 보고 사실 처음에는 이게 설마 내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인가 라는 생각에 지원을 할 생각조차 못했죠. 구인 공고에 적혀있는 업무 내용을 하기에는 제가 턱없이 부족한 사람같이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당시 나이도, 생각도 어렸던 저에게 (당시 25살) 부원장 선생님께서 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만약에 지원을 했다가 안되면 잃을 것이 뭐가 있냐며, 그리고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교육청)에서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요. 사실 저는 타고나기가 본인에 대한 의구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남들이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해주면 좋은 마음 5%에 나머지 95%는 나는 사실 잘하지 못하는데 운이 좋아 잘한 모습만 보인 것인데, 내 본 실력이 드러나 실망시키며 어쩌지 하며 불안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니 부원장 선생님 말씀이 맞더라고요. 시작도 전에 겁먹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는 남(교육청)에게 맡기고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류 심사를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아쉽게도 학원 수업 시간과 겹쳤어요. 대신 수업을 맡아줄 선생님도 안 계셨죠. 그런데 이게 정말 운명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서 당신 유행하던 계절독감과 신종플루가 모두 옮아 수업을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태어나서 가장 많이 아파본 때가 이때였어요. 그래서 면접 보는 당일 오전에 병원 가서 수액을 맞고, 수액빨이 떨어지기 전에 가서 면접을 봤어요. 그리곤 집에 돌아와 바로 쓰려졌죠. 면접관분들은 여럿에 지원자 한 명씩 보는 면접이었는데, 제가 마지막 차례였던 것 같아요. 실제 업무를 맡았을 때 일어날 법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는지, 이 업무를 맡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 영어면접을 포함해서 다양한 질문을 주셨었는데, 면접 보고 나오자마자 당시 차가 없었던 저를 기다려주고 있던 엄마에게 붙은 것 같다고 말했어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면접 자체가 너무 재밌었어요. 질문이 재밌었고, 답하는 것도 재밌었어요. 그리고 그냥 질문과 답이 오고 간 것이 아니라 면접관 분들과 정말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소통을 한 느낌이었어요. 정말 처음 만났는데 잘 맞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꼭 맞는 느낌이었죠.
쓰다 보니 서두가 너어어어무 길어졌는데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앞에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당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저도 몰랐던 제 관심사를 알게 되고, 또 그를 통한 기회를 얻다 보니 갖게 된 직장이었어요. 처음에는 부모님의 말씀에 동의해서 고향에 돌아갔어요. 저는 원래 어려서부터 꿈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제 꿈이 어떠한 직업에 매여 있다기보다는 (너무 이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순진해 보일 수 있지만) 그저 어제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 그때, 그때마다 그것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직업 중 저의 특성과 잘 맞아 보이는 직업을 꿈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말 그대로 아이들은 미래이고, 미래를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면 아이들에게 투자를 하는 것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없다는 걸 몸소 깨우쳤죠. 그리고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현장에서 일을 배우고 나니, 교육이라는 것의 큰 그림을 배우고 싶어 졌어요.
학원에서 아이들과 교육에 대한 애정을 담뿍 키운 뒤, 교육의 좀 더 큰 틀을 볼 수 있는 큰 조직에 근무하게 되니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직접적으로 아이들과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보람 있었죠. 또 위로는 교육부와, 아래로는 교육지원청, 학교, 선생님과 함께 일을 하며 큰 조직에서만 배울 수 있는 점들을 배웠어요. 물론 어딜 가나 좋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이때도 인복이 좋아 좋은 교육감님과 좋은 상사, 팀원들을 만나서 많이 배웠어요.
물론 교육청에서 근무를 하는 것이 처음부터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어느 곳을 가나 장단점이 있듯이 다른 단점들도 분명 있었지만 더 큰 장점에 즐겁게 근무를 했는데, 나중에 그 장점이 사라지니 기존의 단점들도 더 부각되며 힘들게 느껴졌죠. 아무래도 제가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해외에서 생활을 했어서 그런지, 다른 분들께는 큰 단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을 부분들도 저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어요. 공무원 생활이다 보니 당연히 다른 근무지보다 보수적인 부분이 있었고, 이런 부분이 저와는 더 크게 부딪혔어요.
교육청 근무를 하며 많이 들은 소리 중 하나가, (저는 특수 케이스라 한 자리에 계속 머물렀지만) 공무원들은 자리를 주기적으로 돌고 돌며, 지금 헤어지는 사람도 어딘가에선 다시 만나게 되어 있으니 아무리 싫고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흔히 말하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으로 가라는 거였죠. 저는 문제가 있으면 현명하게 해결을 하는 것이 상대방과 본인 모두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인 데다, 비효율적인 관습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라 정말 힘들었어요. 원래 문제는 해결하려고 드러낼 때는 힘들지만, 그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해결까지 갈 수 있는 거잖아요?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문제를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좋지 않은데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라며 넘어가야 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또, 서로에게 부정적일 수 있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눈치’가 굉장히 중요했죠. 대놓고 말하지 못하니 눈치를 주게 되고, 그러다 보니 눈치껏 알아서 상황에 맞춰야 하고. 저는 직설적인 소통을 선호하는 사람인지라 이런 것들이 굉장히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이고 자원 낭비라고 생각했어요. 막무가내로 하는 비난이 아니라면, 왜 고쳐야 할 부분들을 말을 하지 못하고, 또 그런 말이 오갔을 때 담백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같은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돌려 돌려 돌려 표현해 가며 굉장한 에너지 소모의 눈치전이 너무 피곤했어요. 그래도 장점이 더 많아 즐겁게 일하던 곳에서 장점이 사라지니 버티던 모든 것에 지쳤죠. 그러자 몸/마음이 많이 망가졌고, 나중에는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4.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정체성의 혼돈 등은 없으셨나요?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서 유학생활을 계속해 와서 힘들었던 점도 있고, 조금씩 적응이 됐을 법도 한데, 유학생활을 하던 국가도, 또 생활환경과 주위 사람들도 계속해서 바뀌는 데다가 제가 성장하면서 생기는 고민의 종류나 깊이도 달라지다 보니 항상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바뀌는 문화 속에서 아직은 어렸던 제 자신을 주변 환경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를 내리려 하다 보니 계속해서 ‘나’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었어요. 내가 자라면서 나라는 사람이 변하기도 하고, 주변환경에 따른 상대적 기준 또한 달라지다 보니 정의를 내리는 것에 변수가 많았었죠.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 많이 어렸을 때에는 내가 정체성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해 힘들긴 했는데 정확히 왜 힘든지조차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정의를 내리며 그 반복되는 행위?!? 에 점점 더 능숙해지게 되었어요.
정말 쉽고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모든 문화는 다르다는 사실을(옳고, 틀린 문화는 없고 정말 다르다는 것, 국가나 지역뿐 아니라 모든 것(가족, 개개인, 나이, 소속기관 등의 정말 모든 것!) 물리적으로 몸소 부딪히며 뼈에 새겨가며! 배웠어요. 그리고 그 다른 문화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상대적으로 비교하며 찾을 것이 아니라 나는 계속 변해가지만 그 순간순간 속 나는 절대적인 것(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정의를 내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죠.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야’ 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내가 또 변하거나, 또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내가 이런 점도 있구나’ 하며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도 생긴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점들이 나 자신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도, 또 다른 개개인을 이해할 때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5.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한 후 캐나다 이민을 선택하셨어요. 이민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이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딸 때문이에요. 제 삶을 돌아보면 제가 받은 가장 큰 복이 여러 나라를 경험하고 살아본 것인데요. 다양한 것을 보고, 경험해 봐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고 생각해서예요.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시선은 누군가가 가르쳐준다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딸에게도 제가 받은 복을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저는 남편과 많이 대화를 나누는 편인데요, 그러면서 남편도 제가 자라온 환경을 딸에게 제공해주고 싶어 했어요. 다행히도 둘이 생각이 같았죠. 그리고 비판적, 능동적 사고를 중요시하는 제게 (이 또한 다행히 남편도 생각이 같네요) 아이에게 이러한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 물론 한국에서도 가능하겠지만, 캐나다가 한국보다 더 쉬울 거라고 판단이 되었어요.
6. 결국 진주님의 자녀 역시 TCK로 자라게 될 텐데, TCK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어떤 부분을 중요시하시는지 궁금해요.
저희 딸 이름은 ‘온’ 이예요. 편안할 온. 나 자신이 편안한 아이가 되길 바라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자존감이 높고 단단한 아이요. TCK로 자라면서 제가 겪었던 고민과 똑같진 않아도 비슷한 고민들을 아이 또한 겪게 되겠지요. 제 어릴 적 고민들을 돌고 돌아 찾은 제 답은 자존감이었어요.
자존감이 높으면, 모든 것의 기둥이 탄탄해지고,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 나는 원래 있는 그대로 모습의 나라는 사실이 쉽게,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죠.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그에 비교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내 본연의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아이가 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남들 또한 본인과 똑같이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또한 저는 저희 딸이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아이가 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사고가 얼마나 재밌는 것인지 알고 즐기는 아이로요.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뭘 그냥 가르쳐주기보다, 아이가 관심을 조금이라도 보이거나, 겪어보지 못했지만 제가 아는 아이의 성향에 따라 아이가 관심을 보일 것 같은 주제가 있으면 일부러 그 주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던져주고, 질문을 많이 해줘요. 딱 아이가 지금 생각하는 수준보다 조금만 더 높게요. 아이가 스스로 답을 하다 보면, 나중엔 자신의 생각을 키우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겠죠. 최대한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게 자극을 많이 해 줍니다. 지금은 두 돌 밖에 되지 않기도 하고, 아이가 타고난 성향이 저와 매우 비슷해 아이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사실 아이가 크면 어떻게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7. 궁극적으로 본인은 어떤 사람으로 성장을 하고 싶나요?
저희 딸 이름에 제 염원이 담겨있죠. 저 또한 나 자신이 편한 사람이요. 내 있는 모습 그대로가 편하고, 밉거나 수치스럽지 않은 사람이요. 나의 못난 점까지 모두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럴 수도 있고, 나의 모든 점을 사랑할 만큼 심하게 못난 모습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네요.
8.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 혹은 본인이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장점은 문화의 다양성 (간단해 보이지만 이렇게 큰 장점이 또 어디 있나요), 다른 문화를 편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자세, 새로 접한 문화를 빠르게 공부할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아쉬운 점은 모든 TCK 분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저는 한국사람이 보기엔 한국을 잘 모르고, 미국, 중국, 캐나다 사람이 보기엔 본 국가를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전에는 어느 문화든 100% 그 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자국민처럼 모른다는 것이 큰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그렇게 몰라서 뭐? 내가 살아온 환경이 이러니 그럴 수 있지.’라고 받아들이니 편해요. 몰라도 창피하지 않고, 모른다고 편안하게 질문하고, 대신 남들이 갖지 못한 시선에서 좋은 생각이나 내용을 전할 수도 있고요.
또한, 내가 태어난 곳의 사람들에게서 ‘넌 이거 안 겪어봐서 모르잖아, 너는 외국에서 쉽게 편하게 유학하며 컸잖아.’라는 식의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요?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제 각기 다른 난제를 마주할 뿐이지 쉬운 삶은 없는데 쉽게 살아왔다고 오해를 받고, 또 그 쉽게 한 유학생활 덕분에 쉽게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제 능력이 아닌 부모 잘 만나서 금수저 까진 아니지만 은수저의 삶으로 쉽게 쉽게 (그들의 기준에서) 성공을 얻어내는 것이라고 오해받는 것이요. 물론 부모 잘 만나서 여러 나라에서 살 수 있었던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사실이지만, 그곳에서의 삶이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장점처럼 보이지만 단점이었던 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얘는 어디, 어디, 어디서 살고 유학하다가 왔어.’라고 소개가 되면 일종의 면죄부?!? 같은 것이 주어지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사회생활 하면서도 회식장소에서 숟가락 젓가락을 놓는다던지, 커피심부름을 시킨다던지 하는 것들을 막내들에게 시키는 곳들도 있는데, 그걸 시키는 사람들이 자신이 자신의 잘못된 점을 알고 저에게 이런 일들을 그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은 다 쉽게 쉽게 시키면서, ‘얘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애야.’라는 부가설명 하나에 이런 일들에서 모두 예외가 되었어요. 처음에는 안 시키니 편해 아무 생각이 없다가, ‘어? 나는 안 시키는데 다른 사람은 시키네?’가 보이게 되고, 저에게 부당한 일들을 시키다가도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애’라는 말을 듣고 태도가 훨씬 정중하게 변하는 사람들을 보았어요.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것이 제가 남들보다 더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아닌데 말이죠. 편안함에 빠져 진실을 못 보게끔, 제가 저 자신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끔 해이하게 할 때가 있었어요. 상대방 딴에는 저를 더 긍정적이게 봐주는 것이겠지만, 저를 제 자신 진짜의 모습으로 공평하게 평가를 해 주면 좋겠어요. 이런 점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다가 저와 비슷한 직급의 (대부분은 아니지만 소수의) 다른 직원들과 어울리기 힘들어질 때도 있었어요.
9. TCK가 취업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다른 문화에 적응해 나가면서 터득했던 것들로 어느 사회에서나 더 빠른 적응을 할 수 있다는 것, 다른 문화는 틀린 문화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수용성, 다른 문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의 중심(코어)은 잃지 않고 필요한 부분들은 재빠르게 맞춰 나갈 수 있는 유동성 등 많은 것 같아요.
10.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내가 태어난 곳에서든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든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문화와 나 자신이 다르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 없다는 것과 어디든 속하지 않고, 달라서 힘들었던 내 모습이, 미래엔 남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된 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모두 다 내가 속하지 않는 곳이 아니라, 나는 여기도, 저기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12. TCK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거친 돌조각을 품고 열심히 다듬어 만들어지는 진주 같은 존재들 같아요. TCK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고 이해가 쉬웠던 부분들이라 고민이나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들을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살면서 몸으로 부딪히며 고민하고 노력해야 얻어내야 하잖아요. 그래도 힘든 만큼 큰 보상이 주어지는 거죠.
진주의 인터뷰를 하며, 나는 앞으로 나의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꼭 TCK의 삶을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나와 똑같은 경험을 꼭 하지 않고도 어떻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탐험하고 새로운 곳에 유동적으로 적응하며 교류할 수 있게끔 해줄지, 그 속에서 단단하게 맺힌 자존감으로 잘 클 수 있게 할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쩜 이러한 교육과 양육에 대한 고민은, 내가 TCK의 삶에 대해 계속 탐구하고 공부하면서 함께 성숙해지고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시 한번 인터뷰에 응해준 진주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글을 맺는다.